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서사란 삶의 진실을 담고 있는 텍스트인데, 그 진실은 한 줄로는 요약될 수 없으며 우리가 그 서사에 충실할 때, 또는 서사가 다루는 인물의 내면에 들어가 그 인물에게 오롯이 공감할 때만 터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진실은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거나 우리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갖게 한다. 과연 서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보다 앞서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이들의 답을 참고하려고 한다. 서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쿤데라의 말에서 단서를 찾고, 신형철의 글에서 정의를 시도하고, 알랭 드 보통의 글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각각은 서사에 진실성이 있다는 것을 포착하고(밀란 쿤데라), 그 포착한 진실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름의 답을 제기하려는 시도(신형철)이며, 서사의 의의 또는 효과(보통)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은 인간의 삶과 실존에 대한 앎 또는 인식을 제공한다. 진리를 생산해내는 ‘기계’가 있다면 소설 외에 과학, 철학 등을 흔히 떠올릴 수 있다. 통상적으로는 과학이 진리를 발견하고 생산한다고 말한다. 철학 역시 철학적 인식을 만들어낸다. 쿤데라는 이들과 소설적 인식이 경합 가능하다고 본다. 동등한 자격으로 겨룰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우월하며 때로는 더욱 놀라운 앎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술은 미학 또는 감성학의 영역이며 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근대 미학은 예술을 인지, 이성, 인식과는 거리가 있는 감성의 영역, 감각의 영역으로 제한해놓았다. 쾌감을 갖게 해주는 것, 이렇게 예술을 규정하고 정당화했지만 쿤데라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은 이러한 예술의 한 갈래가 아니다. 소설에는 감각적인 쾌락뿐만 아니라 인식도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 줄 수 있는 앎, 인식이란 무엇인가.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들이 있다.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 어떤 판단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 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에만 겨우 얻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이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신형철이 말하는 ‘이해하려는 시도’는 알랭 드 보통을 통해 ‘공감’이라는 좀 더 쉬운 말로 바뀌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마담 보바리“쇼핑 중독의 간통녀 신용 사기 후 비소를 삼키다”
오이디푸스 왕 “어머니와 동침으로 눈이 멀다”
이런 머리기사들이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여기서 언급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신문들처럼 망설임 없이 선정적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엄숙하고 예의를 갖춘 태도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온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존중을 끌어 모을만한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실패자가 우리에게 고귀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자질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 그들의 창조자나 기록자가 그렇게 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서사는 조롱이나 심판을 삼가는 예술 형식이다. 이 형식의 장점은 파국을 맞이한 사람들-불명예스러운 정치가, 살인자, 파산자, 감정적으로 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 받는 일은 드물다.
어떤 서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 자신의 내면에도 문제를 겪는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 또는 선택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공감은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그들과 같은 재앙에 말려들 수 있다는 느낌에서 유래한다.
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끈다.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모든 어리석은 일은 우리 자신의 본성의 여러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도 최악의 측면과 최선의 측면을 아울러 인간 조건 전체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적당한 아니 엉뚱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 역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러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 공감이 커지면서 마음이 겸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성격상 약점이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아무런 심각한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언젠가 어떤 상황과 마주쳐 무제한의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위력을 발휘하면 자신의 삶도 쉽게 박살나, ‘어머니와 동침으로 눈이 멀다’라는 신문기사 때문에 고통 받는 불행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수치스럽고 비참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신형철은 이렇게 정리한다.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즉 진실에 도달하는 일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한 단어로 어떤 인간을 규정하고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서사 속에서 그 사람이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온전히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즉, 신형철이 말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공감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신형철은 “다시 서사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서사는 언제나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고, 모든 진정한 이해는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 예컨대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신형철의 이 말은 위에 알랭 드 보통이 한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오이디푸스 왕>이나 <마담 보바리>를 한 줄의 머리기사로 요약할 수 없듯이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도 <롤리타>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공감)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