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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Feb 16. 2020

봉준호와 플란다스의 개

영화 해석 및 리뷰 < 플란다스의 개, 2000 >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은 상징과 대조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사실 봉준호 감독의 여러 가지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인데, 설국열차, 옥자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늘 살펴볼 영화 <플란다스의 개> 역시 봉준호 감독의 첫 장편 영화로 

여러 상징과 선악의 대조가 적절하게 가미된 영화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를 위트 있게 비판한 블랙코미디' 정도로 표현해볼 수 있겠다. 




플란다스의 개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 고윤주는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에서 강아지를 발견하게 되고, 강아지를 죽이려 한다. 강아지를 죽이려는 고윤주, 사라진 강아지를 찾으려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박현남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바로 플란다스의 개다.


이 영화의 제목은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 먼저 제목부터 살펴보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가 '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그냥 개 이야기가 아니라 플란다스의 개인 이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플란다스의 개는 네로와 파트라슈의 이야기다. 

우유배달을 하던 네로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파트라슈를 구출해주고 파트라슈는 네로의 할아버지가 쓰러지자 네로와 함께 우유배달을 다닌다는 이야기.


하지만 영화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와 정 반대로 흘러간다. 네로가 파트라슈를 구한 것과 다르게, 

고윤주는 다른 사람의 강아지를 죽인다. 이렇게 보면 동화와 현실 사이의 큰 차이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외에도 제목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 네로가 파트라슈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처럼

고윤주가 순자(강아지)로부터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윤주는 자신이 매우 싫어하던 

강아지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조금씩 변화를 겪는다. 

순자라는 강아지가 고윤주의 비윤리적인 모습을 지적하는 것처럼 비치는 셈이다. 


결국 플란다스의 개라는 제목은 동화와 현실 사이의 대조를 나타낼 뿐 아니라 개로부터 무엇인가 보답을 받는 인간의 모습을 공통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고윤주, 박현남


봉준호 감독은 영화에서 꽤나 신선한 장면들을 많이 보여준다. 강아지를 소재로 해서 강아지를 죽이는 장면을 연출한다든지, 강아지의 시선으로 보는 카메라 워킹을 보여준다든지, 

주인공의 이름과 성별을 뒤섞는 섬세함까지 담겨있다.

봉준호 감독이 봉테일로 불리는 이유에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지금처럼 동물권이 화두가 되기 전에도 봉 감독의 연출은 충격적이었을 듯하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강아지와 관련된 장면은 전문 의료진, 보호자와 함께 촬영했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좋은 도전은 때때로 논란을 만들기도 한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고윤주인것과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박현남인것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치다.

심지어 지금보다 가부장제가 더욱 공고했던 그 시절, 주인공이 아내가 벌어오는 돈에 의존해 살아가는 

백수인 것 역시 재미있는 캐릭터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그의 구겨진 셔츠와 제대로 정돈되어 있지 않은 옷매무새에서 

그의 현재 상황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젠더적 관점에서 보자면 아내가 오랫동안 일한 회사에서 잘린 뒤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남편이 교수가 되는데 모두 투자한다는 설정이 여전히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자본주의


이제 대략적인 개요는 마치고 하나하나 살펴봤으면 좋겠다. 영화를 한 가지로 규정짓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이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아파트라는 공간적 배경, 뇌물 등이 대표적인 예다.


아파트라는 공간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흔하게 사용된다. 주변과 차단되어 살아가는 모습, 강아지를 길러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자연스럽게 어기는 주민들의 모습, 분리수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다시 경비인이 이를 해결해야 하는 장면까지. 영화 속 아파트는 자본주의의 냄새가 완벽하게 배어있는 곳이다.



주인공 고윤주는 이러한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인데,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우면 안 된다는 원칙을 중요시하면서도 남의 강아지를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원칙은 무시한다.


