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로는 인류를 구할 수 없다1
혐오를 혐오하지만, 우린 여전히 혐오한다.
기생충 신드롬이 한반도를 넘어서 전세계를 휩쓴듯하다. 나는 봉준호감독의 성차별적인 시선과 보고나면 찝찝할거라는 주위 사람들의 후기때문에 기생충의 관람을 주저했다. 그러다 영화관에서 막이 내렸고,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서야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하는 호기심이 들어 특별 상영을 통해 뒤늦게 봤다. 영화내내 선에 많이 집중했다. 이선균의 대사에서 직접적으로 많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장면장면마다 선을 연상시키는 유무형의 요소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에게 남은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선'이었다. 선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판단의 기준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선은 타인에 대한 혐오를 가른다. 예를들어 이선균의 가족은 가난의 냄새(말림 무말랭이 냄새,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 등)를 혐오한다. 선을 넘을듯 말듯한 송강호 가족의 냄새에 꺼림칙해하다가 막바지에 이를무렵 대놓고 코를 틀어막는다. 혐오의 경계를 아슬아슬 오가던 감정이 마침내 혐오의 얼굴로 드러난다. 대놓고 싫어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게 바로 혐오다.
최근 나와 남편을 포함하여 주변에 재택근무중인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한 회사들의 재량적 조치의 일환이다. 나는 요즘 일이 많지 않은 시기라 집에서 설렁설렁 일을 하는게 너무 좋은데, 나처럼 재택근무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사람들이 꽤 있는듯 하다. 심지어 친구 한 명은 무급휴직이라 이 상황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 한 단체대화방에 하소연이 쏟아진다.
A: 아 중국인들때문에 이게 뭐야. 집에서 일도 안되는데 회사 가지도 못하고.
B: 내말이. 중국인들때문에 내가 피해자가 되니까 이 상황이 더 화나. 진작 입국금지 시켰어야되는데.
나: 중국인들 입국때문에 이렇게 번진건 아닌것 같던데? 중국에서 입국한 확진자는 4명인가 밖에 안된대. 다 다른 나라나 아니면 국내에서 전파된거래. 입국금지랑 지금 상황은 별개같은데?
A: 중국인들이 춘제인지 뭔지때 와서 다 퍼트리고 갔다던데?
나: 그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잖아.. 확인되지 않은 걸로 무작정 비난하는 건 혐오야ㅠ 그러면 오히려 더 감염자들이 음지로 숨어서 방역에 방해만 된대..
그 뒤로 대화는 주제를 빗겨서 이어졌다. 위에 언급한 대화에서 재량근로중인 친구는 일이 밀리는데 효율이 나지 않아서, 무급휴직 중인 친구는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해서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정을 드러냈다. 그게 혐오라고 말한 뒤로 대화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한 1년쯤 전, 남편과 노키즈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나: 노키즈존은 애들이랑 그 보호자의 대부분인 엄마들을 배제하는 거잖아. 그건 혐오지.
남친: 그게 무슨 혐오야. 무개념 엄마들이 많으니까 안 받는거지.
나: 아니 엄마들이 다 무개념이야? 내가보기엔 무개념 아저씨들이 더 많던데? 근데 노아재존은 없잖아. 상대적으로 엄마랑 애들이 경제력이 낮으니까 쉽게 배제하는거야. 사실 그냥 무개념인 사람들이 있는거지 그렇게 싸그리 엄마들은 다 무개념이라고 일반화하면 안되지. 그건 혐오고 차별이잖아.
남친: 그냥 싫어서 안 받겠다는데 무슨 혐오고 차별이야. 넌 뭐만 하면 여자 남자 편 가르더라?
그뒤로 언쟁은 계속됐고 가을날의 평화롭던 산책이, 냉랭한 싸움으로 끝이났다. 내가 겪었던 위 사례와 더불어 평소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혐오라는 말을 듣기 거북해한다. 특히나 내가 혐오를 하는 주체가 되는 경우엔 거부감이 더 커진다. 다들 아는거겠지, 혐오는 나쁜거라는걸. 하지만 혐오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드러난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혐오가 맞다.
대상을 대놓고 경멸하는 것, 중국인을 바이러스 취급하는 것, 특정한 연령대나 성별을 자유의지로 배제해도 된다고 믿는것, 그것은 모두 혐오다.
우리의 혐오는 구체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혐오는 단지 감정이나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만약 감정이나 생각에만 그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이고, 이렇게까지 사회가 나서서 고민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혐오는 모양이 있고, 표정이 있다. 구체적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인 조건들을 갖추고 있고, 그러니 우리는 혐오문제를 공적으로 다루어야만 한다. 혐오가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 최근에 있었던 여대의 트랜스젠더 여성 입학 반대 사태다. 자칭 래디컬 페미니즘 동아리들은 공동 성명을 냈고, 몇몇 신입생과 재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혔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를 해칠 수도 있는 '남성'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다. 우리를 위험에 노출시키지말라. 두려움의 얼굴을 띄고 있지만, 엄연히 다수가 소수를 배제하는 혐오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별 기준으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의 성을 '남성'으로 규정했다. 좁게보면 트랜스젠더의 여대 입학 반대이지만, 넓게 보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여성이 아니면 누구도 여성이 될 수 없다는 선언과도 같다. 과연 그럴까?
텍스트 속의 납작한 묘사에 누군가의 삶을 가두지 말자. 단일한 정체성에 대해 함부로 상상하는 것은 그만두자. 우리는 동일성이라는 가상의 울타리 바깥의 특별하고도 평범한 모든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페미니스트다. - 2월 5일 유니브페미
여성을 정의하는 기준이 정말로 성기와 염색체 따위라면, 여성의 존재 의의는 자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여성의 범위는 한정지을 수 없고 누구나 가부장제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고 폭력에 대해 발화할 수 있도록 우리의 연대는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 2월5일 부산 캠퍼스페미네트워크 : 캠페미
우리는 특정 공간 안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안전한 세상보다는 우리 사회 어디든, 세상 어디든 안전한 곳을 원한다. 그 세상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이 누려야 할 세상이기도 하다. -2월11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위의 내용은 [가장 보통의 사람]‘누가 여성인가’를 되묻다 에 실린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 지지성명들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선천적인 타고남이라는 생물학적 기준을 기계적으로 들이대는 것은 누군가의 성별 정체성을 '텍스트 속의 납작한 묘사'에만 가두는 것이며, '여성을 정의하는 기준이 정말로 성기와 염색체 따위라면, 여성의 존재 의의는 자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게 된다는 지적은 너무도 타당하고 적확하다. '특정 공간 안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왜 여성들은 한정된 공간에서만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트랜스젠더 여성 한 명을 내쫓는다고해서 그들의 두려움이 해소될까?
그들이 여성으로서 위협을 느끼는 것은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전제때문이다. 그 때문에 여성을 협소하게만 정의해서 되도록 내집단(in-group)을 줄이는 전략이다. 그럼 왜 여성은 여성이 아닌 존재들을 잠재적 위험요소로 느낄까?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왔기 때문이다. 남성은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에 대해 만연하게 폭력을 행사해왔다. 그런 경험칙에 따라 여성들은 여성이 아니면 위험하다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그렇다면 애초에 문제는 여성 혐오다. 여성혐오가 남아있는 한 트랜스젠더 여성을 내쫓는다하더라도 여성은 계속해서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에서 살아갈 것이다. 여성이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여대를 늘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해당 대학 신입생과 재학생들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나아가지 못했다. 설령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혐오가 있다한들, 사회전반의 여성혐오보다 객관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트랜스젠더 여성이 타겟이 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