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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Dec 02. 2019

운명과 우연사이

영화 해석 및 리뷰 < 500일의 썸머, 2009 >

조셉 고든 레빗, 소위 '조토끼'라는 배우를 좋아한다.

매력적인 마스크를 가지고 있고, 연기도 일품이다.

무엇보다 내가 조토끼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디에서나 어울린다는 점이다.


그는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잘 소화해낸다.

과하지 않으면서 모자람도 없다.

내가 가장되고 싶은 캐릭터 유형이다.


오늘은 조셉 고든 레빗의 대표작인

<500일의 썸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크게 눈에 띄는 영화는 아니지만

내용물이 꽉 차게 들어있는 영화다.




사랑 이야기


흔한 로맨틱 코미디로 보이는 이 영화는

영화의 서두에서 이 영화가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밝힌다.

대신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라는 점을 크게 강조한다.


시작부터 굳이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밝히는 이유는

영화가 후반부를 향해갈수록 이해가 된다.

주인공인 톰과 썸머의 사랑의 기준은 매우 달라서

두 사람은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사이인 것처럼 연출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톰과 썸머가 함께 한 500일을 다룬다.

그들은 서로 키스를 나누고, 잠자리를 함께하며

연인과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지만

사실 두 사람은 그저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애매한 관계는 두 사람이 갈등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톰과 썸머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다.

순탄했던 톰의 가정환경과는 달리 썸머는

부모님 사이의 마찰을 목격하며 커왔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다른 라이프스타일 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대립을 이루는 것은 '운명'에 대한 관점인데,

톰은 운명 같은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반면

썸머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앞서 나는 두 사람이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사이인 것처럼

연출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톰과 썸머가 사랑을

느꼈던 시기가 맞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운명적인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톰이

썸머를 운명으로 생각했을 때, 썸머는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행복함을 먼저 추구했다.


영화 후반, 썸머는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면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대상은 톰이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사랑한 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대조


이동진 평론가가 기생충을 '상승과 하강의 명징한 직조'라고 표현했던가.

이 영화는 영화 전반에 걸쳐 많은 개념이 대조를 이룬다.

가장 핵심적인 대조인 톰과 썸머의 성격을 시작으로

건축과 카드 쓰는 작업, 친구와 연인 등

각각의 상징들이 대조를 이루며 그려내는

대립 구도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먼저 친구와 연인이라는 관계 설정이 주는 대립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영화에서 관계 설정은

큰 갈등을 유발한다.


톰은 썸머에게 애매한 관계가 싫다고 말한다.

만남 초기에 분명 썸머가 톰에게 자신은 부담 갖는 관계가 싫다고

이야기하고, 톰이 이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명확한 규정을 요구하는 장면이다.


이는 갈등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관계 설정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 썸머에게

톰의 이러한 요구는 강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톰 역시 이에 대해 몹시 답답한 심정을 느끼는데,

관계 설정에 대한 말다툼이 있은 후 잔뜩 꼬여있는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을 통해 톰의 심경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갈등은 결정적으로 두 사람이 헤어지는 요인이 된다.

썸머는 '시드와 낸시' 비유를 통해 자신이 톰을

괴롭히고 있는 존재라고 치부해버린다.

명확한 관계 설정처럼 자신에게 계속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톰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대서 오는 죄책감 같은 게 작용한 듯하다.


결국 그녀는 이별을 선택하면서 마음의 짐을 덜고자 한다.

물론 둘은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건축과 글쓰기의 대조 역시 흥미롭다.

영화 속에서 건축과 글쓰기는 서로 반대의 성질을 지닌다.

글쓰기는 톰이 하고 있는 직업이지만, 원하는 직업은 아니다.

썸머는 그러한 톰이 글쓰기보다 건축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건축과 글쓰기는 모두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동일하다.


하지만 두 상징의 가장 큰 차이는 유형이냐 무형이냐다.

건축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시작해서 건물을 세우면서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명확하게 실존하는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카드쓰기로 대표되는 글쓰기는 부정적인 장치로 묘사된다.

글씨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단어라는 것은

본래 무형이어서 그 속마음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는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감출 수도 있다.

썸머와 헤어진 톰이 카드 쓰기를 그만둔 이유에는

썸머를 만나면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던,

자책감 같은 것들이 묻어 있다는 이야기다.


진정한 사랑과 운명을 믿던 톰이 운명을 믿지 않게 되고,

인연은 동화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비아냥대던 썸머가

운명의 상대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대조다.



사랑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먼저, 톰이 자로 잰 듯이 명확하게 구분 짓는 사랑이다.

톰의 사랑은 다분히 이성애 중심적이고, 고전적인 사랑 유형이다.


다음은 썸머의 사랑이다.

썸머의 사랑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썸머는 톰에게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은 못 해봤는데'라고 말한다.)

그녀는 과거 여자도 사귀어보았다고 말하는데,

이때도 역시 사랑하지 않은 채로 행복하기 위해

연애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두 사람의 사랑의 기준은 매우 달라서

결국은 다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꼭 들어맞는 사랑을 추구하는 톰과 달리

썸머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맞추는 사랑이었다.

그들의 어긋난 마음가짐은 자연스레 행동으로 이어졌고,

두 사람의 마음이 크게 갈라지는 원인이 됐다.


썸머가 결국 결혼한 남자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물어봐 주는 그런 남자였지만,

톰은 누군가에게 맞추는 성격은 아니었다.

술집 장면에서 남자가 썸머에게 작업을 걸어댔지만 톰은

가만히 있었고, 남자가 톰을 찌질이라고 표현하고 나서야

톰은 주먹을 날리는 장면을 통해서 그의 성격을 드러낸다.


영화는 내용뿐 아니라 연출에 있어서도 알찬 모습을 보여준다.

플롯의 순서를 뒤섞어놓은 것은

관객들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빌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장면을 통해

톰의 우울한 뒷모습을 강조한 연출이나

신나는 장면에서 새를 그려 넣는 도전정신이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톰의 기대와 현실을 화면분할로 그려내는 모습은

일반적인 플래시백 장면보다 훨씬 극적이다.



영화가 끝나갈수록 두 사람은

각자의 사랑 방식을 찾아가는 듯해 보인다.

운명에 순응하고 소극적이었던 톰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은

그가 선택한 건축가의 삶과 맞물린다.


최근 리뷰했던 영화 플립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변화를 능동적으로 맞이하고

부분보다 전체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톰과 썸머의 사랑을 응원했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결말일 수 있겠다.

그러나 톰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오텀(autumn)'과 만나는 과정을 보면서

관객들은 성숙해진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짓게 된다.


마지막으로 영화 내내 촌철살인을 하던

톰의 동생 레이첼의 명언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떤 귀여운 여자가

오빠랑 괴상한 취향이 같다고

천생연분이 되는 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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