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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Apr 04. 2020

친절한 그녀의 핏빛 복수

영화 해석 및 리뷰 < 친절한 금자씨, 2005 >




'너나 잘하세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문장.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명대사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는 2005년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세련된 연출과 캐릭터 구성으로 이루어져 2020년에 다시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오늘은 <올드보이>와 함께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라고 불리는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선과 악


복수극이라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악당이고, 두 번째는 과거의 사건이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이 무공을 갈고닦는다는 설정의 이야기는 흔히 등장하는 소재다.


악당과 선한 마음의 주인공,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과거의 억울한 사연은 복수극을 빚어내기 위한 필수 재료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분명한 악역이 등장한다. '백 선생'이라고 하는 납치범 말이다.

이후 명백한 악역은 아이를 희생당한 부모들로부터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복수극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는 뚜렷한 '선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긴 하지만 감옥에서 사람을 죽인 금자씨는 선역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을 죽였을 뿐 아니라, 

이후 백선생을 죽이는 데에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아이들을 희생당한 부모들 역시 금자씨의 살인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른다.


금자씨는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영화 중간중간에 반복해 고백하고, 신앙을 가진 전도사 역시 백 선생에게 조력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 영화 속에서 완벽한 선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기독교 교리처럼 선하고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음을 감독은 계속해서 드러낸다.





복수와 속죄


영화는 '백 선생'이라는 명백한 악역을 만들어둔 채 일반 시민들이 백 선생을 응징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복수에 대하여 되묻는다.

범죄를 범죄로 대응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복수와 속죄라는 키워드가 이를 말해준다.


금자씨는 영화 초반 감옥에서 출소하면서 전도사가 준 두부를 거절한다. 

두부가 뉘우침을 상징하는 '속죄'의 메타포라고 봤을 때 금자씨가 두부를 거절하는 장면은 자신에게 속죄할만한 죄가 없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에게는 백 선생에 대한 복수가 남아있었고, 이 복수를 끝낸 이후 제대로 속죄하겠다는 마음이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금자씨가 자신이 만든 두부 케이크에 머리를 파묻는 장면이 나온다.

속죄의 두부를 거절하는 첫 장면, 속죄의 두부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인 대조를 이룬다.


감독은 영화 내내 복수가 올바른 행위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피해자들이 명백한 악역인 백 선생을 응징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망설임을 보여주면서다.


금자씨는 복수 계획을 13년 전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복수를 행할 때 약간 망설이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그녀의 딸 제니가 백 선생을 정말 죽일 것인지에 대해 되물었을 때 그런 장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이 백 선생을 어떻게 응징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할 때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백 선생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죽은 아이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

금자씨의 잃어버린 13년 또한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모두가 알고 있지만 숨겨버린 진실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복수의 방법이 과연 최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관객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백 선생을 죽이고 난 후, 금자씨가 일하던 가게에 모여앉은 가족들이

금자씨에게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를 내미는 장면은 묘하게 자본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결국 영화는 복수를 하는 과정을 쫓아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씁쓸한 유머를 심어놓고 있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 관객들이 후련함을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편집


다소 뻔할 수 있는 스토리의 복수극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편집에 있다.

영화 속에서 여러 실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내레이션이다. 극 중에서는 중간중간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영화 후반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금자씨의 딸 '제니'인 것으로 암시되는데 엄마라는 표현을 금자씨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 씨를 좋아했다.
안녕, 금자 씨.


내레이션이 주는 효과는 관객들이 영화를 영화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복수와 속죄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적인 몰입 방해다.

그 외에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등에서 주로 쓰인 방법인 클로즈업 상태에서

인물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는 연출도 사용됐다.


편집에서의 특성을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영화 속에서는 판타지적 요소도 활용됐다.

제니가 쳐다보는 구름의 모양이 이상하게 생겼다거나 금자의 꿈이라든지, 죽은 원모가 나타나는 장면 등이다.

이러한 판타지적 요소의 사용은, 금자씨의 복수를 조금 더 드라마틱 하게 만들어준다.


또한 금자씨가 죄를 뒤집어쓰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근식에게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 당시의 상황이 외재 음향으로 들리는데, 이런 섬세한 연출들도 금자가 복수를 해야 할 

정당성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감독은 미장센에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것이 흰색과 적색의 대조다.

두부,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색과 피와 복수를 상징하는 적색의 대조는 눈여겨볼만한 포인트다.

영화의 포스터에서 성녀를 연상시키며 빨간 케이크를 들고 있는 모습은 이를 잘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금자가 머물게 되는 집 역시 온통 적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금자의 복수를

암시하는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살인과 민주주의


영화 속 백 선생은 매우 선명한 악역이라고 말했다. 특히 식탁에서의 섹스 신은

그가 매우 동물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임을 보여준다.

감독은 백 선생이라는 인물을 완전한 악마로 만들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이렇듯 악역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그것은 백 선생을 '죽어 마땅한 자'로 고착화시키고

금자와 피해자들의 복수를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복수의 정당성은 희석된다.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민주주의를 행하고 있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지켜보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누가 먼저, 어떻게 백 선생을 죽일지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영화 속에서 복수는 정당한 것이고, 용서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구성원들은 당연한 듯 그 규칙을 따른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중립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경찰 역시도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렇듯 경찰을 포함해 일반 시민들, 금자씨가 백 선생을 죽이는 과정은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살인 앞에서의 민주주의가 정상작동되는 장면은 블랙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금자씨와 사람들의 복수 끝에는 씁쓸함이 남았다. 

금자씨가 백 선생을 땅에 묻고 난 이후 짓는 표정에는 허무함이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녀는 제니가 먹여주려고 하는 두부 케이크를 차마 먹지 못한다.

자신이 백 선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됐다는 것을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수는 찝찝한 상태로 끝나게 된다.


감독은 이러한 복수의 미완결성에 대해 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완벽한 악인이 등장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악인의 존재가 드물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산다. 영화 속에서의 전도사도, 복수로 사람을 죽인 피해자 가족도, 

금자씨도 모두 죄인에 속한다. 경찰 역시 진범을 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금자씨의 가짜 자백을 돕는 잘못을 저질렀다. 영화 속에서는 누구든 속죄의 대상이 됐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단죄한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선택은 언제나 불완전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겸손한 태도다. 


물론 범죄자에 대한 단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죄를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단죄할 방법과, 상황과 시기의 선택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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