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스 Oct 14. 2019

'버드맨' 극복하기

영화 해석 및 리뷰 < 버드맨, 2015 >

          

                   


                      

인생은 한 편의 연극과 같다. 리허설은 없으며, 모두가 주인공이다.

연극 속에서 주인공은 여러 배역을 맡아야 한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잘 소화해내느냐가 주인공의 평가요소다.  


학생으로서,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또 어느 직장의 구성원으로서

주어지는 대사와 지문은 다양해진다.


모든 배역을 다 잘 소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어놓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우리는 때때로 좌절을 경험한다.


영화 < 버드맨 > 속 '리건'도 마찬가지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아버지, 훌륭한 배우, 좋은 남편 이 세 가지 배역을

모두 잘 해내고 싶어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훌륭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그려낸 영화가 바로 버드맨이다.




                             

버드맨


영화 속 리건은 '한물 간 유명 배우'로 등장한다.

과거 버드맨이라는 영화에서 멋진 활약을 했지만

지금은 상처뿐인 영광이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유명 배우였다는 점은 리건이 자신을 더욱 몰아세우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가 모든 것을 투자한 연극의 성공에 집착하는 이유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버드맨이라는 상징은 과거의 영광이자 사회적 시선으로 여겨진다.

리건이 실패하고 좌절할 때마다 어김없이 버드맨이 등장해 그의 머릿속을 괴롭힌다.

성공에 집착하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리건을 딸과 아내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던 중 그의 앞에 '마이크'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마이크는 브로드웨이에서 매우 호평받는 배우였고,

그의 연기를 본 리건은 마이크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마이크는 연극의 프리뷰 무대에서

대본에 없는 대사와 행동으로 리건을 당황시킨다.


리건은 마이크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마이크와 대립각을 세워나가지만,

역설적으로 돌발적인 상황이 많아질수록 연극은 점점 흥행하게 된다.

급기야 영화 후반부에는 자신에게 실탄을 쏘는 리건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마이크는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리건의 모험을 이끌어내는 인물인셈이다.


앞서 버드맨을 사회적 시선이라고 표현했다.

연극은 대본대로, 정석에 맞게 공연되어야 한다는 것이 리건에게 일종의 버드맨이었다면, 

마이크라는 존재가 등장함에 따라 이 고정관념은 점차 깨지기 시작한다.


결국 자신 안에 있는 버드맨을 극복해내는 리건의 태도가 

리건이 성공할 수 있게 되는 원인이라는 의미다.





영화와 연극


연극은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영화 대부분의 내용이 리건의 연극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하고,

연극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롱테이크가 활용됐기 때문이다.


작품 속 영화와 연극의 대조가 의미하는 바도 생각해봄직하다.

버드맨 속에서 영화와 연극은 반복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리건은 영화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배우이지만,

연극계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에 가까운 수준이다.

심지어 '실비아'라고 불리는 평론가에게는 심한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연극이 영화보다 높이 평가받는 이유에는 영화가 갖는 '편집'의 특성이 작용한다.

연극과 달리 영화는 재촬영이 가능하고, 특수효과도 추가할 수 있다.

영화는 '수정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기력으로 모든 승부를 봐야 하는 연극보다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의 편견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수준 낮은 대중들이 선호한다'라며 폄하하고

브로드웨이 연극을 추켜세우는 지식인 계층을 영화는 비판하고 있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실비아가 리건의 연기를 인정함으로써

지식인 계층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낸다.




                   

자존감


결국 영화는 자존감과 본질의 문제로 파고들어간다.

감독은 실비아로 대표되는 '비평가'들에 대해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리건은 리허설을 하다 연기를 못하는 한 배우를 해고한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 후반 등장하는 노숙자의 말을 통해 잘린 배우를 떠올리게 만든다.

리건이 지금까지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평가해왔던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리건은 자신이 비판하던 실비아처럼 누군가의 노력을 성급하게 평가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이러한 비평가들을 건방진 존재로 표현하면서 

관객들에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에 온전히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영화 속 핵심 소재인 버드맨도 결국 누군가가 리건을 정의한 결과였다. 

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면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영화 속 카메라는 담고 있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은 내용은 이 밖에도 많다. 리건이 아내에게 하는 대사가 대표적인 예다.


딸이 태어나는 순간을 찍지 말았어야 했어.

왜요?

그 순간을 놓쳤거든.
         

카메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자신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딸이 태어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는 말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주체성이 갖는 중요함을 보여준다.


영화 내내 리건의 거울 앞에 붙어 있는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이라는 표현 역시 이를 강조한다.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영화의 부제이자, 실비아가 리건을 평가한 표현이다.

이 표현 역시 영화 속 주제를 강조한다.


리건의 연극은 '초현실주의'라는 표현으로 정의됐다.

실비아는 그의 연극을 '연극계의 동맥에서 사라졌던 피를 흘렸다'라고 평가했다.

영화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연극에서조차 

현실을 가장하는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는데,

초현실주의적인 리건의 연극은 연극계에 새로운 자극을 줬다는 이야기다.


마치 <연금술사>의 '초심자의 행운'처럼 새로운 인물로 인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리건이 실비아의 평가에 좌절하고, 연극을 그만두었더라면 달성할 수 없었던 성과다.

감독은 무지의 미덕이라는 표현을 통해 관객들에게 세상에 몸을 내던지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자살을 하기 위해 바다로 몸을 던진 리건을 해파리가 구해내는 것처럼.


평가와 걱정은 뒤로 미뤄라. 무엇이든 일단 시작하고 생각해라.

거대 로봇이나 슈퍼히어로의 등장과, 운석 충돌같이

다이내믹한 사건이 일어나야만 삶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구가 유지된 60억 년 중 인간이 살아온 기간은 단지 15만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감독이 주는 이러한 메시지는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결말과 연출


영화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인터넷에서 리뷰를 찾아보니

영화의 결말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나는 관객들이 결말을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감독이 의도했다고 본다.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라는 게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기 때문이다.

리건이 버드맨이 되어 하늘을 날아갔든, 비관적인 태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신이 결말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본다.

생각하기에 따라, 그것이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다. 

마치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생각나게 한다.


이 영화의 연출이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인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의 편집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만, 아직은 역량 부족이다.

편집과 영화적 기법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롱테이크 기법이나, 1인칭 시점과 같은 표현방식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글을 좀 더 읽어보면 좋겠다.



글을 마치며



'벌새의 물 한 방울'이라는 책이 있다. 숲에 불이 나자

모든 동물이 도망쳤지만, 작은 벌새가 물을 한 방울씩 옮겼다.

동물들이 비웃자 벌새는 동물들에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앞서 인생은 연극과 같다고 했다.

누구나 연극의 주인공이고, 소화해야 하는 배역은 수십 가지다.

우리는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비평가처럼 뒤에서 숨어있지 않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


자존감을 높이기 어려운 사회라고 한다.

수많은 평가 기준을 만들어 놓고, 기준에 미달하면 비판하는 사회에서

자존감을 지키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운일지 모른다는 말도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리건이 여러 번 전달하는 대사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슬퍼하는 표현이다.


난 당신이 원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

매일 다른 남자가 되려고 애쓰면서 산다고.
        

P.S 모처럼 아주 마음에 드는 영화를 추천해 준 친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내가 되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