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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Mar 23. 2020

너희 인생 망가지는 거 반드시 지켜볼게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 공개를 요구한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속은 내내 체해있었고, 매일 저녁 술을 마셨다. 대체로 무기력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리검사와 간이 상담을 진행했었고, 재택근무중이었고, 운동을 다시 시작한데다 나에게 가장 큰 문제인 시부모와는 부딪힐 일이 전혀 없었다. 나의 상태는 지극히 괜찮았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텔레그램 n번방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국민일보의 기사 덕분이었다. 3월 10일이었다. 읽기 시작하고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몸이 떨렸다. 심장이 크게 뛰고, 숨은 가빴다. 끔찍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아니 있을 수 있다는 것 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게 인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세상의 모든 해악이 인간에게서 비롯한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겐 상식과 도덕, 윤리, 일말의 양심 같은게 있다고 믿었으니 활동이란 걸 했을거다. 그런 악의 중심인 인간도 귀한 존재라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인권이라는 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나빠도 인간은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그렇게 말해왔다. 범죄자의 인권? 아무리 잔혹한 범죄의 범죄자에게도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되는 게 문명화된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몰랐던 거였다. 이렇게까지 잔인한 일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어쩌면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기사에 등장하는 피해자는 한 두명이 아니었고, 성인 보다 더 잔인하게 괴롭혀진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아이디를 해킹하고 주변인들을 알아내서 협박했다. 더 잔인한 영상을 가져오지 않으면 주변인들에게 알리겠다, 부모님에게 말하겠다, 선생님에게 알리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남긴 글이나 사진이 엄청난 죄악인 줄 알고, 자신이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른 줄 알고 '죗값'으로 치뤄야 했던 일들이다. 너무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에게 어른이라는 인간들이. 아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수많은 사람이 공유하며 즐거워했다. 합법 포르노라도 즐기는 듯이, '정당한' 대가를 주었으니 당당하게 즐겼다. 그런.. 인간이, 인간들이 있었다. 수도 없이, 많았다.


이 사건을 알고 난 뒤 내 일상은 점점 무너져내렸다. 평소 즐겨보던 넷플릭스 시리즈를 봐도 웃음이 하나도 나지 않았고, 분노만 더 커졌다. 영화를 보고도, 별것 아닌 장면에 금방 울음을 토해냈다. 우울과 슬픔, 분노에 나는 너무 쉽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재택근무가 끝났다. 출근을 했고, 모든 건 제자리에 있었다. 나의 일은 더 늘어있었고, 동료들의 안색도 괜찮았다. 모두가 건강하게 다시 만났다. 거리에 사람이 늘었고, 엘레베이터도 가득찼다. 오가며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늘었다.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나만 빼고. 이런 일에도 세상이 안 무너지는 게 더 화가났다.


하루종일 온라인은 n번방 사건으로 뒤덮였다.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러 들어가면 메인에 걸려있는 기사 5개 중에 3-4개는 n번방 관련 기사였다. 다음카페 인기글에도 달린 댓글마다 n번방 가해자들에 대한 신상공개요구 청원에 동참해달라고 적혀있었다. 페이스북엔 기사가 공유되거나, 청원을 공유하거나, 저마다의 이 사건을 엄중히 다뤄달라는 요구들로 가득했다. 점심시간엔 이 사건 얘기 뿐이었고, 또래 여성들만 속해 있는 2개의 단톡방에선 이 사건에 관한 얘기가 하루종일 오갔다. 오늘 하루에만 나는 환멸이라는 단어를 백번은 쓴 것 같다. 정말이지 환멸이 났다.


오랜만의 출근이라 그런건지, 일이 갑자기 늘어난 탓인지, 어제보다 흐려진 날씨때문인지, 맛이 없던 점심 때문인지, 이 사건 때문인지, 나는 오늘 내내 처져있었다. 일을 하면서 수시로 짜증이났고, 내담자가 조금만 배려 없이 말해도 불같이 화가 났다. 평소 거슬렸지만 넘어갔던 동료의 성차별적 발언을 기어코 지적했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고, 하루종일 단 한 번도 웃지 못했다. 어렵게 일을 마무리하고, 컨디션이 안 좋아보인다는 동료의 말을 뒤로하고 우체국 업무를 보러 짐을 싸들고 나왔다. "우체국 들렀다 퇴근할게요." 등기를 보내고 헬스장에 가려다 집에 물건을 둘 겸 잠시 들렀다. 왜인지 너무 힘이 나지 않아 잠시 앉아 쉬었다. 평소처럼 휴대폰으로 SNS를 열었다. 그리고 나는 침대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나와 주변인들은 SNS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너무 다운되고 무섭고 우울하고 무력감이 느껴져서 집중이 안 된다는 지인의 글을 보고 펑펑 울었다. 이런 끔찍한 기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너무 슬프고 화가났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네요... 일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을 씁쓸한 공감의 댓글을 남겼다. 그리고 부랴부랴 나보다 힘들어할 것 같은 지인의 SNS를 찾아 들어갔다. "충격 많이 받았지? 괜찮아? 너무 끔찍해 정말.. 나는 요즘 정말 괜찮았는데도 이 사건때문에 확 무너져버렸어.. 아무렇지 않게 일상이 살아지지가 않네... 너무하다 세상은 정말." 안부라고 남겼지만, 위태로운 생사확인이었다.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을, 어쩌면 내가 피해자일지도 모를 끔찍한 사건을 마주하는 '젊은 여성'들은 이렇게밖에 서로를 지켜낼 방법을 모른다.


