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출발~태국 도착 전(1일)
1.
여행의 현실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 기대에 못 미치는 많은 요소들이 있고, 때때로 기대를 넘어서는 환상적인 찰나의 순간들이 여행의 경험을 이루는 것이다. 대체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고 이럴 때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우리의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나 또한 큰기대를 했었다. 2달전쯤부터 지난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나는 여행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행이 어쩌면 따분한 일상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겨졌다. 우연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본 사진이 나를 더욱 자극했다.
이런 사진을 올린 사람들은 어렴풋한 직관을 통해서, 야자나무, 맑은 하늘, 하얀 해변을 보여주는 노출과다의 사진들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회의적이고 신중한 성격인 나조차 사진을 보고 원시적인 순수를 꿈꾸고 여행에 대해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니까. 사진 몇장만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던 나를 돌아보며, 사람의 계획이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또 돈이 많이 드는 긴 여행이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태국 여행을 결심했다.
기대는 출국 당일인 오늘까지 유지되었다. 어제는 아빠가 러시아로 여행을 떠나서 집에 하나뿐인 캐리어를 가져갔다. 그래서 여행 가방 2개에 짐을 나눠가져가려 했다. 그걸 보던 엄마가 너무 거추장스럽지 않냐며, 틀림 없이 활동하는데 불편할 거라며, 가방 하나에 짐을 줄여서 담아가라고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냥 엄마 말을 듣기로 했다. 엄마가 여행 경비를 내주었기에.
줄이고 줄인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보조배터리, 핸드폰 충전기
여권, 주민등록증
반바지3, 반팔 3
수영복
책2권
이어폰
환전한 돈
세면도구
슬리퍼
막상 가벼워진 가방을 메보니,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드디어 떠나는구나.'
일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멀리 갈 수 있지, 라며 제 풀에 신나서중얼거렸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2.
3시에 여행 친구인 L과 만났다. 서로가 사는곳의 중간지점에서 만나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L은 매사에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성이 철저한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여행도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여행 중에 물건이 없어 겪는 불편함은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자신의 준비성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런 성격의 그녀답게, 큼지막한 캐리어를 끌고왔다. 보통 캐리어도 큰데, 그것보다도 더 큰 사이즈였다. 거의 자기 몸만한 여행가방을 끌고 오는 그녀의 모습이 저편에서 보였다. 나와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내 앞에 선 그녀가 물었다.
"너 왜 이렇게 가방이 가벼워?"
"일부러 가볍게 챙겼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야.
"너는 가방 되게 무거워보인다."
"응 너무 무거워. 너가 이따 내 가방 좀 들어줘."
"와, 나한테 떠넘기네."
"떠넘기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거 하나들어주는게 그렇게 어려워?"
"아니, 너 짐은 너가 들어야지. 왜 내가 들어줘?"
여행을 출발한지 불과 몇분 사이에 우리는 수치스러운 막간극에 돌입했다. 유치한 말 다툼이 몇 번 오가면서 서로에 대한 공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성격이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과연 여행을 무사히 갔다올 수 있을까?
말하기 꺼려지는 그 부분을 먼저 건드린 건 나였다.
"벌써부터 웬지 불길하네."
"진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할거야?"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현실은 기대했던 것과 확실히 달랐다. 티격태격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벌써부터 그러는 것은 좀 위험하다. L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캐리어를 끌고 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정류장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버스가 와 주의를 환기시켜주었다.
L은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쫑알쫑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와는 달리 나의 기대와 환상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공항에서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3.
공항에 내린 우리는 비행기 표를 발금받기 위해, 항공사 접수처로 향했다. 접수처로 곧바로 향하는데, 줄곧 줄을 지키던 항공사 직원이 다시 돌아가 기계를 통해 티켓을 발급받아 오라고 말했다. 그 음성이 너무 기계적이라 살짝 당황했다. 이 정도로 불친절할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꼭 티켓이 필요한 거냐고, 그냥 여권으로 하면 안되는 거냐고 재차 물으니까 귀찮았는지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꼭 그래야 한다고 대답했다. 뒤로 돌아가보니 아니나다를까 표 뽑는 기계가 있었다. 표는 쉽게 뽑았지만, 마음이 불편하기는 했다. 기분 상한건 L도 마찬가지였는지, 항공사가 너무 불친절하다고, 요새 공항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길래 이 모양이냐고 불평했다.
이것은 나의 기대를 흔들리게 한 두번째 사건이었다. 상상 속에서는 최상의 서비스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기대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아마 우리가 과대광고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지나친 환상을 품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미소를 띤 직원들이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고객의 요구를 들어주는 광고의 한 장면은 대체로 광고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우리는 이 광고에 세뇌당했다. 우리가 번지르르한 광고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직원들의 입장에서도 좋은 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대와 현실이 다르다고 느낄 때 좌절하고, 가끔씩은 화를 낸다. 항공사 사장은 돈을 버니 좋겠지만, 고객들의 화난 얼굴을 정면에서 대면해야 하는 건 직원들이니까 노조는 환상을 부추기는 과대광고부터 막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직원들의 심정이 이해는 간다. 10시간 이상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그것에 자신의 성격을 죽이는 과정이 수반된다면 누구라도 기계적이고 불친절하게 변할 것이다.
