: 성내 지명의 유래
태극궁① - 프롤로그: 성내 지명의 유래
태극궁② - 연호공원(승천문) - 김춘추 : 치열한 외교전쟁
태극궁③ - 양후청(태극전) – 정관정요 : 당태종의 정치 (배와 민심)
태극궁④ - 현무문 : 당태종의 현무문의 변
태극궁⑤ - 서오대 : 당태종의 종교 개방성
명나라의 진왕부의 흥망성쇠
대장군 서달(徐达)은 홍무2년(1369) 원나라 장수 장사도(张思道)가 버려두고 떠난 봉원로(奉元路)성을 별다른 피해 없이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명나라는 서부 평정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고,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마지막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명태조 주원장은 봉원로의 새 이름을 시안부(西安府)로 정하면서 튼튼한 성을 새로 쌓으라 명하였습니다.
중원 역사상 권력자가 관중지방에 집착하는 경우가 꽤나 있었습니다. 풍읍(시안시)은 주문왕 희창이 천명을 받은 바로 그 성스러운 땅이 아니겠습니까. 그곳은 시온산, 카바신전, 아사달과 같은 곳일 터입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난징이 도읍지로 결정된 이후에도 시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평소 아끼던 차남 주상(朱樉)을 진왕(秦王)으로 봉해 시안부로 보내어 상황을 잘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진왕(秦王)은 북원(北元, 1368-1635) 견제의 임무를 받은 9명의 변경 번왕(塞王) 중 가장 중요한 자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사치 때문인지 무능 때문인지, 진왕 주상은 곧 부친과 황태자 주표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주표의 신중함까지 더해져, 이래저래 천도 프로젝트는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습니다.
황태자 주표와 주원장이 차례로 사망하자,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정변을 일으켰으며 바로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수도를 옮겨버렸습니다. 강남 기득권을 견제하고, 북원의 준동에 선제 대응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왕 주체는 부친의 뜻에 따라 북경에 주둔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동북부의 여진족과 조선도 북원 못지않게 중대한 위협 요소라는 점을 말입니다.
어쨌거나 주원장의 차남 주상은 진왕으로 봉해지자마자, 본인이 거처할 궁부터 건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안성벽 내에 3중 성벽, 2중 참호 구조를 갖는 철옹성이 새로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왕부(明秦王府)입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주상은 동생이 정변을 일으키기 이전에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험한 꼴은 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덕에 시안부가 이자성의 농민군에게 함락되기 전까지, 주상과 그의 자손들은 무려 13대 248년 동안, 진왕부에서 대대손손 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시안부 함락이후 진왕부는 잠시 농민군의 궁궐로 사용되다가(1643), 만주족의 입관 이후에는 외성의 상당부분이 파괴된 채, 팔기군(八旗军)의 주둔지인 만성(满城)으로 변모하였습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후 만성은 그 이름이 ‘신성’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군벌 풍옥상(冯玉祥)은 그때까지 남아있던 만성의 내성까지 모두 허물어버리고, 거기에서 나온 자재를 재활용하여 그 자리에 신성대루(新城大楼)라는 신식 건물을 세웠습니다. 팔기군의 격렬한 저항에 불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풍옥상은 만성을 흔적도 없이 부수어버렸습니다. 참고로 풍옥상은 마지막 황제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낸 군벌로서, 후대에 의해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신성대루의 오늘은 어떨까요? 흥미롭게도 그 자리에는 섬서성인민정부(陕西省人民政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섬서성인민정부는 섬서성 전체의 행정과 정책을 관할하는 가장 중요한 정부기관입니다. 아마도 진왕부의 행정기능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거나, 시안사변의 주도자인 장학량(张学良)과 양호성(杨虎城)의 지휘부로 사용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현재 신성광장 앞에 진왕부 외성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시안성벽 내 행정구역 명칭의 유래
시안성벽 내 현행 행정구역은 종루(钟楼)를 중심으로 3개 구로 나뉘어집니다. 신성구(新城区), 연호구(莲湖区), 비림구(碑林区)가 바로 그것입니다. 종루를 기점으로 북동쪽이 신성구, 북서쪽이 연호구이며, 종루 동서축의 남쪽으로는 비림구입니다. 신성구, 연호구, 비림구의 명칭은 각각 신성대루(新城大楼), 연호공원(莲湖公园), 비림박물관(碑林博物馆)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신성대루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씀드렸으며, 비림박물관은 간단히 언급하기에는 너무나 큰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다음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연호공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연호공원은 제가 시안에서 좋아하는 공원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서민공원입니다. 성정부 청사 북문에서 서쪽으로 1km쯤 걸어가면 이 공원이 나옵니다. 쿵작거리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춤추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 손자녀와 함께 산책하는 조부모들, 공원 한쪽에서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와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둘러싼 구경꾼, 모두가 정겹습니다. 낡았으나 푸근합니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개발로 인하여 어딜 가나 반짝반짝 세련되고 화려한 시안이지만, 몇몇 공원에 오면 본래의 서민적인 풍모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묘한 즐거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색다른 질감은 늘 기쁨을 주는 것이니까요.
연호공원 안에 있는 연꽃 가득한 연화지(莲花池)는 아까 그 주원장의 차남, 진왕 주상이 흙을 파고 멀리서부터 강물을 끌어와 인공적으로 만든 것으로서, 진왕부와 연결된 왕부의 전용 연못이었습니다. 이 반짝거리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600년 전 권력자의 풍류를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한가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새삼 신기합니다. 만약 그때였다면 연못에 물을 끌어오는 노동에만 실컷 동원되고, 막상 연못은 즐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전에 시안 성벽이나 진왕부를 건설하는 노역에 끌려왔을 수 있겠습니다. 다행히 세상이 좋아져 더 이상 목숨을 위협하는 강제노동에 끌려올 필요가 없으니, 우리의 삶도 끝없이 행복하기만 해야 할 것 같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못해 아쉽습니다.
당나라 태극궁을 중심으로 연속 글을 써볼 터인데, 연호공원은 그 도입부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연호공원은 태극궁의 정문이 있던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은 태극궁의 정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