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수형자의 신체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형벌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처벌을 구경거리로 삼던 방식이 소멸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체에 가해지던 구속력이 완화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범죄자에게 가하는 형벌이 일종의 ‘쇼’이자 ‘의식’이며 구경거리였다. 신체형을 당하는 신체는 사지가 절단되고 얼굴이나 어깨에 상징적인 낙인이 찍히고, 산 채로 혹은 죽은 몸으로 구경거리가 되었다. 사형집행의 공개는 폭력이 재연되는 온상이었다. 지금까지 구경거리로 삼은 징벌에서는 막연한 공포가 처형대에서 분출되어, 사형집행인과 사형수 모두를 동시에 에워싸는 분위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그러한 신체는 수십 년 사이에 사라졌다. 형벌에 의한 억압의 중요한 대상으로서의 신체는 소멸한 것이다. 끔찍한 광경으로서의 형벌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형벌 속에 해당되는 모든 구경거리적 요소들은 그 이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형벌의 의식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다음과 같은 이론적인 근거를 갖고 있었다. 재판관이 과하는 형벌의 주안점은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근본 목표는 ‘교정’. ‘감화’, ‘치료’라는 것이다. 죄인을 개과천선하게 하는 기술이야말로 악을 엄정하게 속죄하게끔 하는 방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과거에는 범죄자의 신체에 직접적이고 어마어마한 폭력이 가해졌다. 팔 다리를 자르고 찢고 불태우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형벌 집행은 조심스러워졌다. 수형자의 신체에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손을 대는 경우에는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신체 자체가 아닌 어떤 요소를 대상으로 삼을 것. 물론 금고, 징역, 유형수 징역, 유배, 거주제한, 유형 등도 신체에 제재를 가하는 형벌이기는 하지만, 신체 자체에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방식의 형벌은 아니다. 이러한 형벌에서, 즉 근대적 제도에서 신체는 도구 또는 매개체와 같은 것이 된다. 즉, 신체를 감금한다든지, 혹은 노동을 시킨다든지 해서 신체에 제재를 가하기는 하지만, 그 목적은 개인으로부터 권리이면서 동시에 재산으로 생각되는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것이다. 육체 자체의 고통, 신체 자체의 괴로움을 목적으로 했던 전근대의 형벌과는 구별되는 점이다. 이를 푸코는 ‘감각의 고통을 다루는 기술의 단계’에서 ‘권리 행사를 정지시키는 경제의 단계’로 이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근대의 형벌은 ‘신체를 직접 다루지 않는’ 형벌제도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19세기 초에는 신체형의 거창한 구경거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람들은 신체에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고, 고통을 가하는 극적인 연출을 징벌에서 제외시켰다. 형벌의 간소화 시대에 들어선 셈이다. 물론, ‘기술적 방법’으로서의 신체형에 중심을 두는 것을 지양하고, 재산 또는 권리의 박탈을 주요 목표로 삼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기는 했다. 식사의 제한, 성적 교섭의 금지, 구타, 독방 등의 신체 자체에 관여하는 어떤 종류의 보충적인 형벌을 반드시 수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감금의 ‘의도적인 결과’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필연적인 결과로 보여진다. 완전히 비신체적인 징벌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벌의 강도가 감소 된 것?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다 더 확실한 것은 목표가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가혹한 형태의 형벌제도라 하더라도 그 대상이 이미 신체가 아닌 경우 형벌제도는 무엇에 대하여 힘을 행사하는가? 바로 정신이다. 신체에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처벌의 뒤를 잇게 된 것은 마음, 사고, 의지, 성향 등에 대해서 깊숙이 작용해야 할 징벌이다. 이러한 원칙을 결정적으로 정식화한 사람은 마블리인데, 그는 “징벌은 신체보다는 정신에 가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마블리의 원칙은 단순히 경건한 소망으로 머물지 않았다. 근대의 형벌제도가 계속되는 동안 마블리의 원칙은 형벌의 양상을 결정지었다.
근대에 들어서 범죄자를 재판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정념, 본능, 비정상, 불구, 부적응, 환경 혹은 유전의 영향을 재판한다. 사람이란 공격적 행위에 대해 재판하지만, 그것을 통해 공격적 성향을 재판하는 것이다. 강간을 재판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성도덕의 타락을 재판하는 것이고, 살인행위를 재판하면서 충동이나 욕망을 재판하는 것이다. 즉, 참으로 재판받고 처벌받는 것은 소송 요인의 구성요소들 배후에 있는 그러한 그림자(욕망이나 충동)들이다.
