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박수는 묵음

방을 하나 얻었다. H의 집, 현관문 바로 앞의 조금은 쌀쌀한 방이다. 작지만 베란다가 있는 이 방은 식물 기르기를 좋아하는 나를 생각한 H의 배려였다. 그와 알고 지낸 것은 꽤 오래지만 서로가 독립적인 삶을 선택하게 된 이후로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오래되었지만 단정하고 깨끗한 옷, 뒷짐 지고 걷는 느린 걸음, 생각을 할 때 손가락을 톡톡, 여기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 수저통에 수저를 꽂는 방향, 청소 주기, 옷을 개키는 방법, 이건 내가 몰랐던 것들. 분리수거 방법,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 잦은 관심과 통제, 앞으로도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원근감을 왜곡했다. 나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해한다는 의미. 다정한 관찰자로서 상대방의 행동과 그 이면의 생각을 맞춰보는 습관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과시이자 증거였다. 한 뼘 사이 거리에서 보는 풍경은 모두 낯설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된 그를,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외출한다. 열차 안 손톱을 깎는 노인이 보인다. 조용한 열차 안을 울리는 손톱깎기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쯤 이윽고 시끄럽게 통화를 시작한다. 수화기 너머는 그의 딸. 들뜬 목소리로 지금 잘 가고 있다고 전하는 노인은 일순 주름지고 고단한 얼굴이 아닌 아이를 보러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얼굴이 된다. 한 사람을 구석구석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미움 없이 사랑만 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저 너머의 달 뒤편은 영영 알 수 없듯이 왜 우리는 사람을 한눈에 볼 수 없을까. 사랑했다가 금세 미워하게 되었던 건 내가 당신의 앞면 밖에 볼 수 없어서, 꼭 그게 전부인 것만 같아서. 돌이켜보면 H와의 기억은 책에 꽂아둔 낙엽 책갈피처럼 납작하고 빛이 바랬다. 시간 사이에 꽂아두었던 H와의 단상들 너머에 존재할 울창한 나무. 모르겠다. 미처 다 알지 못해도 사랑일까. 모든 걸 알지 못해도 미워하는 건 쉬웠는데. 때로는 더 이상 미워하지 못하게 될까 봐 눈과 귀를 닫은 적도 있다.


다시금 H와의 거리를 생각한다. 그에 대해 아는 것들을 나열한다. 모르는 것은 나열할 수 없다. 안다는 건 오해하기 쉽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차라리 낯선 사람인 게 당신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종종 나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침묵을 택했다. 그 침묵은 묵음이다. 고개를 끄덕끄덕. 한때는 그가 소리 내지 않음을 탓한 적이 있었다. 손바닥을 마주쳐야 나아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마주치는 손바닥은 가끔 너무 아팠는데. 적당한 거리로 팔을 벌려 이제 우리는 가짜 박수를 치기로 했다. 묵음으로 짝짝. 그건 우리의 이해, 같이 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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