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의 귀환과 성벽 재건
성경연구주석 구약
■ 주석가 ㅣ 레스터 그랩 (Lester L. Grabbe), 유대교 역사 및 히브리 성경학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오게 된 과정과 초기 활동 (느 1:1-3:32)
배경 및 문제 제기 (1:1-3)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기원전 465-424년경)를 섬기던 관리였습니다. 기원전 445년경, 그는 수산 성에서 왕의 술 관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최고위직은 아니었으나 왕을 가까이서 만날 기회가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그의 형제 하나니와 다른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성벽 훼파, 성문 불탐, 백성들의 환난과 능욕)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이야기의 중심 문제로 제시됩니다.
느헤미야의 반응: 기도 (1:4-11)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크게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의 죄를 고백하고(에스라의 기도와 유사하지만), 왕에게 나아가 도움을 구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왕에게 나아감과 허락 (2:1-8)
소식을 들은 지 약 4-6개월 후[기술르월(11/12월)에서 니산월(3/4월)까지],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수심 가득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왕이 이유를 묻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설명하며 그곳으로 가서 성을 건축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은 느헤미야의 요청을 허락했습니다. (이때 왕후가 왕 곁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에스더와의 관련성 등 흥미로운 추측을 낳습니다.)
공식적인 파견 및 여정 (2:7-10)
느헤미야는 단순히 귀환 허락뿐 아니라, 총독들에게 보내는 조서(안전 통행 보증)와 성벽 및 자신의 거처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받기 위한 조서를 요청하여 받았습니다.
에스라와 달리, 느헤미야는 왕이 보낸 관리들과 기병대의 공식적인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지위와 임무는 유다 지역의 관리였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즉각적인 반감과 경계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를 잠재적 정치 경쟁자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도착 및 비밀 정찰 (2:11-16)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즉시 성벽 재건 계획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중에 소수의 사람만 데리고 몰래 나가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의 상태를 직접 조사했습니다.
이는 그가 예루살렘의 기존 지도자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계획이 방해받을 것을 염려했음을 시사합니다.
성벽 재건 독려 및 시작 (2:17-3:32)
정찰 후, 느헤미야는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의 비참한 현실을 상기시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셨으며 왕이 허락했음을 알리며 성벽 재건을 독려했습니다. 백성들은 이에 호응하여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제사장, 레위인, 귀족, 평민, 심지어 여성들(3:12)까지 참여하여 각자 구역을 맡아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집과 가까운 구역을 맡았고, 예루살렘 외부 지역 거주민들도 참여했습니다.
[느3:12] 그 다음은 예루살렘의 반쪽 구역의 책임자이며 할로헤스의 아들인 살룸이 자기 딸들과 함께 보수하였다.
이 명단은 후대에 어떤 가문이 재건에 기여했는지 알리는 중요한 기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협력한 것은 아니어서, 드고아의 귀족들처럼 참여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3:5).
[느3:5]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이 보수하였는데, 그들 집안의 어떤 유력자들은 공사 책임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술 관원으로 일하던 중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기도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의 허락과 공식적인 지원(조서, 호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도착 후에는 비밀리에 상황을 파악하고 백성들을 독려하여 조직적으로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외부의 반대와 내부의 비협조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참고서적
『IVP 성경연구주석 구약』 고든 웬함, 존 골딩게이, 로널드 클레멘츠 외 지음, 2023,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