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臣下)’는 누구인가?
신하는 임금 즉, ‘군주(君主)’를 섬기어 ‘벼슬’하는 자를 말한다. 신(臣), 신복(臣僕), 신자(臣子), 인신(人臣)이라고도 한다.
‘벼슬’은 쉽게 말해서 ‘관작(官爵)’ 즉, 관직(官職)과 작위(爵位)라고 보면 된다. 관직이나 작위 둘 중에 하나라도 가지고 있어야 벼슬한다고 할 수 있고 벼슬해야 신하라고 할 수 있다.
군주가 있어야 신하가 있는 것이고 벼슬하고 있어야 신하라고 할 수 있다. 군주가 없으면 신하도 없고 벼슬하지 않으면 신하라고 할 수 없다. 섬기는 대상이 군주여야 하며 벼슬하고 있어야 하는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신하이며 두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하지 않으면 신하가 아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신하는 오직 군주국(君主國)에만 존재할 수 있고 공화국(共和國)에는 존재할 수 없다. 관직(官職)에 있는 관리(官吏), 관료(官僚), 공무원(公務員)은 군주국에도 있고 공화국에도 있으나 신하는 오직 군주가 있는 군주국에만 있는 것이다.
부하(部下), 수하(手下)는 직책상 자기보다 더 낮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언뜻 보기에 신하와 비슷해 보이나 확실히 다르다. 부하, 수하는 군주국에도 있고 공화국에도 있으며 군주를 섬기지 않는 자도 해당하는 말이나 신하는 오직 군주국에만 있고 공화국에는 없으며 군주를 섬기는 자만 해당하는 말이다. 부하, 수하와 신하의 가장 큰 차이는 섬기는 대상이 임금이냐 임금이 아니냐는 것이다. 부하, 수하는 신하보다 격이 낮은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임금이 자기 아랫사람을 신하보다 격이 낮은 부하, 수하라고 부르는 것은 썩 좋은 표현이 아니다. 반대로 임금도 아닌 자가 자기 아랫사람을 신하라고 부르는 것은 엄청나게 불경하고 패역한 표현이며 군주국에서 이랬다가는 반역죄로 처벌받는다.
군주국에는 백성이 있다. 군주국에서 군주 이외의 모든 사람은 군주의 백성이다. 백성 중에서도 벼슬하는 자가 신하이다. 군주국에서 벼슬하지 않는 자는 그냥 백성이고 벼슬하는 자는 신하이다. 즉, 백성은 신하의 상위어이고 신하는 백성의 하위어이다. 신하 또한 백성이므로 신하와 백성은 결코 멀리 떨어진 관계가 아니다. 신하와 백성은 그저 벼슬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모든 신하를 신료(臣僚)라고 한다. 신료 중에는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이 있다. 문신은 문관(文官)인 신하이고 무신은 무관(武官)인 신하이다.
모든 벼슬아치를 백관(百官)이라고 한다. 문관은 문과(文科) 출신의 벼슬아치이고 무관은 군적(軍籍)을 가지고 군사(軍事) 일을 하는 관리, 무과(武科) 출신의 벼슬아치이다. 모든 문관과 무관을 문무백관(文武百官)이라고 한다. 잡과(雜科) 출신의 벼슬아치는 기술관(技術官)이라고 한다.
문과와 무과는 과거(科擧)의 시험과목이다. 과거 중에서도 정과(正科)에 속하는 과목은 문과와 무과 두 가지뿐이다. 문과와 무과만이 정과로 취급되었으며 문과와 무과 이외의 모든 과목은 전부 잡과로 취급되었다. 정과가 잡과보다 높게 취급되었으며 문과가 무과보다 높게 취급되었다.
과거가 시행되기 전에도 문관과 무관은 존재했으므로 모든 문관과 무관이 문과와 무과 급제한 것은 아니다. 과거가 시행된 후에도 세습(世襲), 음서(蔭敍), 매관매직(賣官賣職) 등의 과거가 아닌 방법으로 관직을 얻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역시나 모든 문관과 무관이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것은 아니다.
문관과 무관의 업무가 철저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는데 무관이 문관직을 수행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문관이 무관직을 수행하며 군인이 되어 군대를 지휘한 경우는 자주 있었다. 군인 중에는 무관도 있었고 문관도 있었고 관직을 가지지 않은 자들도 있었으므로 옛날에는 군인이라는 직업, 신분이 오늘날보다 더 복잡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나라의 정규군(正規軍)에 속한 군인들은 전부 나라의 공무원이며 옛날과는 달리 업무가 철저히 분리되어 군인이 아닌 공무원이 군인이 되어 군대를 지휘할 수 없다.
