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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Jun 07. 2020

드림걸즈, 한계 극복이 필요해

영화 해석 및 리뷰 < 드림걸즈, 2006 >


"We are a family like a giant tree"


스스로를 가족이라고 부르던 한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가족'은 해체되기에 이른다. 

그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갈등이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이좋고 평화롭던, 이 가족이 해체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타이틀'이다. 

오늘은 이 '타이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드림걸즈


드림걸즈의 시놉시스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노래를 좋아하던 3명의 친구가 가수로서 성공하는 과정과 

중간중간 벌어지는 갈등을 담고 있다.

뮤지컬로도 잘 알려진 이 영화의 스토리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법하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3명의 친구들은 흑인에다, 여성이라는 점이다.

지금 같아서는 그게 왜 주목할만한 점이냐고 오히려 반문하겠지만 

당시의 배경이 '마틴 루터 킹'이 활동하던 1960년대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백인보다 흑인이 낮은 위치에 있다고 평가받던 시절, 

남성보다 여성이 더욱 저평가 받던 시절, 

그 왜곡된 시절들에 선정된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영화 속에서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지점들이 등장한다.

백인과 흑인과의 차별이나, 남녀 차별의 요소들이 대표적이다. 


"누가 이 아빠 무릎 위에 앉을래"라며 저질의 언어를 가사로 사용하는 

흑인 남성 가수가 등장하는가 하면, 무대 출연을 대기 중이던 디나 존스(비욘세)의

엉덩이를 만지는 진행자도 나온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에 대한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백인과 흑인


영화는 겉으로는 가수가 성공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 안에는 백인과 흑인의 대립구도도 숨겨져 있다. 

대표적인 플롯이 '캐딜락 차'라는 노래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에피 화이트(제니퍼 허드슨))의 동생 C.C 화이트(케이스 로빈슨)는 

'캐딜락 차'라는 노래를 만든다. 신나는 멜로디와 얼리(에디 머피)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이 곡은 인기를 끌게 되는데, 백인들은 똑같은 노래 가사에 멜로디만 약간 변형해 새로운 앨범을 낸다. 

흑인의 노래는 표절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던 시기였다. 


더욱 절망적인 건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인데, 당시 홍보를 책임 지던 커티스(제이미 폭스)는 

백인들의 표절에 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뇌물'을 건네는 방법을 택한다.

제도에 대한 불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다음 앨범의 타이틀곡을 '비열하게 살기'로 정하면서 

정당하게 살기보다는 비열하게 사는 것이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드러낸다. 

어쨌든 커티스는 '능력(?)'을 발휘해 얼리의 노래를 성공시키게 된다.


이 장면들을 통해서 감독은  이 이야기가 단순히 성공신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흑인 가수들)에게 차별이란, 당연히 짊어져야 했던 짐이었던 셈이다.  



타이틀


영화는 크게 두 명의 인물을 대조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앞서 능력을 발휘해 얼리를 성공시켰던 커티스와, 에피 화이트다.

전자가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이라면, 후자는 매우 고지식한 인물로 묘사된다. 

커티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면, 에피 화이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둘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타이틀'을 중시한다는 거다. 


에피 화이트는 '메인보컬'자리에 대한 욕심이 컸기 때문에 결국 그룹을 탈퇴하게 됐다. 

커티스의 경우 흑인 최초의 클레오파트라 역할을 디나 존스에게 시키고자 그녀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그 강도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욕망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후 감독은 커티스와 에피 화이트의 문제 해결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두 캐릭터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커티스는 흑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백인의 행동양식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백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오디션을 추구하고, 백인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난다. 또 그래서인지 얼리의 '즉흥 퍼포먼스'나 재즈의 잼과 같은 행동을 반기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은 커티스가 생존을 위해 철저히 백인들의 문화에 적응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기보다는 남이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더욱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성격의 차이로 인해 결국 커티스와 에피는 갈등을 겪게 되는데, 자신의 재능을 그대로 뽐내고 싶어 하는 에피와, 성공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과장이나 수정이 필요하다는 커티스의 의견 충돌이다. 

영화가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커티스는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에피의 노래를 표절하기도 하면서 극단적인 성공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스토리의 진행은 고지식하고 미련하게 보였던 에피 화이트에게 관객들이 동정을 느끼도록 만드는데,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해서 사용되는 장치이지만 딱히 섬세한 설정은 아니라고 본다. 




Listen, 흑인


가수 비욘세가 불러서 매우 유명해진 뮤지컬 넘버인 'Listen' 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그동안 커티스에게 붙잡혀오듯이 살아온 디나 존스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백인의 억압에 저항하는 흑인의 운동처럼, 주인처럼 행동하는 남성에게 저항하는 적극적 여성상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여전히 있다. 


결국 에피 화이트나, 디나 존스는 다른 '남자'의 도움으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백인 남자라는 점에서 봤을 때 자주적인 여성상을 이끌어 내기까지는 어려운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가 단순히 킬링타임용 영화이거나, 듣기 좋은 OST를 제공한다는 점 말고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약간이나마 백인과 흑인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이러한 인종차별 문제는 최근 미국에서 다시 불거지고 있다. 

결국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1960년대의 미국이나,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갈등 상황 이전에 "We are a family like a giant tree"라며 한 가족임을 내세우던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흑인도 같은 국민이라며 흑인을 추켜세우던 미국의 여러 정치인들의 모습은 묘하게 닮아있다. 


영화가 이런 갈등들의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나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서 

약간이나마 답을 찾았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는 각 등장인물들을 한 명 한 명 조명한다. 

오랜 분량을 차지했던 주연뿐 아니라 짧게 나왔던 조연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


어쩌면 '어설픈 헤피엔딩'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 실패 여부와 관계없이 

그저 다른 사람의 모습을 조명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P.S 개인적으로는 'listen'보다 'family'라는 곡이 더욱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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