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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간감 Feb 24. 2023

[어땠어요?] 죽음이 아닌 삶을 지켜보라는 전언

<다음 소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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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졸업을 앞둔 고3 학생 소희(김시은 분)은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학생들과 다른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상고에서 애완동물과를 다니는 소희는 대학보다는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죠. 그런 소희에게 담임 선생님(허정도 분)이 기쁜 소식을 가져옵니다. 다름 아닌 굴지의 통신사 콜센터에 소희가 현장학습생으로 가게 된 것이죠. 하청인 걸 뻔히 알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던 소희는 설렘과 긴장을 안고 첫 출근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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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은 두 가지 정도로 보이는데요. 첫 번째 특징은 바로 관찰자적 거리두기입니다. 사회적으로 크게 반향을 일으키며 콜센터 관련 법인 산업보건안전법 개정을 이끌어낸 사건인 17년 전주 콜센터 실습생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관객 모두가 비극임을 인지하고 보게 되는 영화고 이런 소재적 특징은 영화의 무기임과 동시에 위험 요소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 화제가 되었던 HBO 시리즈 <체르노빌>을 떠올리시면 쉽습니다. 영화가 희생자나 약자의 입장에 깊게 들어가는 방식을 취하게 되면 일종의 도덕을 강요하는 정서가 지배하게 되곤 하죠. 이는 관객을 불편하거나 무겁게 만들고 이는 영화가 단순화되는 큰 원인이 되곤 하는데요. 국내외 호평을 받았던 많은 작품들이 이런 함정을 피하기 위해 한 발짝 떨어지는 방법을 택하고 <다음 소희> 또한 그 방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작품의 전반부, 카메라는 충실히 소희의 발자취를 따라가되 결코 쉬이 손을 잡지 않습니다. 강 너머에서 지켜보듯 감정적 거리를 두는 카메라는 관객에게 소희의 삶으로 함부로 발을 들이는 걸 경계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소희와 카메라, 나아가 소희와 관객과의 거리는 그 빈공간 자체로 숨막히는 힘을 발휘합니다. 설명하거나 빠져들기를 원하지 않기에 관객은 소희를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른으로 오롯이 존재하게 되고 그 어른이 알아서 답을 찾아야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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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음 소희>란 작품의 태도가 가장 놀라던 건 다름 아닌 영화적 '재미'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사건이 가진 무거움을 분명 영화는 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소희>는 단어 그대로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다음 소희>란 세계 안에서 영화의 목적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주 철저하게 영화라는 장막 아래에서만 존재합니다. 함부로 내지르거나 강요하지도 심지어 흔해 빠진 권유조차 아주 자제되어 있죠. 전반부는 한 걸음 한 걸음 무너지는 인물을 지켜보는 안타까움으로 서의 재미가, 후반부는 우리 모두 바로 직전에 목격한 비극을 추적하는 수사극으로서의 재미가 굳건히 영화를 받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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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씀드렸던 영화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독특한 구조에 있습니다. 영화는 아주 선명한 목적을 가지고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인물인 소희와 유진(배두나 분)의 이야기를 나눠 놨습니다. 두 동강이란 거친 표현을 써야 할 만큼 영화의 전반부 후반부가 완벽히 나눠져 있고 마치 두 작품을 보는 기분을 들게 합니다. 연극처럼 하나의 막이 끝나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마치 <라이온 킹>에서의 심바의 성장과 무파사의 죽음이 이야기를 구분 지었던 그것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구조는 첫 번째 특징인 관찰자적 거리두기와 함께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관객과 시선을 공유하며 아무것도 모른 채 시니컬하게 거리를 두던 유진은 열정이나 사명감이 아닌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소희의 삶에 한 걸음씩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한쪽 팔은 소희의 손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론 관객의 손을 잡고 이끌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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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때론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법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느껴지는 그 뻔한 제목 <다음 소희>에는 영화의 태도와 다르게 아주 선명한 메시지가 느껴집니다. 다음 소희를 막아 달란 요청이든, 소희의 다음을 지켜야 했었던 후회든 분명한 건 <다음 소희>는 누군가를 똑똑히 지켜보라는 전언에 가깝다 생각합니다. 춤을 추고 거친 숨을 내쉬며 생기를 품었던, 밝게 웃었던, 누구보다 살아있던 소희와 아이들을요. 그 차분한 외침에 저는 온 마음이 흔들렸고,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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