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스 Sep 16. 2023

피닉스, 빛으로 가는 열차

영화 리뷰 < 피닉스, 2021 >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인 넬리는 행복했던 일상을 되찾고 싶다. 총상으로 얼굴 전체를 뜯어고치는 ‘재건 수술’을 할 때도 그녀는 예전과 똑같아지길 바란다. 그때의 얼굴로 돌아가야만 회복이 가능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성형수술은 일종의 심리치료인 셈이다.


얼굴과 가족을 모두 잃은 넬리는 베를린에서 그의 남편 조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넬리에게 넬리 행세를 해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제안까지 한다. 남편과의 좋았던 관계 하나만이라도 되찾고 싶은 넬리는 그의 무례한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피닉스>는 피해자 넬리가 과거를 받아들이고 상처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빛과 어둠이라는 시각적 소재를 활용해 강조한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넬리의 과거를 어둡게 묘사한다. 영화는 어두운 차 안에서 레네가 넬리를 태운 채 운전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캄캄한 밤,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은 넬리의 목적지는 밝은 햇살이 비치는 성형외과다. 차를 타고 암울한 과거를 지나쳐 온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수술 후 어두운 병원 복도를 지나 조니의 사진을 발견하는 넬리의 모습이다. 조니가 근무하는 클럽 ‘피닉스’로 향하는 길목에도 짙은 어둠이 깔려있다. 조니와 재회해 일상을 되찾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배신했을지도 모르는 남편을 잊어야 한다는 넬리의 갈등은 어둡고 칙칙한 반지하 집과 밝고 쾌적한 아파트 사이를 오가며 이어진다.


영화 속 어둠이 넬리의 과거를 의미한다면 빛은 미래다. 조니와의 관계에 심취한 넬리가 팔레스타인으로 떠나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레네는 스탠드 조명을 켜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앞서 조명을 켜지 말아달라는 넬리의 부탁을 수용한 것과 달리 이 장면에서 레네의 행동은 단호하다. 넬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굳이 보여주겠다는 듯. 조니를 찾아간 클럽 피닉스에서는 ‘불을 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게’라는 가사의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이렇듯 현실을 보여주는 빛이 넬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지만 넬리는 이를 애써 외면한다.


영화는 어둠에서 출발해 빛으로 향해간다. 믿었던 남편이 자신을 배신한 사실을 받아들인 넬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노래를 마친 뒤 환한 빛을 향해 걸어 나간다. 현실을 인정하고 미래를 새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지다. 평소 흰 셔츠를 주로 입던 조니는 이 장면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다. 눈앞에 서 있는 넬리가 진짜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조니는 과거의 늪으로 빠진다. 어두운 계열의 옷을 즐겨 입던 넬리가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테다.


<피닉스>는 조니가 진짜 넬리를 알아보는지에서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해 넬리가 조니의 본모습을 알아보는 것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명암의 변화로 구분된다. “내 사랑, 이미 늦었어”라며 노래하는 넬리의 모습은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넬리가 부르는 노래는 조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레네에게 바치는 노래기 때문이다. 넬리가 탑승한 기차는 어둠을 헤치고 달려 밝은 빛에 도착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