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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끈한 콜라 Nov 17. 2023

역사를 검증하다 - 섬서고고박물관

당나라 여재상 상관완아의 묘지명

  

섬서고고박물관의 당나라 여재상 상관완아의 묘지명


2022년 4월 28일 시안 장안구에 섬서고고박물관(陕西考古博物馆)이 개관하였습니다. 개관 직후 코로나 오미크론 변종의 확산으로 사실상 폐관된 상태나 마찬가지였지만, 다행스럽게도 2022년 12월 8일부터 코로나 통제 정책이 변경되면서 다시 관람 가능해졌습니다. 이 박물관은 장안구 문원남로(文苑南路)와 종남대로(终南大道)의 교차지 동북편에 위치하는데, 도시 중심으로부터 거리가 있어 종루에서 택시를 타면 1시간 정도 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 지하철 2호선 위곡남(韦曲南)역에서 하차하여 738번 버스로 갈아타고 갈 수 있습니다.      


섬서성고고학연구원(陕西省考古研究院)은 직접 소장 중인 유물 20만 점과 다른 기관들의 소장품으로 이 박물관을 꾸렸는데,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유물들은 모두 섬서성 내 무덤 및 그 밖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저는 이 박물관에서 묘지명(墓志铭) 즉 고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새겨 무덤에 묻어 놓는 돌을 특히 주목하였습니다. 당나라 여재상 상관완아(上官婉兒, 664-710)의 묘지명과 당나라 안진경(颜真卿, 709-785)이 글씨를 새겨 유명해진 나완순(罗婉顺)의 묘지명(墓志铭)을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안에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인물들의 묘지명과 마주치게 되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묘지명은 역시 상관완아의 것입니다. 우선 상관완아라는 인물 자체가 매력적이고, 그의 묘지명도 깔끔하고 정갈합니다.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공들인 묘지명입니다. 그녀의 기구한 운명과 완성도 높은 묘지명이 만들어내는 부조화는 제 마음 속에서 묘한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상관완아는 영화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狄仁杰之通天帝国)” 중 배우 리빙빙(李冰冰)이 맡은 상관정아(上官静儿)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녀의 운명은 기구했습니다. 영화에서 상관정아는 적인걸, 측천무후와 함께 3각 관계에 있는 것처럼 묘하게 그려지는데, 영화 속 그녀는 적인걸과 측천무후 모두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역사 속의 그녀는 측천무후가 축출된 이후에도 여전히 황제에게 중용되었습니다. 정변 당시 훗날 당현종으로 즉위하는 임치왕 이융기의 편에 섰지만, 그 와중에 그에게 배신당해 살해되고 맙니다. 어떤 사정 때문에 이융기가 그녀를 용납하지 못하고 참수를 명했을까요? 자세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상상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태평공주는 상관완아의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공주의 안타까운 마음만큼 완성도가 있는 묘지명이 만들어졌습니다. 묘지명에 따르면 장례 당시 상관완아의 직첩은 회복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2013년 그녀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그녀의 무덤에서 동시대에 이루어진 대규모 훼손이 발견되었고, 학자들은 그것이 국가에 의한 공식적인 훼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상관완아의 무덤은 당현종 이융기에 의해 파헤쳐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관참시와 같은 의미였다고 보면 이융기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녀를 미워했던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태평공주의 등쌀에 그녀의 명예를 일시적으로 회복시켜 주긴 했으나, 결국은 그녀의 재능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요?      


상관완아의 묘지명은 섬서역사박물관에서 그 탁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섬서고고박물관에서는 그 실물을 직관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 여재상 상관완아의 묘지명

묘지명의 역사 사료로서의 중요성


묘지명(墓志铭)의 “지(志)”는 이름, 출생지, 직업, 관직, 업적 등 고인의 일생을 서술한 본문을 말하며, “명(銘)”은 본문 뒤에 부록으로 덧붙이는 추모 시 또는 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명(銘)의 유무에 따라 묘지 또는 묘지명으로 용어를 사용하면 될 것이지만, 묘지(墓志)는 무덤 자리를 뜻하는 묘지(墓地)와 혼동되기 쉬우므로, 이 글에서는 명(銘)의 유무에 상관없이 묘지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당나라 여재상 상관완아의 묘지명