이러한 재판에는 정상참작도 자연스럽게 개입된다. 즉, 재판의 결과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법률적으로 체계화할 수 없는 별개의 사실, 예를 들면, 그 범죄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항,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갖는 평가라든가, 그와 그의 과거, 그의 앞날에 대해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개입된다.
이렇게 그림자를 처벌하면서 법률적으로 체계화할 수 없는 별개의 사실이 재판결과에 개입하는 것은, 징벌이 범법자로 하여금 “법을 존중하면서 생활하고 자기 자신의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고 싶어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인간이 되게 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범죄를 처벌하는 데 있지 않고, 개인을 감독하고 그의 위험한 상태를 제거하고, 그의 범죄적 소질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이루어진 변화를 단 한 번의 조치로 고정시키도록 하는 데 있다. 즉, 과거 형벌의 목적이 왕의 절대 권력을, 범법자의 신체에 폭력이라는 형태로 쏟아부어, 과시하기 위함이었다면 근대 형벌의 목적은 개개인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재판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과거의 재판은 어떤 범죄의 진실을 확정하는 것이며, 그 주범을 규명하는 것이며, 범죄에 법률적 처벌을 내리는 일이었다. -즉, 범죄의 인지, 책임 주체의 인지, 법률의 인지-그런데 이제는 형사재판에 그것들과 전혀 문제가 고려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단순히 “그 사실은 확인될 수 있는가? 그것은 위법인가?”라고 묻기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에 덧붙여서 “그 사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한 폭력이나 살인이란 무엇인가? 환각인가? 정신병적 반응인가? 착란에 근거한 우발사건인가, 도착인가?”가 문제시된다. 이제는 단순히 “범죄자는 누구인가?”의 질문만 할 수 없고 나아가 “범죄자 자신의 어디에 살인의 원인이 있는가? 본능인가, 무의식인가, 환경인가, 유전인가?”가 문제시된다. 이제는 단순히 “어떠한 법률로 이 범죄를 처벌하는가?” 보다는 “가장 적절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가?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의 장래를 어떻게 예견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가 가장 확실하게 교정될 수 있는가?”가 문제시 된다. 범죄자 개인을 둘러싼 평가, 진단, 예후, 규범에 관한 판단의 총체가 형사재판의 골격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범죄자의 정신을 재판의 대상으로 삼는 데 과장된 언어가 사용되고, 이해성이 많은 관심이 기울여지고, 엄청난 ‘학문적’ 열성이 보여지고 있는 것은 범죄와 동시에 그 정신을 재판하기 위해서이고, 처벌하는 데 있어 그 정신을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와 경제와 따로 떼어놓고 이해할 수 없다. 처벌체제의 변화는 그것들이 영향을 받는 생산력의 양식과 관련지어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예제 경제에서 처벌기구의 역할은 보조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고 또한 전쟁이나 교역에 의해서 확보되ᅟ근 노예제와는 별도로 ‘민간인’ 노예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봉건 사회가 되자, 더구나 화폐와 생산력이 거의 발전하고 있지 않은 시대에서는 신체야말로 대체로 사람들이 좌우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므로 신체 중심의 징벌이 급격히 증가한 현상을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상품경제의 발달과 함께 징계시설(구빈원 등), 강제노동, 형벌적인 수공업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화 체계가 노동력의 자유시장을 필요로 함에 따라 강제 노동의 역할은 19세기 처벌기구 안에서 감소하게 되고, 그 대신에 교정을 목적으로 하는 구류가 행해지게 된다. 이렇게 징벌은 당대의 도덕관념이나 법률구조와 엄밀한 대응관계에 있다.
역사 속에서 권력은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었다. 신체에 형벌을 가하고, 그것에 낙인을 찍고, 훈련시키고, 고통을 주고, 노역을 강제하고, 의식을 강요하고, 그것에 여러 가지 기호를 부여함으로서 권력은 신체를 지배하려했었다. 신체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전술은 신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신체가 노동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신체가 강제적 복종의 구조(그곳에서는 욕구도 또한 세심히 배분되고 계량되고 활용되는 정치적 도구의 하나이다) 속에 편입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신체는 생산하는 신체인 동시에, 복종하는 신체인 경우에만 유익한 힘이 된다.
신체를 복종시키기 위하여 여러 과학과 지식이 동원된다. 신체를 통해 원하는 노동력을 산출해내기 위해 신체기능에 대한 여러 지식이 발전하고, 체력에 대한 통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지식은 권력과 별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며 존재한다. 권력은 항상 지식을 창출하며, 지식 또한 권력을 창출한다. 이때의 권력은 미시적인 것으로서, 누구 한명이 독점하는 하나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 전면을 파고드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권력지배의 효과는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