그 직원은 퉁명한 목소리로 L의 캐리어는 무료수하물로 취급되지 않으며, 그래서 돈이 부과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것은 안그래도 불쾌했던 L이 그 소식을 반갑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접수처로 간 우리는 정확한 규정에 대해 알 수 있었다. 15킬로 이상인 짐에는 비행 한번당 7만 5천원의 비용이 부과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L은 왔다갔다 15만원의 비용을 지불해야했다.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은 무료수하물로 취급되었으니, 나는 따로 또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15만원을 아낀 셈이었다. 짐을 줄이고 가방을 가볍게 해서 가져간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다.
4.
기쁨도 잠시, 그 뒤로는 줄을 서고 기다리고, 보안 검사를 하는 지난한 과정들이 이어졌다. 공항 내부로 들어갈 때는 기계에 여권과 지문을 찍고 들어가야 했다. 나는 문제 없이 통과했다. 그런데 L 차례가 되어서 기계가 오작동했다. L이 지문을 네번이나 찍어도 기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옆 통로로 가 직원에게 직접 심사를 받고 나왔다. 기다리던 나는 속에서 조금 짜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공항에 도착하기 전의 내 머릿 속에는 긴 줄이나 까다로운 절차, 고장난 기계의 이미지는 들어있지 않았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흔히 잊곤 하는데, 여행에 대한 환상적인 이미지를 양상하는 인터넷에도 얼마간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의 여행기에서도 상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순화와 선택이 이루어진다. 인터넷 기행문들은 현실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것들을 뭉텅 생략해버린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블로그 글들은 예쁜 곳과 중요한 장소를 찍은 사진들로만 이루어져 있어, 여행 내내 그러한 곳만 다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줄을 선다. 보안 검사에 통과하기 위해 가방을 벗었다 메야 한다. 입국 심사를 위해 1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해야한다. 배 속에서는 점심에 먹은 것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
L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삶 자체도 지난한 과정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다. 삶은 불행하게도 지루하고도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 양식에 따라서, 반복과 엉뚱한 강조와 논리가 서지 않는 플롯으로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망각의 과정을 거쳐서 의미있는 순간들, 중요한 장소, 기쁨을 선사했던 추억만을 기억하게 된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대와 비슷하다. 그래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그 지난한 과정들은 생각나지 않고 한편의 백일몽을 꾼듯한 기분에 휩싸이나보다.
5.
그 뒤로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나는 짜장면을 먹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맛있게 먹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졸업을 위해 읽어야만 하는 책에 대한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바나나 우유를 마시던 나의 의식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책을 떠나 한 두달 뒤 시작하게 될 어떤 프로젝트 심사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그것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있자 L이 말했다.
"이제 그만 출발하자. 가야되."
나는 좀만 더 기다리라고 했지만 L이 짜증을 내었다. 더 기다렸다가는 비행기 탑승에 늦을 것이 불보듯 뻔하다는 거였다. 짜증을 들은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아 그녀에게 차갑게 대했다. 이것이 아까와 같은 말다툼을 불러일으켰고 나는 다시 짜증이 났다.
아무리 좋은 곳으로 떠난다고 할 지라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진다. 이 일을 곱씹으면서 철학자들의 준엄하면서도 비꼬는 느낌이 없지 않은 지혜가 자꾸 떠올랐다. 그들은 번여과 세련으로부터 물러나, 통이나 진흙 속에 살면서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나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좋은 호텔에 묵는다고 해도 잠을 설치면 게스트 하우스에서 깊은 잠을 자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멋진 광경을 보아도, 어떤 일로 기분이 언짢다면 그냥 기쁜 마음으로 여행 전단지를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6.
결국 비행기를 탄 우리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곧 있으면 태국에 도착한다. 아마 태국에 도착하면, 5분 정도 황홀감을 느끼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숙소에 도착해 있을 때는 이미 새벽 2시일 것이고, 그때는 이미 6시간의 비행에 지쳐 녹초가 된 뒤일 것이다.
아마 나는 잠자리에 들며 어떤 소설 주인공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는 결론 내렸다.실제 경험에서는 지난한 과정들 때문에 우리의 기대가 희석된다. 우리는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 현실로부터 끌려나온다. 당혹스러운 심리적, 신체적 요구들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받는다.그냥 집에 눌러 앉아 인터넷에 떠도는 여행 사진을 보거나 얼마 전에 사놓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보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를거라 느끼며 잠이 들 것이다.
[출처] 좌충우돌 태국 여행기(1) 현실은 기대와 다르다|작성자 tyrio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