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석 및 리뷰 < 토이스토리 4 , 2019 >
어린 시절 보았던 토이스토리
1편은 지금도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당시 나는 버즈 라이트 이어를
매우 멋있어했고,
버즈를 미워하는 우디를 싫어했다.
영화 속에서 엄청난 악당으로 등장했던
'시드'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머리가 다 빠진 아기의 얼굴을 하고,
거미 모양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섬뜩한 장난감들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이렇게 내 어린 시절에 영향을 준
토이스토리 1은 무려 1995년 작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2019년에 되었지만
토이스토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영화로 자리 잡고 있다.
세 편으로 시리즈가 끝이 날 것 같았던
토이스토리 4의 개봉은 나에게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개봉하자마자 관람했던
토이스토리 4를 '우디'의 눈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앤디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우디의 삶과 정체성 측면에서 말이다.
장난감들의 이야기라는 배경을 지닌
토이스토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난감은 인간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에 따라 토이스토리의 전체적인
스토리 진행은 인간의 성장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주인공 '우디'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성장과정은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먼저 토이스토리 1에서 우디에게
새로운 장난감인 '버즈'가 등장한다.
앤디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우디에게 라이벌 버즈가 등장하자,
우디는 그를 질투하고
그를 밀어내려고 한다.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갈등 구조다
이런 우디의 행동은 인간 어린아이의
성향과 매우 닮았다고 볼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의 사랑을 뺏길까 봐
새로 태어난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는
3-4세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2편으로 넘어오게 되면
우디는 한층 성장한다.
맹목적으로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배운다.
낡아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펭귄 인형이
창고세일에 팔리는 걸 구출하거나,
자신이 없으면 창고에 갇히는 신세인
'제시'를 위해 박물관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장면에서 우디가
한층 어른스러워졌음을 느낄 수 있다.
3편으로 넘어가 보자.
3편에 이르게 되면 우디는
일종의 '진로'를 선택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디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이제 앤디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보니'에게로 찾아간다.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나는 앤디처럼
우디도 집을 떠나기에 이른다.
앤디와 우디의 모습은
마치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형제처럼 비슷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3편까지의 스토리에서,
관객들은 아쉬운 점을 느낀다.
장난감들이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디는 스스로 앤디를 떠나
보니에게로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버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었던 차선책을
선택한 모습으로 비친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까지
수동적인 장난감의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토이스토리 3는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그들에게 '나의 장난감이 불쌍하다.'
정도의 메시지를 남긴 셈이기 때문이다.
반면 토이스토리 4의 우디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체성, 자아실현 측면에서다.
그동안 토이스토리의 장난감들은
수동적인 개체로 그려져 왔다.
그들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삶에서
행복감을 느꼈고,
주인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면
좌절했다.
그러나 토이스토리 4에서 장난감들은
보다 능동적인 개체로 변한다.
이제 그들은 사랑을 받는 존재라기보다
스스로 주인을 '보살펴주는 존재'라고 믿는다.
토이스토리 4가 전작들과 차이를 드러내는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다.
인간 역시 어린 시절에는 주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나이가 들수록 보살핌을
나누어주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점에서
보면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다.
토이스토리에서는 항상 능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장난감이 하나씩 등장한다.
1에서는 새로 등장한 버즈가 그랬고,
2에서는 제니가 그랬다.
그들은 장난감으로서 역할에 충실하기보다
본인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길 원했다.
안타깝게도 전작에서 그들은 대개
부정적으로 묘사됐다.
자신이 우주전사라고 생각했던 버즈는
우디의 설득으로, 장난감으로서의
인생에 적응해버렸으며,
제니 역시 박물관에 가고 싶다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앤디의 집에
돌아와 현실에 안주했다.
이렇듯 전작에서 장난감들은
대체로 장난감으로서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반면 토이스토리 4에서는
'보 핍'이라는 캐릭터로 인해
그들의 정체성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장난감들은 주인의 사랑에
얽매여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우디의 결정으로 인해
장난감들의 자아실현적 선택은
존중받게 되었다.
우디를 대표로 하는 장난감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정체성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해갔다.
대표적인 예가 '포키'라는 캐릭터다.
포키는 처음 탄생했을 때
스스로를 쓰레기 취급한다.
보니가 자신을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에도
그런 사랑이 필요 없다는 듯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보니의 사랑을 빼앗긴 우디는
포키가 계속 보니 곁에 있도록 도와준다.
과거의 우디였다면 포키를 없애려고
노력했을 텐데 말이다.
자신은 보니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보니를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비롯된 행동이었다.
사랑을 나누어주고,
친구를 배려하는 우디의
어른스러움 아래에서 장난감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첫 번째는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아이들의 사랑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일.
두 번째는 자신이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드러내는 일이다.
전작과는 다르게 이 두 가지 선택은
모두 존중받는다.
전자의 예로 마지막 장면에서 포키가
새로운 포크 장난감을 환영하는 모습이,
후자의 예로 자신을 불량품이라고 생각했던
'개비'가 한 아이를 위로해주는 일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우디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토이스토리의 제작진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바로 운명을 대하는 태도다.
전작에서 제작진이 계속
우리에게 문제를 던진 지점은
'버려진다'는 측면이다.
결국 장난감들은 버려지거나
망가지는 걸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내재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으로부터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버려지는 행위를 슬퍼한다.
그러나 이를 인간에 대입해보면
인간관계나, 죽음과도
충분히 유사한 점이 많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가장 명료한 진리다.
이러한 환경들에 맞서서 제작진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되묻는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포키처럼
자신을 비관하며 쓰레기통으로 갈 것인가.
또는 개비처럼 불량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하며 살 것인가.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정반대다.
그들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 캐나다'를 외치며 스턴트 액션을 하는
듀크 카붐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들은 자기도 남을 위로해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용기 있게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개비처럼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디는 보니를 떠난다.
과거 앤디를 떠나는 장면과는 다르게,
우디는 이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그의 주체성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다.
이제 우디는 일종의
'어른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결말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혹시 토이스토리의 시리즈가
하나 더 남아있다면,
이제 남겨진 내용은 하나다.
전작에서 이어져 온 계속 질문은
우디와 같은 장난감은 결국
망가지거나 버려지게 된다는 거다.
어린 장난감들은 이 점을 계속해서
걱정해왔다.
그러나 어른 장난감인 우디는
이런 걱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우디는 더 이상 남겨질 아이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만약 토이스토리 5가 나오게 된다면,
우디는 아이들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나누어주다가 최후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 선택은 수동적인 버려짐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자발적인
어른 장난감의 죽음으로
묘사될 것이다.
마치 임종을 앞둔 인간이 죽음을 준비하듯 거룩하게.
토이스토리 4는 전작의 철학적 아쉬움을
완전히 해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장난감에 삶을 불어넣고, 그 삶이
값지게 보이게끔 만들어주는 디즈니의
능력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아쉬운 부분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은 장난감 세계를
현실에서 너무 드러냈다는 점이다.
전작들에서도 장난감이
현실세계에 개입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며
최대한 '장난감 세계'가 노출이 안 되는
방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에는 장난감들이
현실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경우가 꽤 있다.
가령 내비게이션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던지,
자동차의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는다던지,
이렇듯 간접적인 형식이 아니라
장난감들의 직접적인 현실 개입은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현실에 개입했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사의 해학적 요소는
정말 놀랍다. 영화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유머 코드는 기분 좋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영화를 여러 번 봐도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오마주도 자연스러워서
경이롭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모처럼 재미있는 영화를 보아서
기분이 좋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