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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비 May 26. 2020

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집단 광기 : 홀로코스트

출처 : 픽사베이

 홀로코스트(Holocaust)는 히틀러가 이끈 독일 나치당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비롯한 슬라브인,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등 1,10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을 지칭한다. 학살당한 1,100만 명 가운데 유대인은 600만 명, 비유대인은 500만 명 정도 된다. 1,100만 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 4만여 개의 집단 시설에 수용되어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결국 노동력이 부족한 여자와 아이, 노인, 병자를 시작으로 노동력이 떨어지거나 필요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살해당했다.


"반제 회의의 분위기는 별로 극적이지 않았고, 유대인 대학살의 비극은 이미 오래전부터 현실이었다." - p.17
"만일 유럽 안팎의 국제 유대인 금융가들이 민족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전쟁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유대인의 승리"로 끝나기보다는 유대인 인종의 "절멸"로 끝날 것이라고 선포했다. - p.72
1939년 1월 제국 의회에서


 1942년 1월 20일, 하이드리히 주재 하에 진행된 반제 회의에서 본격적으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 논의되었다. 반제 회의 이전에도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1935년에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였고, 유대인은 해외나 집단 수용소로 이주당했다. 반제 회의 이전에도 유대인 학살을 위한 단계는 진행 중이었다. 반제 회의는 그동안 선언하지 못한 유대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에 불과하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감소(출처 : 픽사베이)


"시체들은 겹겹이 층을 이루었다. 그렇게 한 유대인이 그곳에 눕혀지면 보안 경찰 사수들이 자동 권총을 가지고 와서 그곳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목덜미에 대고 총을 쐈다. 그 구덩이에 온 유대인들은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 경악했고, 그들은 완전히 살 의욕을 잃었다." - p.90 
총살은 대단히 성가시고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격수들의 신경을 너무나 혹사시켰기 때문에, 담당자들은 곧 한층 더 손쉬운 살육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살인자들을 위한 한층 더 손쉬운 방법 말이다. 그래서 1941년 12월 반제 회의가 있기 직전, "가스차"가 투입되었다. 이것을 이용하면 짧은 시동만으로도 60명의 인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었다. - p.23


 집단적인 학살은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정당화될 수 없다. 심지어 그 대상이 어린아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1,100만 명 중 유대인은 600만 명이었고, 600만 명 중 어린아이는 100만 명이었다. 100만 명의 어린아이는 노동력이 부족하며 유대인의 절멸을 위해서 살해당했다. 학살은 집단적이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포로가 직접 구덩이를 팠고 총에 맞은 시체를 덮었다. 총살은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며 가스실에 가스를 투입하였다. 가스실에서 살해당한 시체를 처리하는 일도 물론 포로 몫이었다.

폴란드 아유슈비츠 수감소(출처 : 픽사베이)

 반유대주의는 독일 나치당이 집권하기 전부터 유럽 전역에 만연하였다. 유대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베타성을 갖고 있다. 또한 공동체 문화가 매우 강하여 유대교 이외의 다른 공동체와의 동화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독일 나치당이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려고 할 때 여러 국가가 독일에게 자신의 나라에서도 유대인을 추방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물론 독일 나치당이 유대인을 학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유대인 학살을 공식적으로 결의된 해는 1942년이다.)


 베타성과 다른 공동체와 동화를 거부한 유대인도 반유대주의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베타성과 동화를 거부하는 유대인도 국민이므로 추방하거나 탄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생각과 종교을 갖고 있는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는 추방과 탄압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정부는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의 국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아무리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도 학살은 허용될 수 없다. 전쟁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서로 죽일 수 밖에 없지만, 학살은 군인이 아닌(심지어 투항한 군인은 사살할 수 없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다. 모든 민간인은 전쟁의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다.


독일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출처 : 픽사베이)


우선은 흔적을 화인하는 데 쓰이고, 다음으로는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연구들과 사료들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범죄의 원인과 목표를 설명하는 과제는 여전히 역사가들에게 남겨져 있다. 홀로코스트는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의 논리적인, 따라서 선험적으로 추구된 결과였는가? 아니면 인구 이동을 전제하고 특정한 주민들의 절멸을 전략의 일부로 간주한 합리적 계산에 따른 권력 장치의 일부였는가? 유대인 학살은 처음부터 히틀러의 의도였는가? 아니면 나치 통치의 급진화의 결과였는가? 아니면 단순히 여러 가능성들의 결과였는가? 홀로코스트의 사실들에 대한 의심은 결코 있을 수 없고, 인류의 도덕과 이성을 위해 진상 규명을 위한 모색은 계속될 것이다. - p.160

 저자인 볼프강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면서 아직 남은 연구 과제를 위와 같이 적었다. 위와 같은 연구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학살을 당한 피해자 중 500만 명에 대한 연구와 진상 규명이 더욱 중요하다. 지금까지 홀로코스트 연구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독일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유대인 추모공원'이라고 불린다.) 유대인이 피해자 1,100만 명 중 600만 명으로 숫자가 가장 많고, 가장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유대인 이외의 피해자가 유대인보다 국제 사회에서 힘이 약해 발언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는 유대인만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다음 홀로코스트 관련 연구가 나온다면 비유대인과 관련된 내용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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