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
성서의 형성사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서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서의 창세기부터 열왕기서까지의 기록이 과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른바 '최소주의자(minimalist)'와 '최대주의자(maximalist)' 간의 입장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며, 이는 고고학과 문헌학을 아우르는 역사학적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 즉 “과연 ‘유대인’이라는 민족은 실재했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한 저서를 중심으로, 그 주요 주장과 관련 학계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이후의 성서학 및 고대 근동사 연구에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으리라 판단되었습니다.
이 글은 학습자의 시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다소 제한적이고 얕은 관점일 수 있겠으나, 비판적 독서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바람으로 이 검토를 시작합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저서
2008년 히브리어로 출간되어 무려 19주간 이스라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격렬한 논란을 일으킨 슐로모 산드(Shlomo Sand)의 『만들어진 유대인』(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은 현대 유대인 역사학에 깊은 도전장을 내민 문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텔아비브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정 출신인 저자는, 유대인의 기원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오랜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유대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민족주의 담론 속에서 '발명'된 구성물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근본적이다. 과연 '유대인'이라는 민족은 실재했는가? 그리고 2천 년간의 디아스포라와 고향 땅으로의 귀환이라는 서사는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근대의 산물인가? 산드의 대답은 단호하다. 유대인은 혈연적 민족이 아니라 종교 공동체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유대 민족'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독일 유대인 지식인들이 구성해 낸 사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역사 해석의 차원을 넘어, 현대 이스라엘의 정치적·이념적 정당성, 팔레스타인 문제, 나아가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본 검토는 이처럼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저작을 관련 자료 등을 참조(AI 활용)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이 관련 학계와 특히 유대인 사회에 미친 반향과 그 학문적 함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저자와 저서 개관
슐로모 산드는 1946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태어나, 1948년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정의 일원으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는 파리에서 현대 유럽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2년부터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주로 20세기 유럽 지식인사와 프랑스사를 연구해 왔다. 흥미롭게도 산드는 고대사나 유대인 역사를 전공한 학자가 아니라, 현대 유럽사 전문가로서 유대인 역사 서술에 도전장을 내민 인물이다.
그는 이 점을 스스로 인정하며, “나는 프랑스와 유럽의 역사가이지, 고대사 전문가는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 역사를 다루는 데 대해 이스라엘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작업은 세계 학계의 표준적인 역사 연구 개념에 익숙한 역사학자가 맡아야 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시도를 정당화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대학들은 1930년대부터 일반사와 유대사를 분리해 교육해 왔으며, 그 결과 유대사 전문가들은 현대 역사학의 흐름에서 고립된 보수적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만들어진 유대인』의 히브리어 원제는 “언제, 어떻게 유대 민족은 발명되었는가?"로, 제목 자체가 저자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 책은 고대 성서 시대부터 현대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의 역사 전체를 재검토하고 있다. 2009년에는 영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이후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논쟁의 장을 확장시켰다.
산드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이중적 목적”이 있다고 밝힌다. 첫째는 “이스라엘 시민으로서 이 나라를 민주화하고 진정한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함”이며, 둘째는 “유대인 본질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유대인 본질주의'란 “현대 유대교에서 공통된 민족성을 신앙의 기초로 삼으려는 경향”을 지칭한다. 산드는 이러한 관점이 “위험하며 반유대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고 비판하며, “역사와 현대 사회 속 유대인의 존재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 강연 영상 : Shlomo Sand - 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
핵심 주장 정리
유대 민족 개념의 근대적 발명 (제1장, 제2장 참조)
산드의 가장 도전적인 주장은 유대인이라는 민족 개념 자체가 19세기에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19세기 독일의 유대인 출신 지식인들이 독일 민족주의의 민속적 성격에 영향을 받아 회고적으로 한 민족을 '발명'하는 임무를 스스로 맡았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 하인리히 그레츠(Heinrich Graetz)부터 시작하여, 유대인 역사학자들은 "왕국이었다가 방랑하는 민족이 되었다가 궁극적으로 돌아서서 고향으로 돌아간 민족의 역사로 유대교의 역사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유럽의 다른 민족주의 운동들과 유사한 패턴이었다. 이들은 모두 "역사의 시작부터 분리된 민족으로 존재해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과거의 황금시대라는 확신을 찾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황금시대를 "신화적인 다윗 왕국"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명 이전에는 유대인들은 "공통된 민족적 배경이 아니라 공통된 종교를 공유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유대인으로 생각했다"고 산드는 주장한다.