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를 ‘공신(功臣)’이라고 한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나라에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면 ‘OO공신’을 봉하고 공신전(功臣田) 같은 특별한 상을 하사했다.
공신 중에서도 최고의 공신은 바로 ‘배향공신(配享功臣)’이다. 배향공신은 태묘(太廟)에 신주(神主)를 모신 공신이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임금이 죽으면 태묘에 신주를 모시는데 그 임금의 생전에 특히 공이 많은 신하를 그 임금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했는데 이렇게 배향된 신하가 바로 배향공신이다. 배향공신이 된다는 것은 후대에 그 공이 엄청난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므로 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영광과 명예를 누렸다. 심지어 배향공신의 자손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감형되거나 면죄되기도 했다.
신하의 유형으로는 ‘육정신(六正臣)’과 ‘육사신(六邪臣)’이 있다.
육정신은 나라에 이로운 여섯 유형의 신하이다. 육정신에는 ‘성신(聖臣)’, ‘양신(良臣)’, ‘충신(忠臣)’, ‘지신(智臣)’, ‘정신(貞臣)’, ‘직신(直臣)’이 있다.
성신은 인격이 훌륭한 신하, 양신은 어진 신하, 충신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忠誠)을 다하는 신하, 지신은 지혜로운 신하, 정신은 녹봉(祿俸)ㆍ하사(下賜)ㆍ증여(贈與) 따위를 받지 않고 법을 받드는 지조가 곧고 바른 신하, 직신은 강직한 신하이다. 이 중에서 충신이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양신은 ‘현신(賢臣)’과 비슷한 말이다.
이름난 훌륭한 신하를 뜻하는 ‘명신(名臣)’은 육정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육사신은 나라에 해로운 여섯 유형의 신하이다. 육사신에는 ‘구신(具臣)’, ‘유신(諛臣)’, ‘간신(奸臣)’, ‘참신(讒臣)’, ‘적신(賊臣)’, ‘망국신(亡國臣)’이 있다.
구신은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고 단지 수효만 채우는 신하, 유신은 아첨하는 신하, 간신은 간사한 신하, 참신은 참소를 잘하는 신하, 적신은 반역하거나 불충한 신하, 망국신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신하이다. 적신은 ‘역신(逆臣)’, ‘반신(叛臣)’과 비슷한 말이다. ‘역적(逆賊)’, ‘반적(叛賊)’은 적신, 역신, 반신과 의미가 비슷한 면이 있으나 역적, 반적은 벼슬하지 않아 신하가 아닌 일반 백성도 불릴 수 있는 말이라 적신, 역신, 반신과는 차이가 있다. 이 중에서 간신이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참고로 충신의 반대말은 간신이 아니라 역신이다.
어리석은 신하를 뜻하는 ‘우신(愚臣)’은 육사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권세 있는 신하를 뜻하는 ‘권신(權臣)’은 그 자체로는 육정신도 아니고 육사신도 아니다. 권신이 자기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행동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육정신이 될 수도 있고 육사신이 될 수도 있다. 권신 중에 임금을 거스르고 나라를 망친 육사신들도 많았으나 무흥왕(武興王) 제갈량처럼 모든 권력을 가지고도 나라와 임금에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한 육정신, 명신도 있었다.
공화국에는 군주가 없으므로 신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화국에도 군주 역할을 하는 자들과 신하 역할을 하는 자들은 존재한다. 공화국에서 군주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들은 그 나라의 국민(國民)이고 신하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들은 그 나라의 공무원이다. 공화국은 국민 하나하나가 모두 나라의 주인이며 국가원수를 비롯한 모든 공무원은 국민의 하인(下人)이다. 사실상 국민이 군주의 위치이고 공무원이 신하의 위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말은 곧 국가원수를 비롯한 모든 공무원은 국민을 군주처럼 섬겨야 한다는 것이고 국민은 공무원을 신하처럼 대하며 잘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화국에서 국민은 자기가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하며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인답게 행동해야 하며 자국의 공무원들이 잘하면 칭찬해주고 잘못하면 쓴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공무원은 자기는 국민에게 고용된 국민의 하인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하며 나라와 국민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하인답게 행동해야 하며 국민을 부모, 하늘처럼 섬기고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공화국에서 군주와 신하는 없으나 국민이 군주나 마찬가지고 공무원이 신하나 마찬가지이다. 국민은 주인답게 공무원이 하인답게 행동하면 공화국의 미래가 창창할 것이고 국민이 주인답지 못하고 공무원이 하인답지 못하면 공화국의 미래가 암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