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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May 28. 2019

영화 알라딘-지위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영화 <알라딘>리뷰



어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알라딘>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때 본 <알라딘>은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귀에 착착 달라붙는 OST와 낯선 문화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어린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알라딘>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최고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예전의 추억과 감동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번에 개봉한 <알라딘>을 보러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이유에서 영화관을 찾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번에 개봉한 <알라딘>은 10년 전 리메이크작이다. 그때는 애니메이션이었고, 이번에는 실사화 버전이라는 것이 달라졌다.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호기심을 가지며 보기도 하였고, 자연스레 옛날 영화와 비교하면서 보았다. 그리고 어렸을 적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보이기도 하였다. 이 글은 어린 내가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다룬 글이다.



1                    

지위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알라딘의 줄거리는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좀도둑이었던 알라딘은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기에는 둘의 신분이 너무 달랐다. 당시 아그바다의 법에 따르면, 공주는 왕자와만 결혼할 수 있었다. 고민하던 알라딘은 우연히 보물 램프를 손에 넣는다. 그 램프에는 요정 지니가 들어있었는데, 지니는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인간을 넘어서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램프의 소유자가 지니에게 세 가지 소원을 빌면, 지니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과 사랑에 빠지게 하는 일만을 제외하고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 알라딘은 지니의 힘을 빌어 왕자가 된다. 사랑하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악한 마술사 자파는 알라딘의 원래 정체를 눈치 챈다. 그리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알라딘을 죽이고 요정램프를 손에 넣을 계획을 세운다. 자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알라딘은 모든 시련을 슬기롭게 넘겨 결국 공주와의 사랑을 이룬다.

"달이 저 탑 위로 오를 때,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라고 말하는 알라딘

알라딘과 자스민의 사랑은 지위를 초월한 사랑의 전형이다. 알라딘은 좀도둑이지만 자스민은 한 나라의 공주이다. 흔히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이름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 반대의 경우를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것에 따르면, 알라딘은 ‘이름 없는 사람’이고 자스민은 ‘이름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분류는 말도 안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정체성을 가진, 누구 못지 않은 존재 권리를 가진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다양한 집단에 대한 대접의 질적 차이를 전달하는 데는 편리하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밟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알라딘도 이러한 수모를 참는다. 그가 실수로 호위병과 부닥쳐 실랑이를 벌일 때 호위병은 이렇게 말한다.

좀도둑 주제에 나랑 싸워보겠다고? 너가 아무리 잘나봤자 좀도둑에 불과해. 너는 평생 내 발끝의 때보다도 못한 사람이지.

호위병의 말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눈살마저 찌푸리게 하지만, 알라딘은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에게 냉담한 인물들, 무례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 적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알라딘이라고 분노하고 싸워본 적이 없겠는가. 그도 어릴 때는 많이 싸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알라딘은 반복되는 모욕에 대해 점차 무뎌졌을 것이다. 그리고 싸웠을 때의 결과가 충분히 예상되었을 것이다. 호위병은 뒤돌아서는 알라딘의 심장에 쐐기를 꽂는 말을 한다.


너는 공주님에 대해서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되.
공주와 대면한 남루한 옷차림의 알라딘