중국의 묘지명은 한나라 무렵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지만, 채용되는 빈도, 발굴되는 빈도, 예술적 성취 등 여러 측면에서 볼 때, 그 전성기는 남북조·수·당의 약 500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25년에 조성된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명도 남조 양나라(梁, 502-557)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묘지명은 역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입니다. 우선 땅속에 묻기 때문에 외력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한 원형 그대로 발견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최근에 와서 발굴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종래의 불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고인의 사망 직후 제작을 시작하므로 묘지명에 기재된 사망 연도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부친의 업적을 찬양하려다 보니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기도 하지만, 묘지명은 땅에 묻어버리는 것이라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므로 사실에 가까운 기재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당나라 시기의 묘지명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신라, 백제 및 발해와 교류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의 관직에 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우리 조상들의 묘지명들이 꽤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묘지명을 연구함으로써 당나라에서 살았던 그들의 삶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우리 역사에 대한 소중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시대 및 남북국 시대의 사료 부족을 생각해보면 그 중요성은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당나라식 묘지명을 남긴 우리 조상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민족 반역자들입니다. 평양성의 문을 열어 나라의 운명을 적에게 넘기고 벼슬을 하사받은 고요묘(高饒苗), 투항 후 전선으로 나아가 해골이 산을 이루도록 전공을 올렸다는 고족유(高足酉), 형제간 권력 싸움에 몰두하여 난공불락의 성들을 적에게 바쳐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연남생(淵男生), 연남산(淵男産), 대군을 맞아 전열을 가다듬던 왕을 배신하여 그를 적장에게 넘긴 웅진방령 예식진(禰寔進)과 그의 형 예군(禰軍), 망국의 운명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적국의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린 백제 태자 부여융(扶餘隆), 임존성을 근거지로 하여 당나라에 맞서 싸웠으나 투항 후에는 오히려 부흥군을 타격하여 막심한 피해를 준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그들입니다.  

   

서부 대개발, 일대일로 사업의 영향으로 최근 다양한 인물들의 묘지명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시안시의 주거지역 재개발 및 지하철 건설이 2023년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으므로 당분간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인들의 묘지명이 계속 발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나라 묘지명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이것입니다. 또한 일본인들의 묘지명에 대해서도 계속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과 우리는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북대학 박물관의 일본인 세이 신세이의 묘지명


세이 신세이(井真成, 정진성)는 733년 제10차 견당사(遣唐使)로 파견된 관원으로서 장안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병을 얻어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는 인물입니다(일본의 주류적 견해는 그가 717년 제9차 견당사로 파견된 유학생으로서, 공부를 모두 마치고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중 734년 사망하였다고 봅니다. 서북대학박물관의 안내문에도 그가 제9차 견당사의 일원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2004년 4월 서북대학 박물관(西北大学博物馆)은 당나라 시대 묘지명에 대한 매입 공고를 냈는데, 세이 신세이의 묘지명은 이때 입수되었습니다. 도굴된 무덤의 부장품들은 회수가 어려운 게 일반적이지만, 묘지명의 경우 가격을 높게 쳐주지 않아서인지 종종 이와 같이 양지로 흘러나오게 됩니. 한반도인의 몇몇 묘지명들도 같은 방식에 의해 회수되어 비림박물관, 시안박물원, 대당서시박물관 등에서 나누어 소장 중입니다. 이런 경우 고고학적 발굴이 불가하여 진위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는 경우가 많으나, 중국의 고고학계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세이 신세이 묘지명의 출토지를 지하철 1호선 반파역 인근으로 추정하면서 세이 신세이의 묘지명을 진본으로 판단해주었습니다. 여러모로 그 과정이 석연치 않습니다.    

