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 장마의 전개
오전 10:30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 눈꺼풀이 지그시 들렸다. 비바람이 세상을 휘감는 소리가 들린다.
장마의 끝에 도달했다더니, 아직도 비 소식은 한참이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잠에 더 취해있고 싶었지만, 의식은 명확하게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3d조형 학원을 가는 날이다.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은 보편적이지 않다. 이것이 히키코모리라고 불릴 정도인지는 그 심각성의 정도를 모르겠지만, 일주일에 딱 한번 학원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 빼곤 딱히 나가지 않는다. 딱 한번 나가는 날도 그 한 번이 귀찮아서 나가기 싫은 심정이다. 게다가 비까지 오니, 머리에 지은 까치집처럼 붕 뜬 상태다.
오늘처럼 빗줄기가 거센 날엔 빗소리가 이 세상 소리처럼 들린다. 맑고 투명한 빗방울이 모이고 모여 이런 거대한 현상을 만들어 냈다. 운동화를 신고 가면 신발 속에 자박하게 물이 스며들어가 불쾌할 테니 슬리퍼를 신었고, 빗물이 닿으면 최대한 살결로 맞을 수 있게 반바지와 반팔을 입고 가방에 든 짐을 가볍게 한 후 역으로 향했다.
장마는 예상할 수 없다. 비가 올 땐 갑작스러우며, 일순간 그치기도 했다, 갑자기 다시 전개되기도 한다. 그래서 장마를 읽기란 한 치 앞도 모르는 사람 마음 읽기와도 비슷하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먹구름이 불안 에너지를 시각화시킨 듯 희끄무리한 회색 빛 구름 속에 묵직한 어둠이 자리 잡혀 있다. 어둠은 문명과 자연을 구분 지을 수 없도록 사람들 마음속에 스며들려 한다. 그래서 에어컨을 세게 틀어 습도를 낮추고 실내를 쾌적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나 밝은 led 전등으로 애써 실내를 밝게 비춘 지하철의 풍경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려는 문명의 저항의지가 얼마나 강직한 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합정역에서 당산역으로 가는 길에 지하철은 지상으로 나와 한강철교를 달린다. 시야를 내려 한강을 바라보면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한강물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강물의 물살은 한강이 자연의 것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내뱉는 모양새다. 한강이 그러하다면, 인간은 그 근처를 지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장마라는 현상에서 비롯되었다.
장마로부터 받은 느낌은 긴박함, 갑작스러움, 예상치 못 함정도랄까, 무시할 수 없는 느낌이다. 장마는 그 존재 자체로 작용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나를 무심결에 핸드폰을 켜게 만들었고, 갈 길 잃은 자유의지는 통장잔고를 확인하게 만들었다. 잔고에는 남은 금액이 10만 원도 채 안 남았다. 곧이어 핸드폰 요금납부 청구서가 날아왔다. 한 달 치 미납금액까지 해서 요금은 거의 20만 원 가깝게 큰 금액이 찍혀있었다. 아무래도 생계유지에 빨간불이 들어온 듯싶다.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는 지하철은 위태로운 듯 능청스럽게 운행됐다.
거의 2년 가까이 열지 않았던 아르바이트 구인 어플을 켜게 됐다. 업데이트가 되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고, 바뀌어진 ui나 레이아웃 등이 복잡하게 다가왔다. “이걸 다시 하게 될 줄이야,”
작년에 입사할 때만 해도 다시는 켜지 않을 줄 알았던 아르바이트 구인 어플을 열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약 3년 전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했을 적 써놨던 이력서도 있고, 희망 근무지역을 기록했던 데이터도 그대로 존재했다. 이력서는 조금 수정을 했고 희망 근무지역은 수정하지 않았다. 마포구 인근에서 근무할 것이다. 멀리 이동하면 그만큼 에너지 소모도 클 것이고 그 스트레스는 처음엔 작더라도 점차 크게 다가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금방 취업을 하겠다며 부모님을 설득시켰지만, 3d모델러로서 입사하기까지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기간이 1년 2년 사이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나는 희망직종은 따로 없다. 내 시간과 상황에 맞춰진다면 뭐든 할 생각으로 지역만 설정한 후에 맞춤 검색을 했고, 제일 상단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구인 글이 눈에 들어왔다.
