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석 및 리뷰 < 라이프 오브 파이 , 2012 >
이야기의 잠재력은 참 놀랍다.
좋은 이야기는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하나의 이야기가 몇 백 년을
이어내려오기도 하고,
바다 건너 다른 대륙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영화는 한 명의 청년이 조난당해
구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두 시간 동안 짜임새 있게 전개한다.
이야기가 얼마나 흡인력 있는지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영상미는 덤이다.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은 파이다.
'피신 몰리토 파텔'이 진짜 이름이지만
주인공은 자신을 파이라고 불렀다.
친구들로부터 파이라고 불리기 위해
칠판 5개 분량의 원주율표를
외워갈 정도인 것을 보면
보통 아이는 아님에 틀림없다.
파이의 특이한 성격은
성장기를 거치면서 잘 드러난다.
그는 3가지의 종교를
함께 믿는다.
그에게는 알라신, 비슈뉴, 예수님
모두가 같은 '신'이다.
파이의 가족은 동물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동물원을 매각하고
캐나다로 떠나기에 이른다.
그들은 캐나다로 떠나가는 도중에
조난을 당하는데,
안타깝게도 파이 혼자 살아남는다.
이후 파이가 구출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가
바로 라이프 오브 파이다.
이 영화의 리뷰를 보면 대부분
진실을 찾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파이가 과연 식인을 했는가.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와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 중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측면보다는
각각의 소재들이 상징하는 바를
분석하는 방향으로 글을 써보려 한다.
바로 인간과 신이라는 핵심적인
키워드를 이용해서다.
먼저 이 영화 속에서 파이는
이상한 인물로 그려진다.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파이는 세 가지 종교를 한 번에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형이나 아버지로부터
하나만 믿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러한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신을 하나만 믿어야 한다는 것은
누가 정했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면서다.
이렇듯 영화 곳곳에는
'인간이 만든 기준' 이
묻어나오는데 감독은
이 기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대표적인 게 호랑이의 이름인
'리차드 파커'다.
극 중 화자로 등장하는
캐나다인 소설가는 리차드 파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호랑이임을
생각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리차드 파커가
인간의 이름이기 때문일장다.
이러한 이름의 형식은
인간이 특정한 개체를 구분 짓는
방법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리차드 파커가 동물보다
인간의 이름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만든 틀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동물에게 이름을 짓는 것 역시
인간만이 하는 일이다.)
이와 유사하게 살펴볼 것은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인도'라는 지역이다.
당시 인도는 프랑스령 인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령 인도로 대표되는 식민지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종속시키고자 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파이와
대비되는 소재로 볼 수 있는 측면이다.
이러한 소유 개념은
'천주교 힌두교도'임을
자처하는 파이를 비판하는 배경이 된다.
자연의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한정짓고, 육지를 식민지라는
이름으로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파이의 존재와 대조를 이룬다.
영화 속 인간의 한계가 드러나는
장면은 또 있다.
바로 리차드 파커가 염소를
잡아먹는 장면이다.
리차드 파커와 공존을 추구했던
어린 시절의 파이는 먹이를 직접 주려다
아버지에게 들키고 만다.
아버지는 파이를 훈계하면서
호랑이가 염소를 잡아먹는
장면을 파이의 눈 앞에서 보여준다.
이 장면은 다양성과 공존을
추구하는 파이라는 캐릭터가
동물에게 야만을 강제로 부여하는
인간의 편협함에
가로막히게 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다양성을 상실해버린 파이는
이후 일상에 흥미를 잃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는다.
파이 자신이 현실에서
이방인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인간과 대조되는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뜻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존재를 드러낸다.
먼저 파이의 가족들을 삼킨 것은 바다다.
인간은 배라는 도구를 이용해
자연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자연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영화 속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평소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비로운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신은 사랑이 넘칠 것이다'
'신은 우리를 빛으로 인도할 것이다'
오히려 신에 대한 인간의
이런 생각들조차
인간이 만들어 낸
공상에 가까울지 모른다.
또한 신에 대한 편협한 시각은
인간의 한계로
지적되는 측면이 있다.
인간은 신의 존재를 믿는지 안 믿는지
두 가지로 밖에 구분 지을 수 없다.
신을 믿는다면, 어떤 신이냐에 따라
또 구분 짓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그러나 사실 신이 있다면
인간이 믿는지 안 믿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신은 없을 테니까.
영화 초반 '비슈누 신은
우주의 바다를 떠다니며 잠을 잔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신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임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파이가
폭풍을 즐길 때(자연을 무시할 때)
큰 시련을 겪었고,
삶을 포기했을 때(자연을 인정할 때)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감독은 우리에게
마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꼭 진리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의지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영화 속 등장하는
'입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은
우주는 나와 떨어져 있지 않다는 말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우주라는 게 특정한 개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도 마시고 있는
공기, 바람 등이
모두 우주라는 말이다.
이 우주는 우리 마음먹기에 따라
내 입속에 있을 수 있고,
모니터 옆에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카르마'와도 연결되는 이야기다.
중요한 건 무엇이 우주냐가 아니라
우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다.
의지와 믿음의 문제로 넘어왔다면
인생을 소유와 공존의 개념에서
다시 살펴볼 수도 있다.
파이는 영화 후반부에서 작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떤 것을 믿겠느냐고 말한다.
어차피 배가 침몰한 원인도 모르고,
모두가 다 죽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는
'배가 침몰한 이유'를
우리가 태어난 이유로
바꿔볼 수 있다.
어쩌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낮엔 희망을 주고
밤엔 절망을 주는 식인 섬'은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떨 때는 기쁨을,
어떨때는 슬픔을 겪는다는 점에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는
태어난 이유를 뒤로하고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프랑스령 인도라는 이름처럼
소유에 얽매여 서로
파괴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리차드 파커와 공존을
터득한 파이처럼 삶을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를,
조난당한 것과 같은 인생에서
함께 나누는 삶을 살 것인가.
뺏고 뺏기는 삶을 살 것인가.
작품 속에서는 '희망을
잃지말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P.S 영화 내용을 풀어내느라
영상미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렸는데,
영상은 내가 본 어느 영화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감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