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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Jun 12. 2018

당신은 '소시민'인가요?

소시민이라는 분류를 인정한다는 것

친구가 최근에 그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소시민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얼마전에 내가 소시민이구나, 하고 느꼈어."


친구는 교생실습을 나간 학교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그를 신고한 일로 학교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받았다. 이미지가 실추된 것에 앙심을 품은 학교가 친구의 학점을 테러한 것이다. 억울하고 화가나는 상황에서 친구는 교육청이며 장학사에게도 호소해 보았으나, 장학사의 방문에도 학교는 꿈쩍안했고 교육청은 역고소를 당할까 두렵다며 발을 빼버렸다.


"이 일을 겪기 전과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농담조로 이야기했지만, 사회와 제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무너졌을지 드러나는 말이었다. 이 일은 내게도 큰 사건이 되었다. 내가 회사에서 겪었던 일련의 일에 이어, 사회에 대한 관점을 달리 하게 만드는 올해 가장 큰 사건.


소시민이란 뭘까?

꽃잎들은 분명히 빛 아래에 있지만 희미하다

주관적 정의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그래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민이다. 이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분류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자신을 설명하는 정체성의 단어가 되기도 한다. 이때, '소시민'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으로 쓸 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 소시민은 비유적 소시민이다.


"나는 소시민이라서 그런 건 못 해."


농담조로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 소시민은 자신이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소시민은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행동하지 못하거나 소심한 대응만이 예상될 때, 우리는 비유로 우리를 '소시민'으로 규정짓곤 한다.


두 번째 소시민은 결과적 소시민이다.


비유적 소시민이 '힘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원인) 과 '행동하지 않는 것'(결과)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결과적 소시민은 반대다. '행동했으나 그 결과에 대한 절망'(원인)의 결과로, '힘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결과)이 나온다.


친구의 사례를 보자면, 친구 역시 결과적 소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소시민이라고 언급하기까지, 친구는 제도 앞에서 어떠한 계급과 소시민이라는 분류 자체가 있음을 인식하지 않았을테다. 법과 제도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고, 불합리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을 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시도와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실습을 나온 학생이 아니라 이사장의 자제였다면, 높은 재력을 갖추고 소위 말하는 '빽'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소시민이란 비유를 위한 가상의 계급이 아니라, 너무도 분명히 실존하고 있는 계급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을 '결과적 소시민'으로 말한다는 것


이렇듯 결과적 소시민은 소시민이라는 분류의 실존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온다. 이는 비유적 소시민과는 무게가 다르다. 비유적 소시민은 농담에 기반하고 있기에 언제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정할 수 있는 반면, 결과적 소시민은 자신이 소시민이라는 것 자체가 결론이다. 그렇기에 그 계급을 빠져나오기 위한 실제적 행동이 필요하다.


이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세 가지다.


1. 멈추거나,

2. 그 계급을 벗어나기 위한 실제적 행동을 하거나,

3. 계급 자체를 바꾸거나 없애기 위한 실제적 행동을 하거나.


친구는 두 번째 선택지를 택했고, 세 번째 선택지로도 나아가고자 하고 있다.


세 번째 선택지는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


선거를 하루 앞둔 시점,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의심과 불신이 더 크다. 하지만 좌절로 인한 무력감과 불신 한곳에는, 그래도 '언젠가', '조금만 더 내딛으면', 같은 애매한 말로라도 믿음을 남겨두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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