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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깊이 파고드는 쇼팽의 선율, 영화 ⟪리얼 페인⟫

by KEN

상실을 다룬 영화는 많지만, ⟪리얼 페인⟫(A Real Pain)처럼 음악과 여행, 그리고 인간관계를 섬세하게 엮어낸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감독이자 주연을 맡은 제시 아이젠버그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로드 무비 이상의 깊은 정서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마치 쇼팽의 피아노 선율처럼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감정의 여정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떠나는 여행


영화의 출발점은 한 통의 부고 소식입니다.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런 컬킨)는 폴란드로 떠나는 여행길에 오릅니다. 두 사람은 유태계 미국인으로, 이번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할머니의 뿌리를 따라가며 가족의 역사와 기억을 되짚어보는 애도와 회상의 여정입니다.


데이비드는 이성적이고 조심스러운 반면, 벤지는 충동적이고 감정에 솔직한 인물입니다. 이 둘의 대조는 여행 내내 다양한 갈등과 웃음을 만들어내지만, 그 안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각자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감싸는 쇼팽의 음악


⟪리얼 페인⟫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쇼팽의 음악입니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녹턴 2번 내림 마장조」(Nocturne No. 2 in E-Flat, Op. 9, No. 2)가 흘러나오며, 관객은 이 영화가 단지 이야기만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직감하게 됩니다. 쇼팽의 음악은 배경이 되는 폴란드의 풍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각 장면에 정서적 깊이를 더해줍니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곡은 「녹턴 20번 C샤프 단조(Op. posth.)」입니다. 이 곡은 영화 예고편에도 삽입되었고, 주요 장면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내면의 동요를 절묘하게 표현해 냅니다.


또한 「에튀드 Op.10 No.3 ‘Tristesse(슬픔)’」는 영화의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대변하며,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 외에도 에튀드, 녹턴, 왈츠 등 다양한 쇼팽의 대표곡들이 사용되어 음악이 곧 영화의 언어가 됩니다.


※ 영화에 사용된 쇼팽 곡 목록
영화에는 주로 피아니스트 트즈비 에레즈(Tzvi Erez)의 연주 버전으로 쇼팽의 다양한 곡들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녹턴 (Nocturnes):
- Op. 9: No. 1 (내림 나단조), No. 2 (내림 마장조), No. 3 (나장조)
- Op. 15: No. 1 (바장조), No. 2 (올림 바장조)
- Op. 37: No. 2 (사장조)
- Op. 55: No. 1 (바단조)
- Op. posth.: No. 20 (C샤프 단조)

에튀드 (Etudes):
- Op. 10: No. 1 (다장조), No. 3 (마장조 '슬픔'), No. 4 (올림 다단조)
- Op. 25: No. 1 (내림 가장조 '하프'), No. 3 (바장조)

왈츠 (Waltzes):
- Op. 18: No. 1 (내림 마장조 '화려한 대왈츠')
- Op. 64: No. 1 (내림 라장조 '강아지 왈츠')

프렐류드 (Preludes):
- Op. 28: No. 19 (내림 마장조)

발라드 (Ballades):
- Op. 38: No. 2 (바장조)


쇼팽과 두 사촌이 공유하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


이 영화에서 쇼팽의 삶은 단순한 배경 요소가 아니라, 두 주인공의 감정과 맞닿아 있는 상징적 장치로 사용됩니다. 실제로 쇼팽은 조국 폴란드가 혼란 속에 빠졌을 때, 그리움을 품은 채 해외에서 외롭게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음악에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갈망과 정체성의 혼란이 담겨 있었고, 영화 속 인물들도 그러한 감정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두 사촌은 서로를 통해, 그리고 폴란드라는 공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 가족의 역사, 상실의 의미를 새롭게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 개인과 집단, 감성과 이성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감정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세련되면서도 동떨어진 정서의 미학


감독 제시 아이젠버그는 인터뷰에서 영화의 톤을 “세련되면서도 뭔가 동떨어진(ironic yet sincere)” 분위기로 설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감정 과잉 없이도 충분한 여운을 남깁니다. 유머는 있지만 가볍지 않고, 음악은 감정을 부추기기보다 정리해 줍니다. 그리고 그런 정서야말로, 오히려 더 오래 남는 감동을 줍니다.


⟪리얼 페인⟫이 주는 진짜 위로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머릿속에서는 쇼팽의 피아노 선율이 계속 울려 퍼졌습니다. 어떤 위로는 말보다 음악이, 어떤 감정은 설명보다 여행이 더 잘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리얼 페인⟫은 ‘힐링 무비’라는 표현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영화입니다. 상실과 애도의 시간을 거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묻습니다. 복잡한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낸 이 영화는, 진정한 의미의 ‘감성 로드 무비’이자 음악으로 감정을 전하는 시적 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 IMDb, A Real Pain (2024) – 영화 개요

- 롤링스톤 코리아 – 영화 속 쇼팽 음악 사용 관련 기사

- IndieWire –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 인터뷰 (2024.01.23)

- Grove Music Online – 프레데리크 쇼팽 관련 정보

- YouTube 및 Reddit – 예고편 음악 및 사운드트랙 정보

- 베르나르 가브리엘 펠트만, 『쇼팽, 음악으로 쓴 편지』

- The Playlist, The Hollywood Reporter – 영화 평론 참고


영화감상

- 〔 Disney+ 〕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이 티저에는 ⟪Études, Op. 10: No. 1 in C Major⟫가 연주됩니다. 역시 Tzvi Erez의 연주입니다.


⟨부가 기록...⟩

영화 중반부가 좀 넘어선 레스토랑 장면에서 벤지(키에란 컬킨)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은 쇼팽의 곡이 아닌 'Tea for Two'일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몇 번인가 되풀이해서 듣고 비교해 봤습니다만....

제 판단은... 'Tea for Two'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이 곡은 엘라 피츠제럴드, 냇 킹 콜 등 수많은 아티스트에 의해 커버되어 재즈 스탠더드로 자리 잡은 곡입니다만, 원곡은 뮤지컬곡이라고 알려졌습니다. ⟪No, No, Nanette⟫라는 작품인데, 별도의 기회가 되면 이 뮤지컬도 리뷰해 보도록 하죠.


참고로 'Tea for Two' 제목의 유래에 대한 짠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8세기 영국 거리 상인들이 차 한 주전자를 두 펜스에 판매하며 외친 문구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요.

영화에서는 이 곡의 연주가 분위기를 바꾸는 계기를 이룹니다.

자세한 사항은 영화를 보시면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행복한 감상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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