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석 및 리뷰 < 82년생 김지영, 2019 >
최근 영화계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현상이 있다.
과거에는 영화에 어떤 스타가 출연하느냐가 항상 이슈가 됐었는데,
최근에는 그 경향이 내용적인 측면으로 옮겨왔다.
누가 출연하냐보다 영화가 어떤 내용이냐에 더 관심을 쏟는 분위기다.
그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인 내용은 젠더 갈등이다.
작품 속 주요 내용이 젠더 문제를 다루고 있거나,
심지어 영화 속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젠더 갈등을 그려내면 난리가 난다.
커뮤니티 속 논쟁과, 영화의 평점 대결은 물론, 각종 언론 기사까지.
우리나라에서 이 주제는 가연성이 매우 높은 소재가 되었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내용을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평점 테러를 하고,
영화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앞장서서 티켓을 여러 장 구매했다.
이러한 갈등 추세는 앞으로도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영화를 제대로 감상했다면,
일반적인 남성들이 크게 불편할 만한 내용은 없다.
영화의 내러티브를 살펴보면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여성이 아픔을 겪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쪽 편을 드는 듯한 젠더 갈등 양상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남성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던
대한민국의 구조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되려 영화를 보는 여성들이 불편했을만한, 감독의 태도였다.
이 영화를 보고 여성의 기득권을 논하는 것은
크게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82년생 김지영의 인생 스토리다.
태어났을 때부터 견고하게 유지되어 왔던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감독이 영화에서 문제점을 드러내는 소재는
육아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이상이다.
명절 시댁에서 가사노동에 시달리던
지영이 앞치마를 집어던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며느리의 정신이 이상하다는 설정이 마련되어 있어야
부당한 가사노동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영화 속에서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김지영의 시어머니와 같은 캐릭터는 관객들의 분노를 유발하긴 하지만,
몸이 아픈 며느리에게 한약을 지어줄 만큼의
애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악마 역할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도 악역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일부 캐릭터를 제외한, 대부분의 캐릭터는
과거해왔던 관습들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무지와 순응이 만들어낸 비극 중 하나다.
이렇듯 등장인물들의 소극적 반항은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가 김 팀장이라는 캐릭터다.
김 팀장은 아이를 출산한 뒤에 바로 복직해
열심히 일을 해나가지만, 다소 소극적인 캐릭터로 비친다.
상사의 몰상식한 발언을 일정 부분 감내하고,
장기 프로젝트에 여성 직원을 최대한 배제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저항하지 못한다.
결국 이후에는 진급이라는 한계에 막혀
자신이 회사를 새로 차리기 위해 조직에서 나오게 된다.
김 팀장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한계는 지금을 살아가는 관객들의 현실과도
여전히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 장면은 결국 '슈퍼우먼'과 같은 일종의 토크니즘 전략으로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슈퍼우먼을 요구하기보다는 왜 여성에게만 슈퍼파워를 요구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순응의 문제점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남성 중심의 구조에 적응하는 것을 선택해버린
다른 여성이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 자체를 부정한다는 거다.
지영의 고모와 같은 캐릭터가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를 일찌감치 체화해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한다.
남편의 제사상을 매번 차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지영의 시어머니와 아들을 강조하던 지영의 친할머니처럼 말이다.
개인의 성향 차이일 수도 있고, 무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캐릭터들은 변화를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더 나아가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유별난 집단'으로 치부하며
비하하기까지 한다.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이유다.
한때 지영도 같은 고민에 빠진다.
자신이 '능력이 없어서 출구를 찾지 못한다'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거나,
집에서 아이를 잘 기르는 것만으로
가끔은 행복을 느낀다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는 장면이 이를 보여준다.
소극적 반항과 기존 체제의 편입이
변화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들이다.
영화에서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3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김지영의 어머니, 김지영, 김지영의 딸.
첫 번째 김지영의 어머니는 기존 사회에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던 자신의 꿈을 포기한 채
오빠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의류공장으로 향해야 했던
그 마음이 그대로 응어리져있다.
이 때문에 자식들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김지영이 육아 때문에 회사를 다니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아이를 봐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는 이유다.
두 번째는 김지영이다.
과거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많은 제약들이 존재한다.
자신을 맘충이라고까지 부르는 타인들의 부정적 시선까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사회는 한 발짝 나아졌지만, 여전히 출발선조차 도착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김지영의 딸이다.
어린아이인 김지영의 딸은 단순히 아이의 속성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딸이기 때문에 김지영과 비슷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보다 얼마나 달라진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가 관전 포인트처럼 다가온다.
김지영의 아이의 성별은 굳이 여자로 설정한 것은
관객들에게 김지영의 딸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주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결말에 다다를수록 김지영의 주체성이 강조된다.
영화 속에서 김지영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행동도 제대로 못하는 캐릭터로 묘사됐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하고 싶은 행동이 있을 때
타인으로 빙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김지영의 상태는 차차 나아졌다.
김지영에게는 자신의 상황과,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해 맘충이라고 표현한 집단에게 크게 한 마디를 했던 김지영은
상담사에게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괜찮았다고 말한다.
맘충처럼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고,
여성의 독박 육아처럼 저항해야 할 사회 구조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거다.
감독은 관객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무엇인가가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홍보 회사를 다니던 김지영은 현실과 약간 타협해
집에서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다.
다만 김지영의 인생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자신을 응원하는 남동생, 언니, 어머니가 있으며,
당당하게 출산휴가를 쓰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유 있는 저항을 깊이 응원한다.
P.S 영화 속 공유의 캐릭터를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공유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남편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