또, 다른 동기가 교수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차례가 되자

큰 저항 없이 학장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는 모습을 보인다. 고윤주가 강아지 순자를 대하는 태도로도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처음 순자를 본 고윤주는 순자에 대해 적대감을 표하지만 순자를 잘 돌보면 교수가 될 수 있도록 1500만 원을 주려고 해다는 아내의 말에 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생명이라는 고귀한 가치보다 자신의 욕망, 물질적 가치가 더욱 중시되는 웃지 못할 모습이다.


고윤주는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속세에 깊게 물들고 싶어 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박현남은 이런 고윤주와 반대의 캐릭터다.현실적이기보다는 이상에 머물러있다. TV 속에 나오는 멋진 은행 여직원처럼 자신도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또 실제로 순자를 잡아먹으려는 부랑자에 맞서 열심히 저항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은 모두 없는 처지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생각하는 바는 대조를 이루고 있음이 드러난다.





계급


자본주의라는 소재와 봉 감독의 영화답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계급이 등장한다.

가장 최상층에 있는 '학장'부터 부랑자 최 씨까지 계급은 촘촘하게 구조화되어있다.


영화 속 학장은 최고 권력자다. 뇌물을 공공연하게 받아먹으면서 권력을 계속해서 사용한다.

반면 부랑자 최 씨는 가장 약자로 그려진다. 그는 실제로 강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경찰에 넘겨져 강아지의 죽음과 관련된, 또는 다른 범죄들이 있는지까지 의심을 받는다.


당연히 교수가 되면서 상류층에 속하게 된 고윤주는 강아지를 죽였지만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처벌을 받는 사람이 따로 있다. 

마찬가지로 개를 죽이는 사람도 따로 있고 개를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


아파트의 비리를 밝혀냈던 보일러 김 씨는 사망했고 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던 박현남 역시 잘리게 됐다. 박현남말고도 '여상을 나온 사람이 줄을 서있다'는 게 그 이유다. 

거미줄 같은 계급구조는 개인의 노력이 온전히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상류층이 마냥 행복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교수가 된 고윤주의 삶을 그려내는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창밖에 서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는 

고윤주의 모습은 왠지 모를 허탈함이 숨겨져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산을 바라보는 고윤주의 모습과 직접 산을 찾아가는 박현남의 대조가 이를 보여준다.

현실에 순응해 교수가 되는 목적을 이루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바인가에 대한 물음을 

관객에게 던지는 장면이다.


감독은 계급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마음도 색이라는 형태로 나타낸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할 때는 노란색, 흰색을 사용하면서다. 

자신이 아끼는 강아지를 잃어버린 어린아이는 노란 우의를 착용하고 있고 

박현남의 트레이드 마크도 노란 후드티다. 

약간은 유치하지만 익살스러운 색깔 표현을 통해 감독은 장면마다 선악구도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블랙코미디 


봉준호식 블랙코미디의 가장 큰 장점은 관객들에게 설교를 하지 않는 것에 있다. 

영화를 즐겁게 보고 나오지만, 다 보고 나면 찝찝한 무엇인가가 남는 것.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내용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한다.

기생충, 설국열차, 플란다스의 개까지 그의 찝찝한 유머는 섬세하면서도 세련됐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 속 박현남과 고윤주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적인 캐릭터다. 

그들은 꼭 나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으며, 적당히 현실에 순응하기도 한다. 

이런 소시민적 캐릭터가, 자본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구조에서 살아나가는 이야기. 

관객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와 현실에서의 접점을 만들고자 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박현남은 거울(백미러)을 손에 쥐고 있다.

그녀는 그 거울을 관객들이 보고 있는 카메라 쪽에 들이밀면서,

마치 관객들 보고 거울을 한 번 보라는 듯한 메시지를 보낸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카메라를 째려보는 것처럼, 영화와 현실의 간극을 한순간에 깨버린다.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된다.


어쩌면 1500만 원이라는 뇌물을 주고 교수가 되어서도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는 고윤주보다,

직장에서는 잘렸지만 자유롭게 산에 놀러 다닐 수 있는 박현남의 삶이 더욱 부유(富裕) 한 삶이지 않을까.


P.S 영화 속에서 배우 배두나의 존재가 가장 눈에 띄었다. 

박현남이라는 캐릭터와 찰떡궁합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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