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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Dec 25. 2019

내 역사는 내가 쓸래요

영화 해석 및 리뷰 < 벌새, 2018 >




역사는 여러 가지 형태로 기록된다.


역사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종이와 펜을 활용해

기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대중들이 느끼는 역사의 흐름은

이처럼 정교하지는 않다.


누군가에게는 역사가 음악의 형태로 기록된다.

그 사람의 직업이 음악가일 수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속에

시간의 흐름을 저장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나의 경우, 윤도현의 '사랑했나봐'를 들으면

초등학교 수학여행이 떠오르는데,

수학여행 버스 안에서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일 거다.


이때 나에게 수학여행이라는 역사는

음악의 형태로 남아있다.


향기에 기억을 저장하는 사람도 있다.

문득 길을 지나다가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추억을 떠올려 본 기억이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 같다.


역사는 음악이나, 향기, 심지어는

침묵의 순간으로도 표현된다.


오늘 소개할 영화 <벌새>는

이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딱딱하고, 지나치게 객관적인

역사 서술의 방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느꼈을 법한 역사 표현 말이다.


1994년에 여중생 은희라는 인물이 겪었던

자신만의 생생한 역사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벌새


영화 속에서는 벌새라는 표현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벌새의 시나리오가 독서모임 주제로도 선정돼

시나리오도 살펴봤지만,

역시 벌새라는 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영화의 제목이 벌새일까.


벌새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아주 작은 새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인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빠른 날갯짓이 가능한 동물이다.


이 벌새는 살아남기 위해 작은 날개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열심히 꿀을 먹는다.

남이 볼 때는 작고 보잘것없을 수 있지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닮았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모두 한 마리의 벌새처럼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주인공 은희뿐만 아니라 자칫 작은 배역에만

머물 수 있는 은희의 주변 인물들까지

섬세하게 설정을 부여한 작가의 배려가 놀랍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 속 배역들은

하나도 허투루 그려진 법이 없다.

카메라 렌즈의 위치를 바꾸면 누구나

주인공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캐릭터가 설정되어 있다.


벌새처럼 초라해 보이지만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

나름대로 충실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의미다.




은희


각자가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본인의 삶을 잘 그려낸다는 것을

'역사적'이라고 표현할 때,

은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그다지 역사적이지 못하다.


1002호에 살고 있는 은희는

엉뚱하게도 902호의 벨을 누르고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친다.


아파트라는 건물의 속성상 집이

대부분 비슷한 구조라는 것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은희에게 집이라는 영역은

반갑거나 따뜻한 곳이 아니라,

무색무취의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는 이후에 은희가 가정환경을 비관하는

장면과도 이어진다.


그렇게 인생의 주인공이길 거부하던 은희는

몇몇 등장인물들과 만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은희의 사슴 같은 눈망울을 좋아한다던 지완이,

자신에게 고백했던 후배 유리,

정신적으로 안식처가 돼주었던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김영지라는 캐릭터의 등장은

은희에게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다.


오빠에게 맞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은희에게

폭력에 맞서 싸우라고 조언해주면서

은희가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 살아가도록 돕는다.


영지의 조언 이후 은희는 부당함에 저항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은

많이 언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일반 관객들이 작품 속 섬세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고,

3인칭보다, 1인칭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영화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이 영화의 스토리 외적 측면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 영화를 논할 때, '여성 서사'라는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 서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영화계에서 이러한 작품은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등장했어도 쉽게 외면받아왔다.


그 이유는 하나의 영화에서

주로 한 가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남성 서사의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인데,

벌새의 경우 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매우 광범위하다.


나를 포함한 일반적인 대중들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다.


영화계에서 공식처럼 여겨졌던,

하나의 특수한 설정이나

관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 여성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특별한 능력이나 환경이 필요하지않다는 얘기다.
영화는 그저 평범한 이야기의 힘으로 이어져나간다


일부 관객들이 영화를 모호하다고 평가하거나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의 비교 대상은

주로 한 가지의 주제를 바탕으로 한

남성 서사의 영화였다.

이렇듯 다양한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의 등장이 반갑기도 한 이유다.


최근 벌새와 같은 영화의 성공에는

관객들의 취향이 변한 것도 작용한다.


개인의 삶을 다룬 영화를

저평가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한 인물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드러나는 셈이다.


개인 위주의 이야기 전개 방식의 등장은

앞서 리뷰했던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사례처럼

굳이 슬픔을 기쁨으로 치환하지 않아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펭수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꾸며진 서사와 확실한 특색을 가진 캐릭터보다,

미완성된 이야기를 선호하고,

현실적인 캐릭터에서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거다.


영화 속에서 안타까운 점도 있다.

작품 속 여성 서사에서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엄마라는 캐릭터다.


영화 속에서 은희나 은희의 언니, 영지의 경우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들은 억압되어 살아가야 했던

과거의 한계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영화 속 은희의 엄마는 안타깝게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대학생을 부러워하는 엄마는,

그저 엄마라는 역할에 한정 지어져

영화 끝까지 그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대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은희와 영지는

도전을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다면,

엄마라는 캐릭터는 시대의 희생자 역할로

안타깝게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엄마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물리적 한계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도 반복돼 등장한다.




역사


다시 역사로 돌아왔다.

<벌새> 속 은희의 역사가 쓰이는 걸

우리가 지켜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역사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라는 거다.


자신의 선택이 옳냐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이다.


영지가 담배를 피우는 것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듯이,

또 영지가 은희에게 철거민들의

처지를 알 수 없기에 함부로

동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래방 대신 서울대를 가자'라는

은희 담임 선생님의 말처럼

과거 남성 서사에서 옳고 그름은

이분법이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방식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은희는 이러한 영지의 말을 새겨듣고는

영지가 성수대교 붕괴로

목숨을 잃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영지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몫인 슬픔을 드러낼 뿐이다.


"너 이제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영지는 죽기 전 은희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물론 영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영지가 죽음으로써,

대사는 더욱 깊게 각인됐다.


이 대사는 영화의 주제와도 같다.

이 영화를 보고 있을 여러 '은희'들에게

삶과 맞서서 싸우라는 메시지다.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의 역사를

각자의 방식으로 써 내려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어떤 시위대의 문구보다 강렬한 표현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명절날, 나의 이모부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했던 말인데

우리 형이 나보다 더 성공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여러 가지에 흥미가 많고,

형은 한 가지를 꾸준히 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인 것 같은데

이모부의 그 말은 나를 위축시켰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전혀 아무렇지 않지만 그날 이후 한동안

나는 형에게 꽤나 경쟁심을 느꼈던 것 같다.

갑자기 사소한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어른들의 말 한마디가 어린 소년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나에게도 영지 같은 선생님이 있었다면

누군가가 나를 재단하고, 평가할 때

이에 맞서 싸울 용기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힘들 땐 손가락을 봐.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영지의 대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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