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중학교 시절이 지나고, 나는 결국 원치 않던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낯선 학교로의 첫걸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원서를 넣으러 가던 날, 학교 입구를 찾지 못해 뒷산을 넘어 학교에 들어갔다. 그 버릇은 입학 후에도 이어졌다. 집에서 학교까지 대중교통으로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두발 단속을 피하려 길도 없는 산을 타 고3 교실과 매점 사이로 불쑥 나타나곤 했다. 혹은 PC방에 가기도 했고, 치기 어린 반항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기억에 남는 황당한 사건이 하나 있다. 같은 반 친구가 미니 양주병을 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하루는 발렌타인 21년, 24년, 30년산 미니병을 가져왔다. 친구들은 맛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나는 무슨 객기였는지 남은 술을 다 마셔버렸다. 하필 그날 운동장 조례가 있었고, 키가 컸던 나는 맨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나를 보며 담임 선생님이 의심 섞인 눈초리로 물으셨지만, 끝까지 잡아뗀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선생님께 참 죄송한 일이다.
섬 친구들이 ‘싸움 못 하는 학교 다니는 애’라는 놀림이 듣기 싫어 벌였던 소동도 있었다. 첫 여자친구를 두고 시비가 붙은 친구와의 결판을 위해 친구 한 명을 데리고 나갔는데, 상대는 14명의 상급생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다행히 상대측 누나의 중재로 몸싸움은 면했지만, 비겁하게 사람을 모아 온 그 친구는 학교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후에도 시비가 끊이지 않자 나는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나 친구들에게 ‘학교 앞으로 집합하라’는 소리를 내뱉었다. 실제로 학교 앞에 줄지어 대기한 내 친구들을 본 선배들이 오히려 사정사정하며 사태가 일단락되었고, 그 후로 학교에서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어리고 무모했던 시절의 객기였다.
2학년 때는 큰 사고 없이 지나갔지만, 사춘기가 늦게 온 탓인지 3학년 때는 방황의 정점을 찍었다. 부모님의 이혼이 결정되던 고3 여름방학, 나는 결국 가출을 감행했다. 학교 앞 고시원에 방을 얻었지만, 학교에는 수요일마다 게임 패치로 밥 먹으러 가는 게 전부였다. 선생님들도 나를 ‘미출석’으로 두는 게 관례가 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수요일, 두발 단속과 담배 냄새로 학생 주임 선생님께 뺨을 맞고 교내 청소를 하게 된 사건이 터졌다. 수요일에만 학교를 가던 나였기에 다음날 학교를 가지 않았고,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게 되었다, 나는 교무실에서 학생 주임을 가리키며 “저 새끼한테 뺨 세 대만 맞으면 다시 학교 나오겠다”라고 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내 가정 상황과 아버지의 폭력을 알고 계셨던 담임 선생님은 나를 취업반으로 빼주시는 배려를 해주셨다. 덕분에 더는 학교에 가지 않고도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3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 은인이시다.
어머니의 권유로 졸업 전 면허를 땄고, 고시원을 나와 아버지 집 근처에서 생활을 하다 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예전보다 많이 누그러져 계셨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합격했고, 입학 전까지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의 짧고도 길었던 학창 시절은 막을 내렸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들이 가득했던, 사고도 많고 부족함도 많았던 나의 10대. 그때는 왜 그렇게 어른인 척하고 싶었고, 이미 어른이라 착각했을까. 만약 내가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에 갔더라면, 혹은 그 통지서가 버려지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조금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하지만 이 부끄럽고도 감사한 기억들이 모여 지금의 나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드디어 성인이 된 이야기이다. 물론 사고가 많지만 조금이라도 기억과 추억이 있을 때 기록을 해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