 

어쨌든 2004년 세이 신세이의 묘지명이 발견되었을 때, 일본에서는 말 그대로 엄청난 센세이션이 일었습니다. 이 묘지명은 내용도 짧고 훼손이 심해서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도 여럿 지만, 어도 그가 734년 사망하였고, 그의 출신국이 일본(日本)이라는 점은 확실히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701년 다이호 율령(大寶律令)에 따라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변경했다는 것이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만, 그 정확한 시점과 관련해서 종래 논란이 있었습니다. 복잡한 쟁점을 모두 살펴보긴 어렵지만 한 가지만 살펴보면 712년에 완성되었다는 국가 편찬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 일본이라는 국호가 전혀 등장하지 않으므로 국호 변경의 시점이 712년 이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이 신세이(井真成, 정진성)의 묘지명이 입수됨으로써 적어도 734년의 국호가 일본이었다는 점이 금석학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시안 박물원의 백제인 예군의 묘지명


제가 2020년 시안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먼저 관람하고 싶었던 유물은 당연히도 병마용이었지만, 그 다음으로 직관을 원했던 것은 백제 사람 예군(禰軍, 613-678)의 묘지명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동생 예식진(禰寔進)의 묘지명은 탁본만 남아있고 실물은 행방불명이니, 그의 형의 묘지명이라도 직관하자는 심산이었습니다(예식진의 묘지명은 낙양이공학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소문 있음).


예군의 묘지명이 섬서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수당제국의 섹션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헤맸고, 관리인의 의심을 샀습니다. 하지만 그분 덕분에 저는 예군의 묘지명이 시안박물원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떤 관계자로부터, 앞으로도 예군 묘지명의 상설 전시는 어렵다는 점, 상설 전시가 어려운 이유는 시안박물원의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이라는 점, 과거 한 차례 그랬던 것처럼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 특별전시는 할 수 있다는 점, 그러나 특별전시를 위해서는 이 전시가 민감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 등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군의 묘지명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660년 천자의 군대가 본국을 토벌한 날에 기미를 보고 장차 닥칠 변화를 알아차리고 군사를 일으켜 귀순할 바를 알았다. … 이때 일본(日本)의 나머지 백성들이 해 뜨는 동쪽 땅()에 의지하여 죽음을 모면하고, 풍곡(風谷)의 나라 잃은 백성들이 반도(盤桃)에 기대어 견고하게 막고 저항하였다. … 천여 척의 배가 파도를 가로질러 원사(原蛇)를 구원하려 나쁜 기운을 마음대로 뿜어냈다. … 공은 황제의 사신으로 … 하루 저녁도 끝나지 않은 사이에 바다를 건넜다. 마침내 능히 황제의 위엄을 천년의 복록(福祿)에 비유해 설파하니, 외람되게 황제를 칭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신하를 칭하였다. … [권덕영 번역]

    

2011년 예군의 묘지명 탁본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일본 학계는 예군의 묘지명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678년 사망한 예군의 묘지명에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면, 국호 변경 시점도 서기 678년으로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예군 묘지명의 “일본”이라는 글자가 지칭하는 대상은 왜나라가 아니라 백제를 지칭한 것이라는 유력한 견해가 나오면서(東野治之), 예군 묘지명에 대한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습니다.

     

다소 복잡한 이야기이므로 아래의 서너 단락은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혹자는 이 묘지명의 “일본”이 적어도 백제를 칭할 리는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위의 일본(태양의 근원), 풍곡(바람 계곡) 및 원사(독사)는 백제를 지칭하는 것이며, 부상(동해의 신비한 나무) 및 반도(동해 선경의 복숭아 나무)는 왜나라를 지칭한다고 봅니다.  

    

의자왕의 5남 부여풍(扶餘豐)의 요청에 따라 왜나라가 지원군을 파병한 시점은 663년이며(삼국사기), 예군이 당나라 황제의 사신으로서 왜왕을 방문한 시점은 665년이므로(일본서기), 일본, 풍곡, 부상, 반도라는 위 명칭들이 등장하는 해당 문장은 660년에서 663년 사이의 정세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당시 패망한 나라는 백제뿐이므로 결국 패망한 나라로 묘사되고 있는 일본과 풍곡은 백제를 지칭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군의 묘지명만을 가지고 백제의 멸망 후 백제의 유민들이 왜나라로 넘어가서 정권을 접수하고 백제를 계승하기 위해 그 지도자의 명칭을 일본천황으로 정하였다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다고 봅니다. 그와 동시에 예군의 묘지명에 나오는 “일본”이 절대 백제일 리가 없다는 묘한 주장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예군 묘지명의 “일본”은 백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제 무령왕릉의 묘지명 


