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석 및 리뷰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8 >
똑같은 영화를 봐도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감상뿐 아니라
장면 하나하나에도 수 십 개의 평가가 나온다.
이렇게 다른 생각들을 나누고 다듬으면
더욱 좋은 그림이 그려진다.
예술 작품 감상에 정답이 없는 이유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시 여러 그림이 공존한다.
모양도 색상도 가지각색이다.
오늘은 철저하게 내가 본
이 영화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명작의 위엄에 눌려, 평소의 리뷰보다는
훨씬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제목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볼까 한다.
영화를 얼핏 봐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이 전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노인의 빈곤 문제나,
사회보장제도를 다룬 이야기가
제목과 어울린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노인'은
생물학적 나이로만 구분되지 않는다.
'벨'이라고 하는 나이 든 보안관이
나오기는 하지만
영화의 모든 부분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안톤 시거, 르웰린 모스, 벨
세 인물이 공동 주연에 가깝게 묘사된다.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변화에 민감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을
청년이라고 한다면,
반대의 인물을 노인이라고
이 영화는 정의 내리고 있다.
그러니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은
생물학적 노인이 아니라 심리학적 노인과
더욱 관계 깊다는 이야기다.
영화를 역사적으로 분석한 몇몇 리뷰를 보면
이 작품이 베트남전 이후의
미국의 사회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자본 만능주의의 풍토. 베트남전 패배 이후
다소 부정적인 미국의 시민문화가
드러나기도 한다.
변화라고 하는 영화의 보이지 않는 사건 역시
이러한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없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자,
변화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다.
보안관이라는 직업이 화려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벨은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캐릭터다.
그는 사건을 수사하지만
모든 것을 걸고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사안일주의로 대표되는
심리적, 신체적 노인의 대표주자로 볼 수 있다.
반면 육체는 젊지만
노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도 있다.
영화 초반 안톤 시거에게 죽임을 당하는
젊은 보안관인데, 그는 모든 일이
자신의 컨트롤 범위 안에 있다고
무모한 자신감을 드러내다 죽임을 당했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는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이동진 평론가는 안톤 시거를
'최고의 악당'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섬뜩한 표정과, 공기총이라고하는
특별한 무기를 지녔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관객들은 더욱 공포를 느낀다.
영화 속에서 안톤 시거는
재앙을 의인화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누구에게나 무서운 존재다.
그는 아군을 두지 않으며,
어떤 일을 벌일지 예측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불확실성은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다.
하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움직일 것 같은
그에게도 나름의 규칙이 발견된다.
그 규칙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먼저 그가 사용하는 무기를 보자.
그가 사용하는 공기총은 벨이
르웰린 모스의 아내에게 얘기했던
도축용 공기총과 거의 유사하다.
가축을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공기총을
아무렇지 않게 사람에게 쏘고 다니는 모습은
안톤 시거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타인을
살리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면
안톤 시거는 살려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만
살린다는 의미다.
따라서 그에게는 돈이나 사랑, 연민 같은
물질적, 심리적 요소가 크게 의미 없다.
그저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아무런 제약 없이 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안톤 시거는 돈을 찾기 위해
르웰린 모스를 쫓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 그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돈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가치보다,
찾아야 하는 것을 찾는 것
그 목적 자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관련짓자면
잘못된 '그레이트 헝거'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돈을 모두 주겠다는
칼슨의 회유를 거절하는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에게 셔츠를
굳이 돈을 주고 사는 장면을 통해서
이러한 점이 부각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도
안톤 시거라는 캐릭터에 가장 애착이 갔다.
감독이 의도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목적 달성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벨은 보안관이라는 임무를 맡고 있음에도
안톤을 찾아내는데 실패했다.
그는 사건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았고
다소 방관자적인 면모도 보였다.
르웰린 모스는 벨보다 훨씬 다가오는 변화에
직접적으로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됐다.
훔친 돈을 지켜내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잠시 잊은 결과다.
반면 안톤 시거는 자신의 목적을
끝까지 이루기 위해
르웰린 모스의 아내 집까지 방문했다.
그의 의도가 살인이라는 것은
비판받을만한 지점이지만
자신이 정해놓은 약속과 규칙을 지키기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삶의 태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안톤 시거는 가장 능동적인 캐릭터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이유를 만들면서 살아간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사고 싶은 것을 사기 위해 돈을 아껴야 한다.
돈이라는 예시를 주로 들었지만, 돈 이외에
감정적인 것들도 많다.
안톤 시거는 이렇듯 자신의 의도를
포장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왜 자신을 죽이냐며 삶을 애원하던
르웰린 모스의 아내에게
'이유가 뭐가 필요해'라고 말하거나
'사람들은 늘 이럴필요 없잖아요라고 말해'라고
읊조리며 사람들의 포장에 지친 기색을 드러낸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긴 하지만, 타인의 눈치를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해 나가는 그의 태도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앞서 재앙의 의인화라고까지 표현했던
안톤 시거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심지어 초록불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점에서
비극은 언제 어디서나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강조된다.
심지어 악마로 묘사되는 안톤에게까지 말이다.
영화는 세 명의 주인공 격인 등장인물을 통해서
어떻게 불확실성에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벨처럼 과거를 마냥 회상하면서
수동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르웰린 모스처럼 짧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안톤 시거처럼
오로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집중할 것인가.
선택지는 여러 가지고,
각각의 장단점은 존재한다.
한 등장인물의 태도가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불확실성이 보장되어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한 번쯤 생각해보자.
행동에 이런저런 명분을 만들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노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극단적인 목적주의자로 살아가는
안톤 시거의 삶을 살 것인가.
두 개다 정답으로서의 삶은 아니겠지만
현재 나의 태도가 어디 즈음에 있는지
판단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