현실에서는, 이렇게 ‘이름 없는 사람’과 ‘이름 있는 사람’이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설사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결혼으로는 거의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지위와 관련 없는 낭만적인 사랑을 꿈꾼다. 나를 볼 때 내가 가진 것이나, 지위를 보지 않고, 내 모습 있는 그대로를 봐주기를 원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외적인 조건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사랑을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나이는 반비례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기 때 절정을 달하고 그 이후로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는다. 우리는 무력하고 벌거벗은 상황에서 부모의 돌봄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한다. 아기는 물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세속적인 보답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아기는 그냥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즉 발가벗겨진 상태의 정체성 자체만으로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나이를 먹어서도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형으로 간직한다. 특히 유년기, 청년기에는 원형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단계이다. 갓난아기 때의 사랑은 아니지만, 나도 어릴 때는 상대방의 외적 조건이나 지위를 거의 보지 않은 채 이성과 교제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어릴 때는 우리 모두 그런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진다. 결혼도 해야 하고, 생계와 현실을 좀 더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순수함을 퇴색시키는 다른 욕망과 기대가 늘어난다. 권력을 탐하기도 하고 타인의 인정을 바라기도 하고 허영심도 늘어난다. 지위가 그 사람의 질을 어느 정도 대변해주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연인의 지위가 높으면 자신의 지위도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연인의 지위가 높으면 자신도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가 연인을 고를 때 타인의 시선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외적인 조건에 일체 좌우되지 않고 우리를 끌어안아주는 관대하고 무차별적인 사랑은 어린아이가 아니면 기대해서도 안 되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부, 권력이나 명성 때문에 누군가를 사귄다고 말하지 않기는 하지만, 우리는 옷차림이나 같이 어울리는 사람, 외모 등을 보고 애정을 제공할지 말지 판단한다. 그래서 어린아이 때의 순수한 사랑은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낙원’같은 것으로,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순수한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의 소망이고, 판타지이다.


<알라딘>은 이러한 판타지를 자극하는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해놓고 있다. 

사랑의 조언자 지니

(1)램프의 요정이자 사랑의 조언자를 자처하는 지니는 알라딘에게 왕자가 아님을 솔직하게 고백하라고 말하면서, 거짓말로 자신을 꾸미는 짓은 그만하라고 한다. 왕자라는 지위는 진짜 자신이 아니며, 본모습대로 살라고 한다. 그런 거짓말을 추구하는 것에는 끝도 없으며 거짓말로 얻은 애정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조언한다. 물론 알라딘은 이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운이 좋아 잠시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지위가 본질적 자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2)지니와 싸우고 난 뒤 알라딘이 부르는 OST는 알라딘의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 

“나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준다면,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텐데. 나는 좀도둑이 아닌데. 그렇지만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3)램프가 있는 동굴의 수호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능력을 가진 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 심안으로만 그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런 자는 진흙탕 속에 보석 같은 존재이다." 

동굴의 수호자

(4)결국에 자스민은 알라딘이 좀도둑인 것을 알고서도 사랑한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연인이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싶은 사람이 보기에 딱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알라딘과 자스민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에게 지니가 나타난다면 무슨 소원을 빌지?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영화가 끝나고나서 돌아오는 길에 자꾸 상상해보게 되었다. 아마 내가 램프를 손에 넣어 지니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진실 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하고 싶다. 과거의 어린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순수한 마음을 계속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면 어긋나버린 많은 관계를 되잡을 수 있을 텐데.



2

자스민 캐릭터의 변화는  '여성의 지위 상승' 반영


지위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지위를 초월한 사랑'이라는 주제와는 별개로 영화를 보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예전보다 많이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의 <알라딘 애니메이션>과 자연스레 비교하는 과정에서, 디즈니의 여성상이 정말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느꼈다. 어릴 적 내가 본 <알라딘>에는 자스민 공주가 술탄이 되고 싶어 하거나, 실제로 술탄이 된다는 설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 <알라딘>에서는 사악한 마술사 자파가 술탄이 되고 난 뒤에, 자스민 공주에게 빨간 옷을 입히고 노예처럼 부렸었다. 이렇게 곤욕을 겪는 자스민 공주를 구해주는 것은 항상 양탄자를 타고 날아 온 알라딘이었다. 그런데 실사영화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다 빠져버리고, 오히려 반대 장면이 연출된다. 자파에게서 램프를 뺏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은 자스민 공주이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올바름은 어떤 종류의 표현에서든,  인종·민족·종족·종교·성차별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말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영화들을 통틀어보면, 이상한 옷을 입고, 쇠고랑을 차고, 남성의 시중을 드는 일은 항상 여성이 도맡아했었다. 왜 여성의 시중을 드는 남자 노예는 묘사되지 않는가. 왜  곤경에 처한 여성을 구해주는 것은 항상 남자인가. 왜 여성은 항상 도움을 받는 존재로 그려지는가. 여성이 항상 약자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편견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난 침묵하지 않아"

<알라딘>은 이러한 편견을 깨려는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자스민 공주가 자신에게 처해진 부당한 대우에 맞설 때마다 부르는 OST에는 강인하고 주체적인 태도가 잘 드러나있다.

