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석 및 리뷰 < 레이디 버드, 2018 >
나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싶다. 피아노에 한 가지 음만 존재할 수 없듯이
모든 인간은 다르기 때문에 제각기의 매력을 뽐내는 존재다.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다름'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인 것 같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하고, 적으로 규정짓는 분위기 탓이다.
소위 '잘난 사람들'만이 정답으로 간주되고, 모두가 잘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현실에서,
다름의 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영화 < 레이디 버드 >의 주인공 '크리스틴' 역시 자신을 부정하고,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소녀였다.
영화는 이러한 크리스틴이 자신을 되찾는 과정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준다.
모처럼 좋은 영화를 만났다. 하루 종일 우울했던 내 앞에 친한 친구가 나타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한마디로 크리스틴이 크리스틴이 되는 과정을 담아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영화를 직접 보면 나의 말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들을 테다.
영화 속 주인공인 크리스틴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소녀였다. 으레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가정 환경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일삼으며, 주어진 이름 대신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는 예명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거다. 누군가는 가난한 가정 형편을, 누군가는 가족의 불화를 탓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비아냥거렸던 날들 말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나 역시 우리 집을 원망한 적 있다.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지칭하는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산다.
경기 불황으로 인해 아버지는 직업을 잃게 되고,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직업에 지원하는 슬픈 일까지 벌어진다.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크리스틴이 자신을 비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집을 '철로 근처의 구진 집'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경제적 여건에 대한 열등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그녀가 꿈꾸는 곳은 '뉴욕'으로 대표되는 부자들의 도시다. 그녀는 반드시 세크라멘토에서 벗어나
자신이 꼭 동부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현실과 이상의 격차로 인해 자연스럽게 크리스틴은 방황을 거듭하게 된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친구에게
다른 사람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고 거짓말하면서, 그녀의 비관적 태도는 극에 달한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머니와의 갈등도 심화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자연스럽게 크리스틴의 심경에 몰입되어, 크리스틴이 처한 처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크리스틴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한다고 해도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영화 속 모든 스토리를 나열할 순 없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존중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대니'와 '카일'의 흠결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매일 가족을 위해 야근하는 어머니와 실직 이후 우울증에 걸린 아버지를 발견한 것도 큰 계기가 됐다.
영화 속 크리스틴의 대사 중 영화를 가장 핵심적으로 관통하는 대사가 나온다. 크리스틴과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고른다. 크리스틴은 어머니에게 왜 예쁘다는 칭찬을 자신에게 하지 않냐고 묻는다.
'난 네가 언제나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말에 크리스틴은 '이게 나의 최고 모습이면?'이라고 반문한다. 과거 '돈'과 같은 추상적 가치에 목을 매던 크리스틴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정해달라며
어머니에게 요구하는 장면에서 크리스틴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탓을 하지 않는 크리스틴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자아 존중감'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을 자각하는 크리스틴을 보여주는 영화적 표현방식은 체념이나 패배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비극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크리스틴의 모습이 관객들에게 더욱 대견하게 느껴진다.
성장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자극은 대개 관객들 역시 함께 성장하는 느낌을 주는 거다. 우리는 자연스레 크리스틴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가정환경 탓을 많이 한 것은 아닌지, 나로 인해 가족들이 큰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닌지 말이다.
크리스틴이, 레이디 버그에서 크리스틴이 되었듯, 나 역시 현실 속 나의 자리에서 더욱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자는 교훈이 전해진다.
나는 평소 결과보다 과정이 아름다운 영화를 좋아하는데, 레이디 버그라는 영화는 '과정이 아름다운'이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한다. 결과적으로만 봤을 때 가족을 바탕으로 하는 진부한 내러티브 일 수 있지만, 그 과정이
세련되고 섬세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마치 다소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처럼
결말보다는 과정이 중시되는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본다. 영화 속 삽입된 BGM 역시 매력적이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John Hartford - This Eve of Parthing 이란 곡은 영화의 분위기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곡이다.
앞서 나는 인간이 다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존재들이라 표현했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산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것만큼 지루한 사회도 없을 거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존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와 맞지 않다고 타인을 배제하는 것은 분명히 맞지 않는 태도이거니와, 소위 정답만을 추구하는 태도도 옳지 못하다.
크리스틴이 자신을 레이디 버그에서 크리스틴으로 인정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다음에는 영화 속 뮤지컬 배역처럼 서로의 다름을 어떻게 나누고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자.
모두가 뉴욕을 추구하기보다, 각자의 세크라멘토를 품고 살아가는 삶이 더욱 값진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