유대인 추방의 신화 (제3장 참조)
산드의 두 번째 주요 주장은 로마 제국에 의한 유대인 추방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재 이스라엘 영토와 그 주변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강제 추방에 대한 연구를 찾아보았지만, 그러한 문헌을 전혀 찾을 수 없어서 놀랐다. 유대인의 추방이 유대 역사의 구성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산드에 따르면,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대규모로 추방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신화이다. 로마인들은 실제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 땅에 남아있도록 허용했으며, 추방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유대인들을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도들은 이 사건을 "유대인들이 기독교 복음을 거부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도들은 후대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이 신으로부터 징벌로 추방되었다고 믿기를 원했다"고 썼다. 이후 7세기 아랍의 팔레스타인 정복 이후, 많은 현지 유대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아랍 정복자들 사이에 동화되었으며, 이들 개종자들이 바로 현재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결론지었다.
유대교의 선교적 성격 (제4장 참조)
산드의 세 번째 핵심 주장은 유대교가 역사적으로 적극적인 선교 종교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교는 폐쇄적이고 개종을 거부하는 종교로 인식되어 왔지만, 산드는 이것이 잘못된 통념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유대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원래 선교 종교였으며, 하스모니아 왕조의 헬레니즘 영향 하에서 대규모 개종이 시작되어 4세기 기독교가 지배적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드는 지중해 일대와 다른 지역에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타난 것을 설명한다. 그는 "기독교도와 무슬림 대부분이 최초의 기독교도나 무슬림의 후손이 아니라 개종자들의 후손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개종자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코카서스의 하자르족,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 부족들,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히미야르 왕국에서 유대교로의 대규모 개종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시온주의와 귀환 서사 (제5장)
산드는 또한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시온주의 탄생 이전에는 유대교에 낯선 개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성지는 "거주할 곳이 아니라 그리워할 곳"으로 여겨졌으며, 2천 년 동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멀리한 이유는 "메시아가 올 때까지 돌아가는 것을 종교가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중동부 유럽 유대인들의 조상이 중세 투르크계 하자르족의 유대교 개종자들에게서 크게 유래했다는 아서 코에슬러(Arthur Koestler)의 1976년 저서 『13번째 부족』의 이론을 지지한다.
방법론적 문제점 검토
산드의 저서에 대한 학계의 비판은 주로 그의 방법론적 결함에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마이클 버코위츠(Michael Berkowitz) 교수는 이 책을 "진정한 학술 작업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비판하며, "부실하고, 무계획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잡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아카이브 연구에 기반하지 않았으며, 산드가 자신의 논제에 의존하고 있는 많은 2차 문헌들을 완전히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히브리 대학교 인문학부 학장인 이스라엘 바르탈(Israel Bartal)은 더욱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산드의 주장을 "기이하고 비일관적"이라고 불렀으며, "유대인 사료에 대한 그의 다루는 방식은 당황스럽고 굴욕적"이라고 평가했다. 바르탈에 따르면, 산드는 "학술적으로 주변적인 입장들을 유대인 역사학 전체에 적용하면서, 유대인 역사학계의 중심적 입장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사와 유대사 전문가인 마틴 굿맨(Martin Goodman)은 이 책을 "잘못된 표현"과 "날조된 역사"로 구성된 작품이라고 비판하며, "이 주제에 대해 명백히 아는 바가 거의 없는 현대 유럽사 역사학자"가 쓴 것이라고 지적했다. 굿맨은 산드의 중심 논제들을 "믿기 어려운" 것으로 여기며, "논쟁이 아니라 호전성"으로 뒷받침되고 있으며, 증거를 "거의 완전히 무시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굿맨은 산드의 인구 추정이 "일련의 완전히 무작위적인 추측"에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산드가 "이교도 로마 제국의 영아 유기를 포함한 표준적인 인구 통제 방법들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지식이 있다면 유대인 인구 증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아니타 샤피라(Anita Shapira)는 산드가 정기적으로 "한 분야에서 가장 비정통적인 이론을 붙잡고" 3천 년의 역사를 조사하는 동안 그것을 "논리의 극한과 그 너머까지 늘려놓는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산드의 정치적 프로그램이 이 책을 "역사를 시사적 논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로 만들었으며, "잘못된 표현과 반쪽 진실의 도움으로 정치적 토론의 필요에 맞추려고 한다"고 평가했다.
역사학계의 반응과 비판
산드의 저서에 대한 역사학계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특히 유대사와 고대사 전문가들은 그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이들의 비판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사료 해석의 문제, 고고학적 증거의 무시, 그리고 비교사적 관점의 부족이다.
사료 해석의 문제
마틴 굿맨은 산드가 유대인 추방에 대한 핵심 사료들을 무시하거나 잘못 해석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요세푸스와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증언을 인용하며, "팔레스타인 출신이고 그리스 수사학 전통의 세련된 저자인 유스티누스가 자신의 주장을 쉽게 반박당할 수 있도록 열어둘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만약 유대인 배제에 대한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말이다.
