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와서 가장 기쁜 일이 무엇이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아침 햇살이라고 앞으로는 대답해야겠다. 여름 이후 아직 바꾸지 않은 얇은 리넨 커튼 사이로 가을의 아침 햇살이 기분 좋을 정도로만 노랗게 방을 덥히면 나에겐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안도감과 기쁨이 가득해진다. 이 시간의 가을 햇살은 여름보다 비스듬히 들어와 구석구석방 안을 비춰서, 새벽의 스탠드는 못 본 체해주었던 바닥의 먼지들과 과자 부스러기들이 더 잘 보인다. 눈에 보였으니 하는 수 없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조용히 방을 청소한다. 방 밖에서는 이미 아침을 시작하신 어머니의 커피 내리는 소리와, 아직 꿈나라인 아버지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가 장 부지런한 일을 하기로 한다. 아침 산책이다. 입 모양은 크게, 목소리 작게. 어머니께 공원 한 바퀴를 돌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옷을 따뜻하게 챙겨 입고 문밖을 나선다.
아파트에서 나와 길을 걸을 때도 여전히 가을 햇살이 곁에서 발걸음을 나란히 함께한다. 아침 그림자가 꼭 밤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 곧 겨울이 오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백운역 1번 출구를 지나 조금 걸으면 나오는 부평 공원으로 목적지를 정한다. 집 근처에서 가장 큰 공원으로, 언제 가도 사람이 있어 구경하러 가기 좋다. 가는 길엔 플라타너스가 많은데 며칠 전에는 발에 채던 그 커다란 낙엽들이 누군가의 손길로 치워져 있었다. 깨끗한 거리는 좋지만, 낙엽 밟는 소리는 듣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었다. 백운 쌍굴이라 불리는 굴다리를 지나면 부평 공원의 샛문 앞에 도착한다. 맞은편에는 어울리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가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밤이면 가게 앞에 테이블을 놓고 밖에서 술을 마시는 시끌시끌한 야장 거리이다. 인천이 바닷가 도시임을 증명하듯 밴댕이회와 같은 안주 일체를 판다. 길 하나를 두고 공원과 야장 거리라니 참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며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서부터 시작하여 공원의 오른편은 높은 방음벽이 빙 둘러있는데 그 이유는 너머에 지하철이 다니기 때문이다. 벽에 바짝 붙어 달리는 것 같은데도 방음벽 덕분인지 지하철 소리가 그리 크지 않게들려온다. 쿠궁쿠궁. 지하철 소리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동네와 서먹할 때, 처음으로 백운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계기이기도 하다. 방 창문을 열면 어김없이 들리는 지하철 소리는 대학원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방구석에서 단절된 채 숨어 지냈던 나에게, 잠들지 못해 뒤척이던 새벽 5 시부터 매일매일 외쳐주던 위로였다. 아직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위로.
지하철이 지나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리는 가운데, 공원의 풀밭 곳곳에는 겨울을 나기 위해 통통해진 까치와 비둘기들이 보인다. 두둑하게 오른 살집에도 아직 준비가 모자란 지 아침부터 근면 성실하게 공원에 나와, 질경이와 토끼풀로 가득한 잔디 위로 먹이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들기를 반복한다. 하염없는 목 운동에도 부리가 비어 있는 것 같아 다들 소득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열중한 새들을 뒤로하고 공원 중심을 향해 나있는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샌가 산책길 양쪽으로 각종 운동기구들이 줄지어 있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운동하고 있는 것이 자연스레 시야 안에 들어온다. 그들은 게임 세상 속 NPC 같아서 누군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산책길을 지나다니는 이들과 눈이 마주쳐도 신경 하나 쓰지 않고 제 임무에만 집중한다. 나도 아침산책이라는 내 임무에 열중하기로 한다.
어느덧 산책길은 나무 사이를 굽이 굽이 흐르다가 크고 작은 광장들과 그사이를 잇는 공원 안 큰길과 만난다. 광장 바깥의 낙엽수들은 해가 잘 드는 가장자리의 잎사귀부터 단풍이 서서히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도 나무 옆 해가 잘 드는 벤치마다 삼삼오오 모여 노릇노릇 익어가는 단풍처럼 볕을 쬐고 있었다. 공원의 나무들 중 산수유나 마가목 같은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한 나무들이 있었는데, 으레 버릇처럼 부모님께 외출의 수확물을 자랑하고 싶었던 나는 아직은 덜 익은 산수유 세 알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갔다. 미처 못했던 아침인사를 가족들과 늦게나마 나누며 산수유 세 알을 자랑스레 꺼내보였다. 이것 봐, 아직 가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