But I won't cry

And I won't start to crumble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아

난 무너지지 않을 거야

Whenever they try

To shut me or cut me down

그들이 나의 입을 막고 나를 쓰러뜨리려 할 때마다

I won't be silenced

You can't keep me quiet

Won't tremble when you try it

난 침묵하지 않아

당신은 나를 침묵하게 만들 수 없어

-ost speechless 중

https://youtu.be/mw5VIEIvuMI

특히 ‘침묵하지 않아’는 얼핏 들으면 미투의 구호를 연상시키게도 한다. 미투의 구호 중 하나는 “침묵의 카르텔을 깨자”였다. 이전의 애니메이션에서 그려진 것과는 많이 달라진 자스민의 모습은 여성에 대해 달라진 사회적 인식을 디즈니가 잘 반영했음을 보여준다. 그때보다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었고, 여성의 주체적인 태도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3

'교훈적인 스토리'보다는 'OST'와 '분위기'가 강점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측면에서 위기 극복 과정이 좀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이 최고조로 달하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손에 땀을 쥐고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가진 지니가 맨날 도와주니 실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할 수 있다. 데우스엑스마키나는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데우스엑스마키나에 대해 “이야기의 결말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그 자체 안에서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기계장치와 같은 수단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자파를 ‘빨간 지니’로 만들어 램프에 봉하는 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자승자박’이라는 단어가 딱 맞는데, 권력과 지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 몰락을 자초한 것이다. ‘지위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라는 교훈과 ‘지위를 초월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것 같은데 재미는 없었다.

자파는 사라지고, 뱀만이 남았다...

교훈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토리가 전형적이라는 점에서 <알라딘>은 한편의 설화(일정하고 단순한 구조를 가진 꾸며낸 이야기) 같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과 같은 어렸을 적에 접할만한 단순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스토리 자체는 재미가 없다. 이 영화는 스토리에 강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와 분위기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주제가가 있었지만, 정말 좋으면서 귀에 익은 주제가가 많았다. 귀에 익은 주제가는 추억을 상기시켰다. 영화를 보는 내내 향수에 젖을 수 있었다. 또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슬람 문화권의 이야기는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물론 영화가 의도적으로 실제보다 신비롭게 묘사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를 오리엔탈리즘(막연한 인상에서 비롯된 동양에 대한 서구의 왜곡과 편견)이라고 비판한다면 할 말 없다. 


4.

그래서..결론은?


설화는 그 사회의 모습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단군설화에서 곰과 호랑이는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이라는 두 적대세력을 상징한다고 하지 않는가. <알라딘>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여성의 지위가 상승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 외에, <알라딘>의 흥행에는 좀 씁쓸한 느낌도 있다. 사람들이 ‘지위를 초월한 사랑’과 같은 판타지에 더욱 빠져드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각박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그 사람의 좋은 자질은 외면 받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낭만적인 사랑은 점점 더 자취를 감추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껍데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 좋은 차를 끌고 다니고, 온 몸을 명품으로 두르고, 성형 수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봐야 한다. 어른들이 보면서 옛날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이다. 한때 우리 모두 <알라딘>을 보며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소년, 소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앞으로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상대방의 숨은 보석 같은 면을 보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했던 과거를 반복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점을 느끼게 해줬다는 점에서 알라딘은 아직도 내게 최고의 디즈니 영화로 남아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A Whole New World Awaits...

https://blog.naver.com/tyrion7/221547358818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외로움을 노래하다(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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