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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Dec 09. 2019

믿는다는 것

영화 해석 및 리뷰 < 아이 오리진스(I Origins), 2014 >


사람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보이는 것을 믿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것도 믿는 사람.


전자를 형이하학적인 것.

후자를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흔히 표현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느냐 하는 차이는

두 사람의 대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실존에 관한 기본적인 전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 I origins >에서는 이들의

공존을 모색한다. 바로 '눈'이라는 소재를 통해서다.



'눈은 한 사람의 우주다'.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에게 알 수 없는 말을 건넨다.

영화의 핵심과 정답은 도입부터 주어지지만

관객들은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야 이 말을 이해하게 된다.


주인공인 이안 그레이는 눈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그는 데이터를 신뢰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다.


반면 여자 주인공인 소피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뚜렷한 직업도, 살아가는 이유도 없지만

그저 삶이 신의 의도대로 흘러간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정반대의 인물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린다.


작품 속에서 눈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이안은 눈이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라고 믿으며 눈의 기원을

찾으려고 애쓰는 인물이다.


반면 홍채 이색증이라는 특이한 병을

가지고 있는 소피는 일종의 돌연변이로 묘사된다.

두 사람의 눈은 개체 자체(일반 눈과, 홍채 이색증)로도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눈을 대하는 방식 역시 판이하게 달랐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이라는 소재를 다루지만

주인공이 '눈'을 대하는 태도는 점차 변해간다.




상징과 사실


나는 상징과 사실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를 표현하는 용어는 다양할 수 있다.

가령 관과 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등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두 명은 상징과 사실이라는 키워드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소피는 상징이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이안은 사실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상징이 무엇인가 함축된 뜻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실은 직관적으로 바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먼저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상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숫자 11이 여러 번 겹칠 확률을 시작으로,

우연히 지하철에서 마주칠 확률까지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안은 자신이 소피를 찾은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이안이 소피를 기다렸던 카페에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아주 우연하게도

지하철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작부터 운명이라는 상징적인 것이

두 사람 사이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돌연변이



소피는 자신을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표현한다.

평범한 인간과 달리 영적인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이안을 말리기까지 한다.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벌을 내린 것처럼,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이안에 대한 분노를

대신 감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벌레에게 빛을 보게 해주겠다던 이안의 눈에

포름알데히드가 들어간 장면을 마냥 우연으로만 볼 순 없다.

벌레→인간→신으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먹이사슬에서

돌연변이인 소피는 신의 말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소피의 죽음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소피는 이안과 처음 만난 순간 '꿩'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꿩은 천생연분을 만나면 끝을 알기 때문에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주는 장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자기가 죽으면 화장을 해달라고 미리 말하기까지 한다.

"우린 다시 서로를 찾을 수 있어" 같은 말도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엘리베이터에서 목숨을 잃던 그날에도,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안을 먼저 올려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훗날 소피가 살로미나로 환생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일종의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해석해봄직하다.




안경


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안경이라고 하는 장치의 사용이었다.

영화 속에서 안경은 영적 존재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먼저 이안은 영화 초반부터 호피무늬 안경을 쓰고

등장한다. 이 호피무늬 안경은 '사실'을 드러내는

소재로 활용된다.


안경을 끼지 않는 소피와 달리 이안은 평소 항상 이 안경을 쓰고 있다.

그러다가 소피는 처음 방문한 이안의 연구실에서

이안의 안경을 벗기고 키스를 나눈다.


벌레에게까지 실험을 하는 이안을 보면서

소피는 이안의 안경을 벗기려 하는데,

이는 안경이라는 소재가 현실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이안의 눈에 포름알데히드가 들어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자

그제서야 비로소 소피는 이안에게 안경을 씌워준다. )


소피가 죽음을 맞이하고, 이안과 캐런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이 호피무늬 안경이 등장한다.

7년 후라는 자막이 나온 이후, 이안은 검은색 안경으로

안경을 바꾸었지만 이번에는 캐런이 호피무늬 안경을 끼고 있다.


영화를 계속해서 보다 보면, 형이상학적인 것을 믿지 못하는

상황일 때는 이 호피무늬 안경이 등장하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믿는 시점에는 안경을 벗고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눈이 세상을 보는 창이고, 안경은 그 눈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안경은 부정적인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안의 검은 안경은 호피무늬 안경보다는 훨씬 '상징'에 가깝다)


향수는 이안에게 감각적인 것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소피의 안경 없는 눈(나안)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기원과 문


영화 속 이안의 목표는 '기원'을 찾는 것이다.

눈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무엇이 눈의 시작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안의 목표와는 다르게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도 풀어내고 있다.

신이라는 소재를 활용해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신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둘 뿐이다.

영화 중반 소피는 이안이 두려움 때문에

빛이 들어오는 문을 열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살로미나를 안고

자신 있게 빛이 들어오는 문을 여는 장면을 통해

이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두려움을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그저 문은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이다.


결국 데이터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로미나가 단지 44%만큼의 정답률을 보여줬음에도

이안은 살로미나가 소피의 환생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여기서의 확신은 사실로서의 확신이 아니라

상징으로서의 확신에 가깝다.


영화의 극적인 장면 연출을 위해 신의 일을 한다던,

데릴 매캔지라는 맥거핀을 활용한 점도 흥미롭다.

처음 소피의 눈이 그려진 광고판을 보는 장면에서도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카메라 기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장치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글이 너무 길어진 측면이 있다.


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영화를 요약하자면

'눈은 한 사람의 우주다'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이 말의 의미는, 눈(세상을 보는 창)이 어떤

형태인지에 따라 우주는 다르게 보인다라는 뜻이다.


환생을 할 수 있느냐 없는 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생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핵심이라는 얘기다.

존재론적인 것보다 인식론적인 것에 가깝다.


카메라가 빛을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진이 바뀌듯,

우리가 빛을 얼마나 보느냐에 따라 인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카메라 비유'를 통해 영화는 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달라이 라마 비유를 통해 글을 맺고자 한다.



과학자가 달라이 라마에게 물었다.

"과학적 증거가 당신의 종교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달라이 라마가 곰곰이 생각한 뒤 말했다.

"모든 연구와 모든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본 다음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
그 결과 과학적인 증거가 내 종교를 부인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나는 신념을 바꾸겠다."


이 말의 뜻은 종교가 불변한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 모든 연구와 모든 보고서를 다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나의 신념을 그대로 고수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믿음은 사실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해석의 영역에 가깝다.


P.S 이번에도 매우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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