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 주한명예영사단 월례모임이 서울클럽 지리산룸에서 진행됐다. 이번 월례모임에서는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연사로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과 한국의 진로’에 대한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쌍용그룹 상무이사, 제15~20대 국회의원, 제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제9대 산업통상부 장관, 제46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바 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강연에서 현재의 국제 정세를 “불확실성 시대의 복합 위기 상황”으로 규정하며,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와 그 속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외교 전략에 대해 폭넓은 진단을 내놓았다.
“국제 질서, 더 이상 규범이 아닌 힘이 지배하는 시대로”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국내 질서는 법과 공권력에 의해 유지되지만 국제 질서는 그렇지 않다”며 “국제 사회는 UN, WTO 같은 국제기구와 오랜 관행, 규범을 통해 질서를 유지해왔지만 지금은 그 구조가 사실상 무너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지난 80년간 세계 질서를 떠받쳐온 국제기구들이 유명무실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심에 미국, 더 정확히는 트럼프가 있다”며 “미국이 주도해 만든 국제기구를 미국 스스로 무력화하고 있지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존 질서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무질서와 과도기가 겹친 시대”라고 평가했다.
냉전–탈냉전–신냉전… “한반도는 전선 한가운데”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세계 질서의 변화를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설명했다. 1945년 UN 창설 이후 미·소 냉전 체제,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의 탈냉전과 팍스 아메리카나,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한 중국의 부상과 미·중 경쟁을 짚었다.
그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신냉전 구도가 본격화됐다”며 “북중러와 한미일이라는 두 개의 블록이 형성된 상황에서 한반도는 사실상 전선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고 강조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우리가 체감하는 것보다 한반도의 위기 수준은 훨씬 크다”며 “트럼프 2기를 기점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고, 이제는 룰이 아니라 힘이 질서를 결정하는 파워 중심의 세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안미경중은 끝났다… 외교의 다변화·투트랙 전략 필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이 유지해온 ‘안미경중(安美經中)’ 전략에 대해서도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전략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미중 갈등이 극단적으로 심화된 상황에서 한국은 매우 불편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다만 최근 외교 기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최근 정부가 중국, 일본과 모두 대화를 이어가며 협력의 폭을 넓히려는 점은 의미 있는 변화”라며 “과거사와 영토 문제는 별도로 다루되, 경제·외교 협력은 분리해 추진하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중 경제 정상회담과 관련해 “중국의 한국을 대하는 태도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10년 넘게 이어진 한한령 완화 가능성도 긍정적인 신호”라고 평가했다.
“완전한 단절은 불가능… 디커플링 아닌 디리스킹”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글로벌 공급망과 산업 구조를 언급하며 “어느 한 나라가 완전히 혼자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소부장 수출 규제 사례와 중국의 희토류 문제를 언급하며 “서로 얽히고설킨 구조 속에서 완전한 단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북 관계에 대한 우려… “대화 노력은 국익 차원에서 지속돼야”
남북 관계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지금처럼 남북 간 소통이 완전히 끊긴 적은 과거에 없었다”며 “연락선 대부분이 끊긴 상황에서 사실상 관계 단절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는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 앞에서 재래식 군사력 우위는 한계가 있다”며 “핵무장론은 현실적이지 않고 감정적 접근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적대 일변도보다는 대화를 위한 노력 자체를 지속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외교는 초당적으로… 기술·산업이 곧 외교력”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외교 정책에 있어 초당적 협력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국내 정치에서는 싸울 수 있어도 외교만큼은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며 “미국은 미중 전략경쟁 특별위원회를 통해 정권이 바뀌어도 외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은 기술과 산업이 외교의 최전선”이라며 “AI를 비롯한 핵심 기술 경쟁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쟁으로 전환됐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위기는 대개 위기로 끝나지만 대한민국은 여러 차례 위기를 기회로 바꿔온 나라”라며 “산업 경쟁력, 기술력, 방위산업을 바탕으로 한 바게닝 파워, 그리고 민관정 협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1977년 창설된 주한명예영사단은 ‘비엔나협약(Vienna Convention)’에 근거해 세계 각국 정부가 임명한 명예영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명예영사단은 임명국과 한국 간의 관계 증진 및 협력 확대를 위한 민간·공공 외교 활동을 수행하며, 대한민국 국익 증진에도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