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이어도 괜찮아

영화 리뷰 < 시 ( Poetry, 2010) >

by 스미스


어느 화창한 오후,

물가에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

강물은 잔잔히 흐르고,

새들은 정답게 지저귄다.


잠시 후 적막하고 고요한 강물을 타고

한 소녀의 시체가 떠내려온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 시 >는

꽤나 충격적인 도입부로 시작된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소녀의 죽음'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요 사건이다.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다.

영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전반은 시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관객들은 시를 읽는 것처럼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숨어있는

은유들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버닝'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 소설가였던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도 글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관객들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영화의 스토리는 주인공인

'미자'가 시를 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미자


주인공인 '미자'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외손자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간다.


그녀는 66세로 꽤 나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간병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한다.


자신의 딸은 경제적인 이유로 그녀에게

아들을 맡기고 부산으로 내려가

이따금씩 전화만 한다.


가족 전체가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멋쟁이'를 자처하며 옷을 화려하게 꾸미고

어린 시절 좋아했던 시를 배우기 위해

문화원에 등록한다.


이렇듯 비극에 가까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미자라는 캐릭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인생을 더욱

비극적이게 만드는 소식이 들려온다.


자신의 외손자가

한 여학생의 성폭행에 가담했고,

그 소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다.


그 소녀는 앞서 고요하고

적막한 강가에서 떠내려온

시신임을 관객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아름다움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다.


미자의 시 선생님이자,

실제 시인인 김용택 시인은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사과를 꺼내 보이며

문화원 학생들에게

사과를 본 적 있느냐고 묻는다.

이 물음에 사람들은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가 '보는 것'

우리가 보는 것은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가 말하는 본다라는 의미는

사과와 대화하고, 사과를 이해하기 위해

사과를 관찰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사과를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사과에 스민 햇볕을 상상해보는 노력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사과를 본다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여태껏 우리는

무엇인가를 제대로 본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아름다움'으로 돌아와서, 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용택 시인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다.


영화 초반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사과를 관찰하고, 시상을 찾기 위해

여행도 떠나보지만 시를 쓰지 못한다.

그녀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극


영화는 중후반을 향해가면서

점차 비극에 가까워진다.


손자가 저지른 범죄를 무마하기 위해

500만 원이라는 돈이 필요했던 미자는

자신이 간병하던 노인에게

'성'을 팔기로 결심한다.


성을 매개로 남에게 금전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비극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자는

비극을 받아들일수록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가장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자신의 외손자를 경찰에게 넘겼을 때다.


이 경찰은 시낭송 동호회에서 만났는데,

영화 초반 미자는 음담패설을 주로 하는

이 경찰을 못마땅해한다.

'시를 모독한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영역인데,

음담패설 따위를 내뱉는 그가

시의 아름다움을 해치고 있다고

미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녀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꼭 꽃처럼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 경찰은 서울에서 근무하다

내부 비리를 고발한 대가로

경기도로 좌천되어 살고 있다.


미자는 그가 추구했던 '아름다움'

깊이를 이해하고 그를 신뢰하게 된다.

아름다움이 비극의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손자를 경찰에 고소하고, 자신의 비극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비로소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이때 그녀가 입고 있는 의상은

평소 즐겨 입는 화려한 옷이 아니라

수수한 옷차림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이런 비극을

암시하는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붉은 꽃일수록 고통스럽다"

"살구는 스스로 제 몸을 땅에 던진다.

깨어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


이런 표현들은 미자의 삶이

꽃처럼 아름답게 점철되기보다는

비극적일 것임을 드러낸다.




아녜스


미자가 비극을 맞이하며 지은 시의 이름은

'아녜스의 노래'다


아녜스는 영화 속에서 자살한 소녀의

세례명으로 나온다.

왜 하필 아녜스라는 이름일까를

생각해보았는데, 아녜스라는 성녀의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기독교에서 아녜스는 '순결'을 의미한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는데,

하나님께 순결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정관의 아들이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녀가 이를 거절하자

집정관은 그녀를 나체로

매음굴에 보내버린다.


하나님이 그녀를 딱하게 여겨 천사를 보내

그녀를 보살펴주었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순결의 대명사인 아녜스의 이름을

통해 감독은 이 비극을 더욱 강조한다.


순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성폭행을 당해 극단적 선택에 이른 아녜스,

또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미자의 대조는 관객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아녜스를

보호해준 것처럼, 미자는 자신의 손자를

고발하기로 마음먹게 되고, 아녜스의

노래라는 추모시를 통해 미안함을 전한다.



삶, 그리고 시

치매라는 설정은 미자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재로 활용된다.


영화 초반, 단어를 가끔씩

깜빡깜빡하는 수준이었던

미자의 치매 증상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악화된다.


그녀는 피해자의 어머니를

설득하러 왔다는 자신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피해자의 어머니와

시시콜콜한 얘기만 주고받다가 떠난다.


이러한 증상은 그녀의 마음 변화를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나중에는 자신의 손자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도 까먹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긴 것이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비극을

온전히 맞이하려고 노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속에

시를 품고 산다. 가슴속 시를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시를 쓸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은 김용택 시인을 통해

이런 말을 관객들에게 전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문화원 수강생들은

아무도 시를 쓰지 못했다.


미자만 유일하게

시를 쓸 수 있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자가 그랬던 것처럼

삶을 순수한 것으로만 파악하고

순수함에 매달려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극도 시가 될 수 있음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게

더 어려운 거죠"


시 쓰기가 어렵다고 불만을 표하는

수강생들의 말에 김용택 시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본 적이 없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은 희극과 비극이

어우러져있지만, 우리는 대개

희극적인 측면만 우리의 삶으로

간주한다. 비극적인 면은

어쩔 수 없었다며, 합리화하기도 한다.


비극적인 삶은 최대한 감추고 싶은 게

우리의 솔직한 마음일 거다.


그러나 감독은 시는 그렇게

쓰일 수 없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인생을 '보는'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영화 내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미자의 딸이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이유는 딸에게

이러한 현실을 보게 하려는

미자의 마음이었다.


불행했던 자신의 삶과,

불완전했던 손자와의 관계를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딸에게 삶의 비극을 직시하라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있는 행동이다.


BGM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이 영화는 아녜스의 노래가

울려 퍼지며 끝이 난다.


노래가 울려 퍼지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아녜스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녀의 시선은 관객에게 꽤

큰 자극으로 다가온다.

죽은 아녜스는 마치 우리에게

삶을 제대로 볼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묻는 듯하다.


우리는 관성적으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비극을 그냥 덮으려고만 노력하지는 않나.


이창동 감독은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준다.


삶을 제대로 보는 연습을 해보자고,

살구가 다음 생을 위해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우리도 아름다움 너머의 아름다움을

찾으면 좋겠다고.


P.S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무마해주려는
그 부모들이나, 자신의 손자에게도
미자는 동일하게 비극을 내던진다.


삶을 미화하는 게 그들 미래에
도움이 되지않음을 미자의 행위를 통해
감독이 주고자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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