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는 글
바이허니가 터잡은 만화리(萬化里)는 '만물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장은 묵히면 맛이 깊어진다는데, 글도 묵히면 깊어질까요?
집 지을 땅이 있었고, 선생을 그만두었으니 집이나 지으려고 했어요. 그 집 한 편에 작은 다실을 만들어 친구들을 편안하게 맞이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커져 버렸어요.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계획대로 되던가요. 내가 살아온 어제의 결과가 오늘 드러나고 그로 인해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했고 국어 선생을 오래 한 ‘어제의 나’로 인해 집이 아니라 책방 카페를 짓게 되었어요.
선생을 그만두고 책방지기로 사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좋게 보이는 걸까요?
인생은 참으로 길어지고 있으니 지금과는 좀 다른 인생 이모작을 꿈꾸고 싶은 걸까요? 촉이 좋은 K가 책방카페 만들기 과정을 글로 써보자고 꼬드겼어요. 꼬드기는 정도가 아니라 앞서서 내 주변 사람들을 탐문해 가며 글을 죽죽죽 엮어갔어요.
동네책방은 도심에서도 망해나가는데 산골 마을에선 어림도 없다며 고개를 젓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제의 나를 보여주며 내일의 책방카페 바이허니는 잘해 나갈 거라고 설득하고 싶었나 봐요. K는 작가이니 당연히 글로.
K가 작성해온 책의 목차를 보니 용기가 생겼어요. 목차는 집으로 치면 설계도에 해당하지요. 설계도가 좋으니 뼈대와 살은 성실히 써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도, 참 오랫동안 묵히고 있었네요. 책방 카페를 오픈하고 보니 낭만과 여유는 손님의 것일 뿐, 하루하루를 종종거리느라 내 이야기를 쓸 겨를이 전혀 없더군요. 터지는 속을 움켜쥐고 오래오래 기다리던 K,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열흘 쉬어가는 이때를 잡아채었네요.
우리는 함께 동굴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바이허니 별채 북스테이에 스스로 우리를 가두었지요. 아침은 커피와 빵, 점심은 매식, 저녁은 허니 님표 간편식으로 생활을 최소화하면서 쓰고 또 썼어요.
책을 써내는 것은 내 삶의 계획에는 없던 일인데, 오랜 벗인 K 덕분에 이런 삶도 살아보는군요. 지금 쓰고 있는 이 작업이 내일 어떤 모습으로 내 삶에 다가올지 설렙니다.
우리가 동굴에 들어간 것을 아는 지인들은 전화도, 문자도 보내지 않는 걸로 저희를 응원하는군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마음과 손길, 고맙습니다.
아울러 글에 걸맞은 사진을 찍어주신 이성일, 박혜숙, 김진희, 김숙자님. 감사합니다. 책방카페 밴드에 올려주신 손님 분들의 사진도 활용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인사드립니다.
일상에 파묻혀 또 몇 달을 묵힌 원고. 코로나19 확진자가 날마다 1,000명을 넘어서자 정부는 일단 멈춤!을 호소하네요. 내 몸을 지키는 일이 이웃을 지키는 의무가 된 지금, 책방카페도 문을 닫았습니다.
일상이 멈추니 다시 원고를 마주하게 되었네요.
최악의 상황이 가져다준 감사한 여유. 이 아이러니 속에서 글을 마무리합니다.
책방카페, 바이허니에서 보냅니다. 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