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여행자가 여행안내서를 선택한다. 그러나 한 번 선택하면, 그 한 권의 여행안내서가 여행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여행지를 어디로 정하던 우리는 여행안내서를 볼 수밖에 없다. 그 플랫폼이 지류이든 인터넷이 든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곳까지 가야 할 교통 정보를 얻어야 하고 그곳에서 먹고 자야 할 정보가 필요하다. 날씨 정보를 얻어서 어떤 옷을 준비해야 하는지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한 여행이 있다.
나는 여행안내'서(書)'를 선호한다. 여행의 시작점을 인천공항으로 두는 게 아니라 광화문 교보문고로 두기 때문이다. 큰 서점에 가서 가고자 하는 여행지의 다양한 여행안내서를 둘러보며 내게 맞는 책을 고르는 행위가 여행의 시작이다. 다양한 안내서를 보며 점점 눈에 선해지는 그런 과정은 오직 여행을 준비할 때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설렘이다. 하지만 시험공부할 때에는 미지의 시험 범위가 점점 눈에 선해지더라도 재미는 없었다.
수많은 여행안내서 중 얇으면서 필요한 정보가 꽉 차있는 여행안내서가 필요한 때도 있었고 무게와 상관없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여행안내서를 찾을 때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자의적인 선택이지만 카운터에서 구매 후 책을 펴서 여행 계획을 짜는 순간부터는 주객이 전도된다.
이제 책과 종이, 팬을 책상에 두고 여행안내서에 담긴 정보를 토대로 여행 계획을 꾸린다. 금요일에 할인 혜택을 준다는 박물관이 정보를 보고 나는 금요일에 박물관에 가도록 계획을 짠다. 뉴욕의 모마가 그러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부터는 관객들의 기부금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1달러만 내고도 입장이 가능하다. 혹은 공원 근처의 맛집 소개를 보며 그날 점심은 그곳에서 먹기로 한다. 도쿄 우에노 공원 근처에 있는 돈가스 가게에 대한 정보를 보고 공원 관람을 마치고 그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돈가스를 맛보았다. 그곳은 도쿄 사람들의 맛집이었는지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식탁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효율적인 여행이 완성된다. 여행안내서를 보고 계획을 짜면 크게 실패하지 않는다. 누군가 대신 비용을 지불하고 검증한 곳들만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행은 여행안내서가 소개한 관광지, 맛집을 통해 완성이 된다.
하지만 출간 연도를 잘 보아야 한다. 뉴욕같이 큰 도시에서는 식당 폐업률이 높은지 책을 따라 간 식당은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가장 최근에 발행된 책일 수 록 실패 확률이 낮다. 하지만 실패한 곳 근처에서 근사한 로컬 브런치 가게를 들어가서 뉴욕의 따스한 분위기를 맛보았다. 이 이후로는 여행안내서를 참고만 하되 걷다가 내 마음에 드는 곳을 지도에 별표 하거나 불쑥 들어가거나 해서 나만의 여행안내서를 만들었다.
2013년 일본 첫 여행을 계획하던 때 여행안내서는 그렇게 종류가 많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블로그에 올린 글만 보면서 가고 싶은 관광지를 정하고 지도를 보며 노선을 짰다. 이때만 해도 구글 지도 사용이 어려워 친구가 많이 도와주었다. 친구뿐 아니라 일본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었는데 오사카 패스라고 오사카의 관광지를 저렴한 가격에 입장할 수 있는 패스권을 구매했는데 목욕탕 입장이 무료였다. 이곳이 역에서 꽤 거리가 있는 편이라 가다가 멈춰서 친구와 지도를 확인했다.
"도와드릴까요?" 한국어가 들려왔다. 동방신기를 좋아해서 한국어를 배웠다는 일본 사람은 우릴 지켜보다가 한국인 관광객임을 알게 되고 길 찾는 것을 도와준 것이다. 덕분에 목욕탕까지는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두 번째 도쿄 여행은 졸업 여행 삼아 친구를 보러 도쿄에 갔었다. 중국, 필리핀으로 내 여행에 대해 제법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에 여행안내서를 보지 않고 최대한 정보를 배제한 채로 떠났다. 며칠은 친구와 같이 지낼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었고 뼈아픈 실패를 맛봤다.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는데, 마음이 불안한 상태로 도피 삼아 여행을 가면 여행지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내가 되는 것이다. 백수가 된다는 불안감이 너무 커서 도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쓰는 돈들에 대해 죄의식을 갖게 된다. 최대한 안 쓰고 저렴한 것을 찾다 보면 여행의 질은 자연히 낮아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숙소에서 본 여행안내서 한 권으로 맛있는 돈가스집에 대한 정보를 얻은 여행이 바로 이 여행이었다.
원래 지도를 잘 보지 못해 마음 내키는 대로 발을 뻗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이 온전히 내 여행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잘못들 어선 길에서 전차가 지나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과 다시 정막을 찾은 작은 동네의 장면을 보게 되면 잘못된 길은 그만큼의 수확을 위한 행군이었다고 생각한다. 뉴욕에서도 그러했다. 맨해튼 내 관광객들이 관광 장소 이동을 위하여 걸을 때는 5번가는 피할 수 없다. 그만큼 중심이기도 하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5번가가 살짝 지루해져 그 옆길인 6번가로 잠깐 새어 갔다.
그렇게 마주한 6번가는 TV 속 뉴욕과는 사뭇 달랐지만 뉴욕 사람의 사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졌다. 그리고 우연찮게 마주하는 각종 관광 명소들이 반갑기도 하다.
이렇듯 여행책에서 조금만 벗어나가 나의 길을 찾아가며 완성하는 여행은 기억에 더 오래 각인이 되어 그렇게 여행자들은 각자의 여행책을 지니고 돌아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