나는 코로나보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더 무섭다. 10만명도 안되는 코로나확진자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고 개학을 미룬다. 개인정보침해임을 알지만 동선을 공개해서라도 확산을 막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최소 26만명이라는 N번방 가해자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인지, 내가 만났던 남자들인지, 동료인지, 윗집사람인지 알 길이 없다. 나는 26만명의 가해자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는 마스크로라도 막아진다는데, 대체 얼마나 거리두기를 해야 그런 인간을 안 마주치고 살지. 사건의 크기에 비해 나란 사람은 너무도 작고, 우리는 너무 무력하다. 고작 신상공개하자고 청와대 청원을 할만큼...


우리나라가 성범죄자보다 경제사범에게  무거운 형을 주는  너무 고의일 것이다. 25명의 13-17 아이들을 강간하고 영상으로 남겨서 돈을 받고 유포시킨 가해자에게 내려진 형벌이 징역 9년이다. 오늘자 신문기사다. 피해자별로 다른 사건으로 보는게 아니라, 강간과 영상 유포를 뭉뚱그려 형을 정했다. 무려 25명의 인생을 망친 인간에게, 9년만에 면죄부를 주는 사회가 텔레그램 사태를 만들고 키웠다. 어차피  지을거면 제대로 지으라는듯이. 강한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알지만, 사회가 문제의 심각성을 떻게 보고 있는지, 우리가   조심하고 살아야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닌가.


"그래도 같이 분노하고 행동하자". 내가 걱정하던 지인이 오히려 날 다독인다. 무력감에 젖어 무너져내리다 겨우 정신을 차려 밥을 넘겼다. 그래, 그럼에도 우리는 방법을 찾아가야지. 26만은 큰 숫자지만,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보단 상식적인 사람들의 수가 많겠지? 우린 택했다. 무력감에 젖어서 환멸을 느끼느니, 희망이 없다고 좌절하느니, 우리가 가진 것들을 더 끌어모아서 제대로 싸워보기로.

#박사방_박사_포토라인_공개소환
#N번방_갓갓_포토라인_공개소환
#N번방_디지털성범죄수익_국고환수
#N번방가입자_전원처벌

#N번방_수익을_피해여성들_재활비용으로  

#릴레이해시태그총공세


더 큰 이슈로 만들어낼 것이고, 죗값을 제대로 묻도록 지켜볼 것이다. 처벌 받는다고해서 그 인간들이 잘못을 인정할 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처벌받는 행동이라는 건 알게해야하지 않을까. 그래봐야 주범자들 외엔 집행유예겠지만, 그래도 잘못했다는 건 알려줘야 '재수 없게 걸릴까봐'서라도 안 하지 않을까. 아니 고작 집유로 끝나게 안 할거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고려한 입법, 사법이 이루어지도록 계속 요구할 것이다. 사회가 좀 더 무겁게 성착취, 성폭력 문제를 다루게 할 것이다.


그러니 멋대로 죽지도 말고, 제 명 다 할 때까지 제대로 죗값 받아라. 쪽팔려서 죽고싶을만큼 손가락질 당해라. 평생을 피해자들이 겪은 것보다 더 큰 공포와 무력감으로 살아라. 세상에 씻을 수 없는 죄가 니가 저지른 죄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 죽어가라. 보고 즐긴 모든 인간들 똑같이 처벌 받아라. 이 세상을 너희 같은 인간들에게 한 뼘도 내주지 않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 인생 망가지는 거 반드시 지켜볼게.


인하공전 학보사 편집국장 조주빈, 박사. 오래 살아.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가진 모든 저주를 퍼부어 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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