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전화

<생각 꾸러미>

by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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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늘 힘들다. 그 진실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를 때는 더욱 그렇다.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는 요즘 나에게 전화를 자주 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무뚝뚝한 아들 녀석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던 그는, 요즘 들어 별일은 없냐며 사소한 안부를 묻는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어색한 나는 "그냥 잘 지내요"라는 말로 몇 마디를 나누다 "건강 조심하세요" 하고 전화를 끊곤 한다. 통화 시간은 길어야 30초 남짓. 그마저도 내 말은 80% 이상이 대답이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다. 나 역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성경 구절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무척 근엄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뱃사람으로 살아온 그는 자식들에게 항상 고압적이었다. 형과 나를 이름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고, 주로 '임마', '점마', '야' 같은 호칭이 따라붙었다. 조금 흥분하거나 화가 나면 "새끼" 같은 비속어도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어릴 적 우리 형제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불편해하며 "애들한테 임마 점마 하는 애비가 어딨노"라고 다그치곤 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자신이 뱃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고쳐보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건 거의 없었다. 늦둥이 여동생이 태어나고, 형과 내가 청소년이 된 뒤에야 아버지는 조금 태도를 바꿨다. 머리 큰 자식들에게까지 똑같이 대할 수는 없다는 게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짐작컨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내가 겪은 것보다 더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형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며 자란 듯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배를 탔고, 바다 한가운데서 번 돈 대부분을 부모님과 가족에게 보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큰아버지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한량’처럼 살아왔다는 사실을, 나는 성인이 된 뒤에야 알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배를 탄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선장이 됐다. 거친 뱃사람들을 직접 통솔해야 하는 위치였다. 생사를 오가는 바다 위에서 살아온 그에게 욕설과 욱하는 성질은 어쩌면 직업병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식들을 엄하게 길렀다. 몇 개월에 한 번 집에 돌아오는 아버지는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다음 출항을 기다리는 1~2주 남짓한 시간 동안, 그의 유일한 취미는 자식들의 일기를 읽는 일이었다. 다시 몇 달간 자식들을 ‘아비 없는 상태’로 두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는 늘 엄한 아버지 역할을 자처했다. 그것이 그의 성격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떠맡은 역할이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분명한 건, 우리 형제에게 아버지는 항상 무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체벌이 일상적이었고, 화를 내며 드는 '회초리'는 그 무엇보다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내 성격도 만들어졌다. 혼나는 일을 극도로 무서워했던 나는 변수를 없애려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어떤 일을 하든 사고를 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늘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았고, 혼날 수 있는 상황이 두려워 거짓말로 버틴 적도 많았다. 특히 큰 소리와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서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부모님이 언성을 높이며 다툴 때면 방 문을 꼭 닫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대개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배에서 내려온 아버지는 곧바로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바다를 호령하던 그의 기술은 육지에서는 별 쓸모가 없어 보였다. 가구 공장을 비롯해 몸을 쓰는 일을 전전하다, 결국 울산에 자리를 잡았다. 퀘퀘한 먼지가 가득한 공간에서 배를 만드는 사람이 됐다. 배를 타던 사람에서 배를 만드는 사람으로 바뀐 셈이었다.


육지에 올라온 뒤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자식들에게 칭찬을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고, 아버지는 근엄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는 듯했다. 자식들을 예뻐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일은 엄마의 몫이라는 게 그의 생각처럼 보였다. 자식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아버지를 화나게 할 일이 줄어들자, 그의 톤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에 반하는 선택을 하려면 여전히 큰 각오가 필요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나는 4년제 대학에 가고 싶었다. 기술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에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2년제 대학에 진학해 빨리 취업하는 것이 낫다는 그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책이 좋았고, 글이 좋았다. 아버지의 삶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라인더나 용접기를 손에 쥐고 싶지는 않았다. 학원도 제대로 한 번 다녀보지 않은 나였지만,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에 나는 아버지를 설득하기로 했다.


설득의 과정은 길고 험난했다. 아버지는 돈을 무기로 나를 압박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로,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했다. 몇 차례 언쟁 끝에 아버지는 나에게 '4년제 대학에 진학하면 대학 등록금부터 생활비까지 너 혼자 벌어먹으라'며 으름장을 놨다. 현실적인 부담보다도 그런 태도가 더 서러웠다. 친구들이 학원에 다니고, 비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입시설명회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혼자 마음속으로 울었다.


결국 아버지는 내 고집을 완전히 꺾지 못했다. 대신 대학에 가서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진학을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내 태도가 약간은 미운지 수능 날 집을 나서는 나에게 “너무 잘 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런 그가 한 편으로는 이해되면서도, 그 말을 마음 속에서 잊지 않았다.


얼마 전, 아버지는 나와 저녁을 먹으며 옛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내가 담임 선생님에게 ‘반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학생’으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내게 "그때 독서기록장을 반에서 가장 많이 썼다길래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벌써 10여 년이 지났으니, 나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이렇게 밥벌이를 잘 하고 있어 자랑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얼마 전에는 아픈 무릎을 이끌고, 아들이 사는 서울에 한번 가보겠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근엄하고 무뚝뚝하던 아버지의 여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의 본성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시간이 흐르며 그렇게 변해가는 건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식들과의 연결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를 보며 짠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진작 그러지 그랬냐는 서운함도 함께 올라온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살가운 가족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아버지의 태도에 굳게 닫혀버린 내 마음을 이제 와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늘 힘들다. 그 진실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를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아버지가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버겁다. 더 이상 근엄한 아버지의 역할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식들의 온기와 연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렇다. 그러면서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보면, 나 역시 꽤 나이를 먹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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