“수요일 목요일 밤 11:00~ 오전 09:00시까지 일하실 분 모집합니다.” 시급 10200원 주휴수당 지급
꽤 괜찮은 조건 같아 보였다. 나는 나름 경력직이다. 대학생 시절 주말마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핸드폰 요금도 냈었고 생활비로도 썼었던 기억이 있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의 장점은 하루 이틀 일하지만 긴 시간을 일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나는 이틀을 일해도 편의점에서 제시한 조건 대로라면 20시간을 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단기간에 바짝 일해서 이틀만 해도 꽤 큰돈이 모인다. 게다가 야간 아르바이트면 학원을 다니면서도 할 수 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필요했지만 절박한 심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별생각 없이 입사지원을 했다.
원래 썼던 이력서에 살짝만 수정하고 다듬고, 경력은 굳이 고치지 않았다. 3년 사이에 공백에 “서울독립영화제 단편영화 부분 상영작 ‘이별 격리’ 편집감독 이력, 모션그래픽 디자이너, 카페 바리스타 경력 등 쓸 게 많았지만,
괜히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봤자 의미 없을 거 같았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에서 “섬세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조화를 소망합니다”라고 이력서 제목을 바꾼 뒤 입사지원을 하는 사이 어느새 교대역에 도착했다. 나는 쏟아지는 빗살을 뚫고 학원으로 향했다. 한두 시간 정도 흘렀을까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작업하는 도중에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나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저 혹시 고유 씨 핸드폰 번호 맞나요?”,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산만함이 전해졌다. 삑삑 계산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소음과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등, 인상이 찌푸러질만큼 산만하고 시끄러웠다.
전화를 건 사람은 편의점 점장이라는 사람이다. 이력서를 잘 봤다며 면접일자를 잡고 싶다고 하셨다.
“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금요일에 면접을 보고 싶습니다.”
“저 혹시 내일은 일정이 안되시는 거죠?”
점장은 나의 대답을 듣곤 떨리는 호흡으로 말을 이어나갔지만, 나를 정확하게 겨냥했다 다급함이 느껴졌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산만하고 분주한 느낌이 들어 이미 가기가 싫어진 상태였는데, 나를 겨냥한 점장의 말과 성급함이 나를 두 손 들게 했다. 마치 살려달라는 사람의 애원 같았다. 그래 뭐 면접을 보고 나서도 내의사에 따라 할지 말지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긍정적으로 대답을 하곤 자리로 돌아가 작업을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 다시 점장의 번호로 연락이 왔다.
“저 정말 죄송한데, 오늘은 면접이 어려우실까요? 오늘 면접 보시고 괜찮으시다면, 오늘 바로 교육 들어가서 내일부터 근무 가능하실까요? 지금 사람이 급해서요, 죄송해요”
점장은 자신의 속살을 있는 데로 드러내고는 나에게 애원했다. 무슨 이런 상황이 다 있나 싶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거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한편으로 드는 몇 가지 생각으로 인하여 망설여졌다. 나의 여유롭지 못한 형편과,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존재, 그리고 내가 필요한 집단을 찾았다는 느낌과 이상하게 필연적인 상황 같다는 직감 정도가 망설임을 유발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알겠다고 답변을 드리고 밤 11시 면접을 보고 12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교육을 받기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통화를 마치고 작업을 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와 보니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변에는 뭐라고 알려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갑자기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이틀씩이나 새벽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니, 가족에게도 비밀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또 친구들한테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학생 때는 이것저것 배우겠다고 아르바이트한다며 만날 시간조차 없더니, 이제 대학교를 졸업해서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한 것 없는 신세라니,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만 괜히 힘만 빠지게 하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닌가, 주변의 기대에 충분히 부흥하지 못한 현실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학원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저녁 8시 저녁밥을 든든히 먹고 어머니에게 사실을 알려드렸다. 어머니의 눈가에 근심의 주름이 고이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아들 잘할 수 있다며 씩씩하고 밝게 그 어둠을 거둬주고 싶었지만, 근심스러운 소식의 중심에 서 있는 못난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마저 헤아릴 그릇이 되지 않아, 썩 좋은 표정을 짓지는 못했다.
한 시간 정도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어머니에게 깨워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눈을 감은 동시에 한 시간이 지나갔다. 몽롱한 상태로 씻고 준비를 마치고 장우산을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버스를 타기 위해 터덜터덜 걸어가다 집 근처 큰 길가 신호등 앞에 서니 비가 그쳤다.
아마 올여름 마지막 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찼는데, 당분간은 비 소식이 없을 듯했다.
버스를 타고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는 내내 몽롱했다. 버스를 타고 편의점으로 향하는 길에 배수관을 보니 빗물에 떠내려가는 누군가의 우산이 눈에 띄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는 찾아왔고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