한반도에서 발견된 묘지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누구의 것일까요? 그건 바로 백제의 제25대왕 무령왕 부여사마(扶餘斯麻)의 묘지명입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충청남도 공주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과 유물의 상당수가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고 추측되는데, 다행스럽게도 무령왕릉은 그때 도굴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봉분 규모에 큰 관심이 없었던 백제의 풍습 등 여러 우연이 겹쳐 일제강점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천운이었습니다.    

  

당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임금이 아니었음에도 무령왕의 묘실에서 중요한 유물들이 줄줄이 나와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중요한 유물이 어찌나 많았는지 수저 세트를 비롯하여, 용무늬 고리 자루 큰 칼(용문 환두대도), 받침 있는 은잔(동탁 은잔) 등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우리 고대사 연구에 있어 무령왕릉이 차지하는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다만 발굴 과정은 전문적이지 못했습니다. 발굴팀원의 회고, 당시 발굴 보고서, 신문 기사 등에 따르면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고, 7일 오전 무덤 입구의 폐쇄석을 제거하기 시작하였고, 8일 밤 10시경 기자들이 먼저 사진을 찍은 직후, 발굴팀이 들어가 유물들을 부대 자루에 쓸어 담기 시작하여, 다음 날 오전 9시에 5,232점이나 되는 유물을 모두 수습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물의 수습에 걸린 시간이 불과 11시간 남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르다 보니 발굴된 유물들이 각각 어느 위치에 어떤 모습으로 부장되어 있었는지, 어느 유물과 어느 유물이 짝을 이루었던 것인지 등등은 지금도 알 수 없는 게 많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도굴꾼도 무덤 하나를 발굴하는 데 10일은 걸렸다는데, 우리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느니 도굴을 우려하여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느니 하는데,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들의 작업이었다고 하기에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어쨌든 무령왕릉에서 주목되는 점의 하나는 지상에 묘비(墓碑)를 세우지 않고 지하 석실 안에 묘지명을 묻었다는 점입니다. 석실에 묘지명을 매장하였던 목적은 땅의 신에게 고인이 누구인지 보고하는 동시에 땅의 신으로부터 대가를 치르고 부지를 매수하였단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묘지명은 애당초 후손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묘지명 덕분에 우리는 이 무덤을 송산리 7호분이 아닌 무령왕릉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제 무령왕의 묘지명

벽돌 묘실 자체 및 금귀걸이 등 부장품들은 매우 화려하면서도 아름답지만, 사실 이 묘지명만 보면 글씨체가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을 성취하였다거나, 지석을 가공한 기교가 당시 최고의 기술적 특징을 보여준다거나 그렇게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저 담백한 보고서 같은 것인데도 그의 묘지명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마치 1500년 전 세상을 떠난 백제 사람 부여사마를 직접 마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입니다. 굳이 비유한다면 아브라함의 무덤 앞에 우연히 서게 된 유대인의 심정 같은 것이랄까요. 국보 제163호로 지정된 이 묘지명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우리 후손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무령왕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습니다.     


섬서고고박물관 근처


섬서고고박물관을 나오면서, 근처의 향적사(香积寺)을 들려도 좋습니다.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같이 관람하면 일석이조랄까요. 향적사는 정토종(净土宗) 총본산으로 당나라 시인 왕유(王维,-761)의 “과향적사(过香积寺)”의 배경이 되는 사찰입니다. 제 딸의 학교 숙제라서 같이 외워주다가 이 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섬서고고박물관에서 서쪽으로 8km 더 가면, 삼성반도체 공장도 나옵니다. 섬서고고박물관, 향적사, 삼성반도체를 지나며 흐르는 하천은 장안8수 중 하나인 휼하(潏河)입니다. 휼하 생태공원도 산책하기 참 좋습니다. 한번 방문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향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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