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석 및 리뷰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 >
오랜만에 애니메이션을 꺼냈다. 별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애니메이션은 보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디즈니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테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2002년에 우리나라에 개봉한 작품이다.
1,2년도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18년 전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영화의 순위는 여러 지표에서 최상위권이다. 그만큼 인기도, 작품의 완성도도 높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영화의 주제도 지금의 현실과 어느 정도 이어져 있는데, 오늘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특히 오늘은 다른 리뷰에 비해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담길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이 영화는 자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흥미로운 판타지물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 안에서 상징하는 바들은 현실과 맞닿아있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치히로라는 여주인공이 자본으로 가득 찬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먼저 유바바라는 캐릭터는 자본주의 사회의 최상층에 있는 인물이다. 마법이라고 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고용주다. 치히로가 우연히 방문한 세계에서는 자본가이자 권력자인 유바바의 말을 들어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도 자본가와 정치인(권력자)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듯이 치히로가 방문한 신의 세계에서도 이런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주요 배경이 되는 온천은 일터를 상징한다. 현실 세계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든 종류의 일터를 축약해 놓은 형태다. 각각의 인물들은 온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기 바쁘다. 여기까지도 만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적나라하기까지 하다.
그런 세계에 치히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하지 않고 무전취식을 한 죄로
치히로의 부모님은 돼지가 되고 만다. 치히로는 부모님을 구출하기 위해 자본주의 세계에 뛰어들지만
그녀에게는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한 핵심적인 욕망인 물욕이 전혀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렇게 치히로는 유바바의 세계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영화 속에서는 이름이라는 소재가 계속해 등장한다. 이 '이름'은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다. 유바바는 치히로의 이름을 '센'이라고 고쳐 부르고, 자신의 본래 이름을 까먹도록 유도한다.
그리고는 일터인 온천에서 직책에 따라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바바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는 '보오'라는 이름으로 개인화시키는 모순점을 보여주고 있다.
온천에 있는 식구들이 다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자신들을 그저 '두꺼비' 정도로 기억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천이라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업무 담당자 중 한 사람이 돼버린다. 한 명의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그저 노동자로 취급받는 것은 자본주의가 만드는 세계의 무시무시한 속성이다. 그렇게 자신을 두꺼비 정도로 인식하게 된 사람들은 그저 '사금'을 얻기 위해서만 열심히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마 할아버지라는 캐릭터가 재밌는데, 이 가마 할아버지는 현실에 순응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변화를 추구하는 캐릭터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잊은 채 자본주의 최하층의 세계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치히로에게 숯덩이들의 일을 뺏지 말라며 경고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치히로를 응원한다.
그는 치히로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기차표까지 마련해 준다. 현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있는 인물로 해석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하나인 가오나시는 탐욕의 부작용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영화 초반 치히로는 쓸쓸하게 지내온 가오나시에게 호의를 베푸는데, 이에 감동한 가오나시는 치히로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금을 가지고 온천에 방문한다. 가오나시가 가져온 금은 욕망을 정통으로 대변하고 온천 직원들은 이에 반응한다. 그리고 가오나시는 이것저것을 닥치는 대로 먹기 시작하는데, 심지어는 직원들까지 뱃속에 집어넣는다.
얼굴 없는 귀신이라는 의미의 '가오나시'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할 때, 무한정으로 허기를 느끼게 되고
이 문제는 치히로에 의해 모든 것을 다시 뱉어냄으로써 해결된다. 가오나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귀신을 의미할 때 탐욕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비유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계속해서 작품에서는 탐욕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본명을 찾게 된 하쿠가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게 된다거나 호화스럽게 사는 유바바와 소박한 집에서 살고 있는 유바바의 언니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영화 초반 치히로의 아버지 역시 일본의 '버블 경제'를 언급하면서 잘못된 자본주의로 인해 망가졌던 일본의 역사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변화'를 강요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치히로 같은 특별한 캐릭터가 나타나 세상을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하기에는 다소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감독이 내면의 순수성을 잘 간직해보자는 의미로 영화를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은 각각 마음속에 소망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아까 언급했던 가마 할아버지도 그렇고, 하쿠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그들이 마음속에 소망을 간직했던 것처럼 현실 속 관객들에게도 10세 소녀 시절의 마음을 품자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비현실적으로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기보다는 각각의 개인이 어릴 적 순수함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자체만으로 바뀌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말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뭐 못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우연히 이 작품을 다시 보게 됐지만 작품 속 말하고자 하는 바와 지금의 내 상황이 너무 닮아서 놀랐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치히로처럼 자유분방한 아이였다. 동물원에서 일하는 사육사가 되고 싶기도 했고,
어디에선가 썼던 것처럼 사립탐정을 꿈꾸기도 했다.
지금도 남들보다 더 꿈을 먹고 산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과거에 비해 많이 옅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몇 번의 좌절과, 몇 번의 작은 실패로 인해 도전을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씁쓸함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와는 반대로 현재에 안주하고, 적당히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차오르기도 한다.
오늘 이 영화를 보며 이를 악물고 조금 더 버텨보자고 다짐했다.
내게 순수함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자그마한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고 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내게 앞으로도 한 번씩 꺼내어 볼 만한 영화로 남았다.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하렴.
-제니바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