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스 May 13. 2020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영화 해석 및 리뷰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2018 >


어린 시절, 물질보다는 이념을 좇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돈이 주는 만족감은 순간적이지만 성취가 주는 만족감은 그보다 훨씬 오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때 멋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중하고 있는 대상이 시답잖은 거라 하더라도 그 모습 자체는 충분히 가치 있다고 느낀다.


자연스레 나는 평생 '꿈을 먹고'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해보고 싶은 일은 많고, 평생 새로운 일을 찾아다닐 의욕도 있다.


오늘 소개할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이런 나의 가치관과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감독인 '아녜스 바르다'와 JR이라는 사진작가가 함께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찍은 다큐멘터리다.


50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살펴보면,

그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또 그 모습은 가히 예술적이라고 표현할만하다.




얼굴


작품의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처럼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는 얼굴이다.

JR과 바르다는 사람들의 얼굴을 찍기 위해 여행을 다닌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찍는 순간순간이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


영화 속에서 얼굴은 단순히 신체 부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JR과 바르다가 찍으러 다니는 얼굴은 한 사람의 인생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다른 얼굴을 지닌 것처럼, 제각각의 인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두 사람이 찍는 대상도 천차만별이다. 항만 노동자부터 농부, 광부에 이어 염소의 얼굴까지 찍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든 사진에서 진부한 느낌 없이 고유의 색채가 드러난다.


사람의 인생을 찍으러 다니는 두 사람에게는 비슷하지만 차이점이 나타난다.

가령 바르다가 사람의 순수한 모습을 사랑한다면, JR은 예술적 과장을 선호하는 식이다.

바르다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안경을 벗어달라고 요청하지만

JR은 다양한 구도, 소품 등을 활용해 독특한 모습을 연출하려고 노력한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사랑하는 바르다의 예술적 취향과

창의적인 표현을 통해 인간을 드러내고자 하는 JR이 만나

더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염소의 뿔


이 영화가 특히 재미있는 건 사람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르다와 JR은 염소농장에 방문하게 된다. 그중 뿔이 없는 염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염소를 효율적으로 기르기 위해서 뿔을 태워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반대로 염소의 뿔을 그대로 둔 채로 염소를 기르는 농장 주인도 만나게 된다.

바르다와 JR은 뿔이 있는 염소의 사진을 찍어 어디엔가 붙여 놓는다.


이 장면은 효율성과 생명권이 대립하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감독의 의도에 따라서는 뿔을 태워버린 농장 주인을 악역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뿔을 태워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보여준 뒤, 뿔이 있는 염소의 사진을 찍을 뿐이다.

영화 속에서는 두 농장 주인 모두가 존중을 받는 셈이다.


농장 주인에게 뿔을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은 각자의 삶이 있다.

그들의 인생은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려 받는다.

광부, 농부, 노동자, 지나가는 시민들까지, 그들이 내뿜는 투박하지만 정겨운 에너지가 영화를 가득 채운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과연 우리는 이들처럼 우리의 얼굴을 당당하게 내밀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내가 폐허촌에 살아도, 늙고 못생겼어도, 웃으며 사진기를 마주할 수 있을지.

또 당당하게 나의 집 앞에 내 사진을 붙일 수 있는지.

입장 바꿔 생각해본다면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모습이 매우 부럽기도 하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타인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면 세상은 한층 재밌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놀라게 된 장면들이었다.



JR, 아녜스 바르다


글을 시작할 때 나는 이념을 좇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영화 속 아녜스 바르다의 삶은 내 이상향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다큐멘터리 촬영 당시 할머니였던(2019년에 돌아가셨다) 아녜스 바르다는

JR에게 계속해서 여행을 다닐 것을 제안한다.


안정감을 추구할만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전을 추구하는 그녀의 모습이 매우 인상 깊다.

진심이냐고 되묻는 JR에게 '우연은 최고의 조수였다'라는 표현까지 덧붙인다.

나이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불확실성에 뛰어드는 바르다가 존경스러운 대목이다.


JR도 마찬가지로 인상 깊은 인물이다. 그는 트럭 한대만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준다.

그뿐 아니라 폐건물 등에 사진을 이용한 미술작품까지 만들어준다.

소위 '돈 되는'일이 절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 덕분에 JR의 작품이 붙은 모든 건물들도 개성이 더해진다.


이 두 등장인물의 설명만으로도 영화가 꽉 찬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영상미가 매우 뛰어나다.

사진작가와 영화감독이 함께 만든 작품답게 영상에도 크게 신경 쓴 모습이다.


두 사람이 함께 어디론가 가는 장면, 함께 작업하는 장면들이

아름다운 배경과 함께 어우러져 그림을 보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얼굴을 소중하게 생각하자는 것과, 다른 하나는 열정을 잃지 말자는 것.


내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내 얼굴(인생 혹은 자아)을 잘 간직하고

다른 사람 앞에 부끄럼 없이 드러내자는 메시지가 인상 깊다.


하나는 열정을 잃지 말자는 거다. 바르다와 JR처럼 하고 싶은 일을 꼭 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협한게 아니라 변화한 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