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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Jun 02. 2020

무엇을 믿는가?

영화 해석 및 리뷰 < 곡성, 2016 >


할매가 그러는디 그 왜놈이 귀신이랴

영화 속에서 무명(천우희)은 종구(곽도원)에게 똑같은 대사를 두 번 전달한다. 첫 번째는 영화 초반 종구가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의심하는 대목, 두 번째는 무명과 일광(황정민) 중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의 대사는 종구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아마 ‘믿음’의 변화 때문일 거다.


이처럼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믿음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관객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관객은 때로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때로는 주인공보다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감독이 말하는 ‘장르적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끌고 온 감독에게 경이로움을 느낀다. 마치 믿음이라는 단어를 화면으로 담아낸 듯 섬세한 연출을 보여준 나홍진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며 리뷰를 시작하고자 한다.




모호함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에서 모호함은 편집이나, 연출 등의 역량 부족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연출한다고 보는 시각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악마라는 존재의 등장, 오컬트라는 장르적 특성, ‘불완전함’이 감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인 것과도 연관돼있다. 의도적인 모호함은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의 반응이 꽤나 논쟁적인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다양한 생각이 등장하고 그 생각들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것을 유도한 연출인 셈이다. 결국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었던 인간과 현실의 불완전함으로 이어진다.


영화 속 종구와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말 그대로 우연히 일어난다. 일광이 그저 “미끼를 물어분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종구의 가족에게 발생한 끔찍한 사건은 종구의 탓으로 초래된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비극적인 일상일 뿐이다. 나홍진 감독은 자신과 가까운 가족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상황에 대해 떠올리다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말한다. 씨네 21의 칼럼에서도 등장하듯 ‘불완전함’이라는 요소는 이 영화의 기본 속성이고, 악은 특별하다기보다 오히려 평범한 것에 가깝다.




믿음


영화는 종구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플롯을 통해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변화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선역인지, 악역인지가 달라진다. 누가 진짜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종구와 관객의 상황은 동일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면 관객들은 누가 악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마를 악마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종구가 처음 외지인의 집에 방문한 쇼트를 떠올려보자. 종구와 종구의 동료는 외지인의 집을 수색한다. 그러던 중 종구의 동료는 죽은 마을 주민들의 사진이 붙은 제단을 발견하고는 몸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외지인이 마을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든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가까스로 이를 종구에게 말하게 되는 장면이다. 진실을 보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그릇이 매우 중요함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 무명이 처음부터 외지인을 귀신이라고 지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심하는 종구의 모습과도 겹친다. 결국 사실이냐 아니냐 보다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못 받아들이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라는 메시지다. 마찬가지로 귀신에 홀린 효진이 종구에게 “뭐시 중헌디, 뭐시 중헌지도 모르면서”라고 내뱉는 말과도 유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상징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 속에서는 여러 상징들이 활용됐고, 그 상징들은 어떤 의미로든 해석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세부적인 상징들에 대한 의미는 생각하기 나름이고, 그 의견이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여기에서는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상징과 해석을 몇 가지만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외지인과 악마에 대한 생각이다. 나홍진 감독은 일광과 외지인이 처음부터 한 패였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일광의 비싼 굿 비용과, 고급스러운 시계 등은 일광이 돈을 위해 외지인과 협력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외지인은 어떤 존재로 인식해야 할까. 나는 여기에서 외지인이 악마 그 자체라기보다는 악마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존재라고 해석하고 싶다. 처음에는 일광과 비슷하게 악령을 섬기는 인간 무당 정도였지만 악령에 잠식당한 인간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때로는 악령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모습도 갖고 있는 그런 존재로 해석해볼 수 있다.


종구와 종구의 친구들의 추격을 피해 도망가기도 하고,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또 악령으로도 볼 수 있는 지점은 “버럭지같은 놈이 미끼를 삼켜버렸다"라는 표현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종구가 외지인의 인간적인 요소를 해하려 했을 때, 악령이 짙게 배어 나오는 장면이다. 결국 외지인은 악령이지만, 때로는 악령이 아닌, 불경스럽게 표현하자면 신이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기도 하는 예수님과 유사한 존재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영화에서 누가복음이 여러 번 인용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본다) 결국 사실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사실을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는 영화 전체의 주제와 다시 이어지는 지점이다.


다음은 이동진 평론가가 주목했던 양이삼(김도윤)의 역할이다. 양이삼이라는 캐릭터는 가톨릭 ‘부제’라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왜 이런 캐릭터가 필요했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해보면, 현실에만 몰두해 있는 종구와 달리 조금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해서 일 것 같다. 종구는 효진이 낫기만 한다면 외지인이 악마인지 아닌지 관심조차 없을 테지만, 양이삼은 존재에 대한 고민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악마와,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믿는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두 가지에 대한 답변을 동시에 듣는 순간을 맞이한다. 하나는 무명의 존재가 선역인지, 악역인지에 대한 구분이고, 하나는 악마라는 존재가 실존하는지다. 신앙인인 양이삼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충분히 공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악마의 존재를 쉽게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외지인이 성흔을 통해 예수의 형상을 흉내 내려고 해서 양이삼이 머뭇거린 것이 아니라 악마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주저했다고 본다. 결국 현실적 존재인 종구보다 조금 더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양이삼 마저도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믿음의 그릇이 작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종구가 무명의 말을 듣지 않아 집 안으로 들어갔고, 양이삼은 악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 감독은 두 가지의 실패 사례를 병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물


나홍진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들은 재미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바로 공권력을 믿지 못한다는 점이다. <추격자>에서 엄중호(김윤석)는 경찰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김미진(서영희)을 구하러 나선다. 결국 엄중호는 지영민(하정우)을 찾아내고, 직접 그를 죽이려 함으로써 일종의 ‘자구행위’를 시도한다. 마찬가지로 곡성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드러난다. 종구는 자신이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독버섯에 의해 사람들이 미쳐버렸다는 수사당국의 정보를 믿지 못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외지인을 죽이려는 시도까지 하는 것을 봐서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넘어, 법보다는 주먹을 앞세우는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이렇듯 나홍진 감독의 영화 캐릭터들이 공권력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은 캐릭터들이 제도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이삼이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변을 듣는 것도 크게 짐작을 벗어난 일은 아니다. 이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를 볼 때 제도나 시스템 같은 구조보다는 개인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외지인이 악마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닌 것처럼, 무명이  귀신인지 아닌지 역시 중요한 게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 <곡성>은 적극적 모호성을 바탕으로 관객들의 참여를 이끌어 낸다. 관객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사실이라고 인식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공유될수록 영화는 풍부해진다. 악마로 인식하든 천사로 인식하든 인식하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은 공통적이고, 이 행위는 개인의 주체성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에 대한 결과가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요구하면서도 주어진 불확실성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수긍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관객들이 믿는 대상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닮았다. ‘교차편집’처럼 관객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연출 기법이 인상적이다.


"왜 우리를 지켜주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방관할 뿐입니까?" 이 영화를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왜 하필 우리 가족이냐고 반복해 질문하는 종구의 모습도 이와 겹치는 장면이다. 감독은 만들어낸 모호함을 바탕으로 주인공의 입장을 똑같이 전달한다. 하지만 이 물음에도 역시 정답은 없다. 내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신은 우리를 버릴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버린 것이 아니다.


“할매가 그러는디 그 왜놈이 귀신이랴”


무명이 종구에게 건넸던 이 말은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누구를 귀신으로 볼지, 귀신의 존재를 믿을지 하는 것도 결국 ‘그릇’의 크기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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