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스 Feb 09. 2020

레옹, 뿌리 내림

영화 해석 및 리뷰 < 레옹(Leon), 1994 >




숙녀 같은 아이 마틸다, 아이 같은 킬러 레옹, 킬러 같은 경찰 스탠스의 3중주



영화를 요약한 말 중에서 가장 와닿는 표현이다. 오늘 리뷰할 영화 <레옹>은 개봉한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미디어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물론 레옹과 마틸다를 그려낸 굿즈들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레옹이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영화 속 아름다운 쇼트들이

한몫하고 있겠지만, 영화 배경이 되는 상황과 오늘날 현실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아이 같은 킬러


영화 속 레옹의 가장 큰 상징은 우유다. 첫 장면부터 술을 먹는 토니와 우유를 마시는 레옹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레옹이라는 캐릭터가 일반적인 킬러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밖에도 아이 같은 레옹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많다.

여기서의 아이는 꼭 신체적인 특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지능, 사고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레옹이 글을 쓰고 읽을 줄 모르는 점. 찰리 채플린이나, 메릴린 먼로처럼 유명 인사를 전혀 모르는 것.

다른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마틸다의 모습에 과하게 질투를 느끼는 점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특히 레옹이 키우는 화분이라고 하는 영화적 소재를 활용해 레옹이 어디에도 '뿌리'를 두지 않은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그가 뿌리내릴 만한 땅이 필요한 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숙녀 같은 아이 마틸다


반면 마틸다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아이다. 성숙하다는 표현보다는 성숙해진 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교장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호텔 관리인에게도 능숙하게 레옹을

아버지라 소개한다.


호텔에 체크인하는 장면에서 변화에 대해 당황하는 레옹의 모습과 이를 태연하게 넘기는 마틸다의 모습이

관객들에게 재미를 더한다.


하지만 성숙한 마틸다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그건 바로 '감정'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가족들이 악역 스탠스 필드에게 몰살을 당한 날 마틸다가 보이는 눈물은

여느 어린아이들 못지않게 슬퍼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옹과 마틸다 두 사람이 함께하게 되는 이유에는 이 불완전한 감정이 있다.

온전히 슬픔을 드러내는 마틸다의 모습에 레옹이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성숙한 듯하지만 어린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된 이유다.




화분


화분이 뿌리 없는 떠돌이 레옹을 상징하는 메타포라고 할 때, 영화는 레옹이 뿌리내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삶에 소망이 없었던 레옹은, 마틸다를 만나면서 변화하게 된다. 영화 초반 레옹에게 살인은

그저 자신의 '일'에 불과하다.


그의 목적은 살인으로 큰돈을 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저 삶을 살아가는데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간주된다. 그가 자신을 살인청부업자라고 하지 않고, '클리너'라고 부르는 이유다.

더러운 것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레옹은 일종의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안톤 시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레옹은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나름의 규칙이 있지만.


레옹과 마틸다의 만남은 그런 레옹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킨다. 레옹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클리너가 되고 싶다는 마틸다의 말에 레옹은

과연 이게 옳은 일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들이 모여서 레옹은 자신의 일상과 같았던 살인이 금전적으로 보상을 얻거나,

개인적인 원한이 있을 때만 저지르는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레옹의 아글라오네마는 어느새 마틸다라는 땅을 향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레옹이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건 토니가 변화를 경계하라고 했던 이유와도 맥을 같이한다.





킬러 같은 경찰 스탠스


레옹의 뿌리내림은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했다. 레옹이 경찰 청사에 들어가 마틸다를 구해내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무색무취의 행동양식을 보여줘야 하는 킬러의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실수를 한 셈이다.

결국 영화 속에서 인상적인 악역 연기를 선보이는 스탠스 필드에게 꼬리를 잡히게 된다.


영화 후반부에 레옹이 죽음을 맞게 되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감독은 탈출에 성공해 빛을 향해 걸어가던 레옹을

1인칭 카메라 기법을 통해 보여준다. 빛은 점차 가까워지지만, 어느 순간 균형을 잃고 카메라는

비스듬하게 바닥에 놓이게 된다.


살고 싶어 하는 대상을 죽일 때 희열을 느낀다던 스탠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경험이었을거다.

하지만 죽기 전 레옹은 마틸다의 선물(?)을 스탠스에게 주면서 두 명의 살인기계는 함께 최후를 맞게 된다.


항상 변함없이 상수(常數) 같은삶을 살아가던 레옹의 일상에 찾아온 변화가 안타깝게도

그의 비극적인 결말을 낳은 셈이다.




교훈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영화가 남기는 교훈이다.

악마 같은 경찰, 천사 같은 킬러. 두 사람의 대조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 장면으로 분석해봐도, 도시 전경으로 시작한 영화는 마지막에서도 도시 전경을 비추며 끝이 난다.

두 시간 가까운 영화의 흐름 속에서도 결국 알 사람만 이 사건을 알고 넘어갈 거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선생님 역시 마틸다의 상세한 사연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어디에 뿌리내리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레옹과 마틸다는 그런 의미에서 둘 다 비극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들이 뿌리내리려 했던 땅은 척박하게 그지없었고 결국 두 사람은 담쟁이덩굴처럼 억세게 삶을 피워냈다.

척박한 두 사람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건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내는 지점이다.


나는 영화 속 배경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렇듯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화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영화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기도 하다.


총격전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크고 작은 다툼들 속에서 상처 입는 식물들이 여전히 사회 주변을 맴돌고 있다.

영화 <박화영>은 그 내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글이 길어졌는데, 요약하자면 회색 인간이 되지 말자는 메시지다.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기도 전에

냉소를 보내는 태도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 그 속에는 악한 경찰, 착한 킬러 이야기가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스팅의 'Shape Of the my Heart'로 끝이 난다. 마틸다가 화분을 땅에 심은 뒤 나오는 음악이다.

마틸다는 뿌리 없이 떠돌던 레옹을 땅에 심었다. 회색 인간이었던 레옹은 죽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마틸다라는 뿌리를 갖게 됐다.


레옹이 기르던 아글라오네마라는 식물은 밀림에서 3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우리의 삶도 좋은 토양이 있으면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P.S 마틸다와 레옹의 관계를 로리타로 보는 시각이 있던데,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마틸다가 레옹에게 잠시 사랑을 느끼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가깝다고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고싶은 것을 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