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A와는 여행지의 사진을 주고받으며 연락이 잦아졌다.
나는 현지에서의 생활과 베트남 여행지 방방곡곡의 생생함을 담아서 전해줬고 A는 한국에서의 일상들과 경험들을 담아서 보내줬다. 때로는 반짝이는 상자에 사진을 담아 이곳에 보내줬다.
이제는 서로를 펜팔친구라고 부른다.
그렇게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2년, 3년을 넘어가던 즈음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코로나. 그로 인해 막혀버린 타국과의 항공길은 서로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틈틈이 익혀둔 베트남어로 원하는 곳을 가이드를 해주겠다는 초대장은 점점 빛이 바래갔고 한국에서의 약속들 또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아쉬움 더불어 연차와 경험이 쌓일수록 늘어가는 업무, 그리고 해외라는 특수성 때문에 답답함이 쌓여 볼멘소리를 하던 중 우스갯소리로 이런 얘기를 나누게 된다. 본인 집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사람을 구하고 있다며 정 힘들면 오라는 얘기.
처음에는 서로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물밀듯이 몰려오는 일에 허우적댈 때면 이따금 농담으로 내가 거기 들어가면 안 되겠냐는 장난 섞인 대화들은 점점 무게가 실린다. 당시 A가 얘기한 일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회사의 현장업무였다. 현장에서 전기와 기계를 다뤄야 한다며 너는 힘들 것 같다는 얘기에 나는 반색하며 나의 장점을 일장 연설했다. ’ 반도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나의 기계음 섞인 pt와 함께. 반쯤은 농담 섞인 어조로 정 생각이 있으면 한국 와서 다 같이 보면서 얘기하자는 것으로 서로 간에 일단락 마무리 되었다. 이 책갈피 같은 기억은 업무가 힘들 때면 내게 도피처가 돼주었다.
가벼운 농담은 일이라는 침울을 빨아들여 점점 무거워진다. 그렇게 베트남거주 5년 차가 되기 전 나는 결정을 내렸다. 이곳을 그만두기로.
그만두기까지는 여러 일들이 있었다. 사측에서는 보다 좋은 조건을 내걸며 여러 차례 면담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내용이었고 나는 이게 내가 가야 할 다음 계단이라고 생각했다.
졸업식에서 서로 간 정듦에 아쉬워하며 눈물을 보여도 결국 뒤돌아 자기 길을 가는 건 당연하다. 그렇기에 누구도 졸업이 싫다며 학교에 머물지 않는다.
마침내 동료와 선임들의 아쉬움 섞인 응원을 받으며 한국에 왔다.
그렇게 다시 온 한국
이제는 코로나가 많이 안정화되었지만 격리기간이 있었기에 2주간 격리를 했다.
이 시간은 마치 군대를 전역 후 잠시 떠있는 시간 같았다. 전역자들은 대게 공감할 것이다. 복무 중에는 전역만 하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으리라 생각했다가도 막상 나오면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을.
그런 현실을 방증하듯 누구를 만나거나 별다른 외부활동 없이 집에 박혀 자격증공부와 읽을만한 책을 뒤적거리는 게 전부였다. 출소까지 2주의 기다림은 쉽지 않았다.
짧지만 긴 격리기간을 보내고 A를 만나 고대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모든 주제는 화수분이 되어 늘어만 가는 이야기들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한없이 빨리만 가는 시간들은 야속하기만 하다.
마침 불어오는 봄바람 간질간질한 마음들은 새싹처럼 자라난다.
만개한 꽃들 사이로 따스한 바람을 느끼며 이 순간을 담는다.
그리고 A의 부모님을 만났다.
거부감은 없다. 이미 A의 부모님과는 수년 전부터 여러 번 뵈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자취하면서 계절반찬이나 과일청과 같이 무심히 보내기 좋은 것들을 이따금 만들어서 보냈었고 A 없이 따로 만나서 밥을 먹으러 가거나 쇼핑을 함께 할 정도로 위화감이 없는 사이였다.
업무 얘기를 핑계 삼아 A를 포함한 A의 가족들과 나는 자연스레 자주 만났다. 소소하게는 화단과 텃밭을 가꾸고 때로는 쇼핑이나 여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시간들은 내가 녹아들기 충분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3달간의 인터미션은 그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얘기들을 나눴고, 결국 A의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나와 A의 관계는 비밀로 하는 조건을 걸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