굿맨은 또한 산드가 유대인을 단순히 종교로만 여겨졌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이교도와 기독교도 로마인들 모두 때때로 유대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생각했으며, 로마의 법적, 문학적 텍스트에서 사용된 'natio'라는 용어는 모호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는 산드의 핵심 주장 중 하나인 유대인의 순수 종교적 성격을 직접 반박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의 무시
여러 학자들은 산드가 고고학적 증거를 체계적으로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들은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에 걸쳐 유대인 공동체의 지속적인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회당 유적, 유대인 묘지, 그리고 히브리어와 아람어 비문들은 모두 현지 유대인 인구의 연속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들이다. (역주, 메르넵타 석비는 기원전 13세기 말기의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하자르족의 유대교 개종에 대한 산드의 주장도 고고학적 증거의 부족으로 인해 의문시되고 있다. 하자르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대규모 유대교 개종의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를 제한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역주, 다만 많은 경우 고고학적 유물들이 유대인의 특질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인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음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비교사적 관점의 부족
산드의 방법론적 문제 중 하나는 비교사적 관점의 부족이다. 그는 유대인의 경우를 다른 고대 민족들과 비교하여 분석하지 않았으며, 고대 세계의 민족 형성과 이주 패턴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무시했다. 고대 근동과 지중해 세계에서 민족들의 이주, 정착, 그리고 정체성 형성은 매우 복잡한 과정이었으며, 유대인의 경우도 이러한 일반적 패턴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산드는 고대 세계의 종교적 개종과 민족적 정체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단순화했다. 고대 세계에서 종교적 개종이 곧 민족적 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유대교의 경우도 종교적 요소와 민족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유전학적 반박과 논란
산드의 저서가 출간된 이후 유전학 연구들이 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결과를 제시했다. 2010년 『네이처』와 『아메리칸 저널 오브 휴먼 지네틱스』에 발표된 연구들은 유대인의 유전적 기원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제공했다.
하리 오스트러(Harry Ostrer) 유전학자는 산드의 유대인이 사후적 발명품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오스트러는 "이러한 관찰들이 유대인됨이 단순히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생각을 잠재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마이클 발터(Michael Balter)가 『사이언스』지에서 리뷰한 연구에 따르면, 오스트러의 연구팀은 "중동, 세파르딤, 아슈케나지 등 세 유대인 집단 모두가 다른 세계 인구들과 구별되는 게놈 전체적인 유전적 마커를 공유한다"고 결론지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연구들이 "유대인들이 공통의 기원을 갖지 않으며 다양한 시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유럽과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잡다한 모임이라는 역사학자 슐로모 산드가 그의 저서 『만들어진 유대인』에서 한 제안을 반박한다"고 보도했다. 『뉴스위크』는 산드의 책이 하자르 가설1)에 대한 논쟁을 "되살렸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산드는 이러한 유전학적 연구들이 자신의 주장을 반박했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만들어진 유대인』의 페이퍼백 판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유전학을 통해 시온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유럽인들의 특정한 특성들을 매우 과학적으로 발견하려고 했던 19세기 후반 인류학자들의 절차를 연상시킨다. 오늘날까지 익명의 DNA 샘플에 기반한 어떤 연구도 유대인에게 특정한 유전적 마커를 확인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며, 그런 연구가 성공할 가능성도 없다."
산드는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후손들이 생물학적 유대인 정체성을 찾으려고 나서는 것은 쓰라린 아이러니다. 히틀러는 분명히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라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는 또한 "오늘날에도 유대인이 비유대인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연구가 수행되는 것은 더욱 혐오스럽다"고 덧붙였다.
2012년에는 엘하이크(Elhaik) 등의 연구가 발표되어 유럽 유대인들이 코카서스와 메소포타미아 인구에서 유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산드는 『하레츠』와의 인터뷰에서 엘하이크의 논문을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옹호로 받아들였으며, "유대인 유전자를 찾는 유전학자들"을 다시 비판하면서 이전 유전학자들의 발견이 정치적 이유로 "적응되었을" 수 있다는 의혹을 표현했다.
정치적 함의와 이념적 배경
산드의 저서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는 그 정치적 함의가 있다. 그의 연구는 순수한 학술적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현대 이스라엘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산드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이스라엘을 민주화하고 진정한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로 쓰여졌다.
카를로 슈트렌거(Carlo Strenger)는 산드의 책이 "순수한 역사 작업이 아니며" "명확하게 명시된 정치적 의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책을 읽지 않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수 있지만, 산드의 목표는 유대인의 특성에 기반한 유대인 다수를 바탕으로 한 유대인 성격을 가진 민주주의로서 이스라엘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톰 세게프(Tom Segev) 이스라엘 역사학자는 산드의 책이 "이스라엘이 '유대인이자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선언된 정체성과 대조적으로 '모든 시민의 국가' - 유대인, 아랍인, 그리고 기타 - 가 되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세게프는 또한 이 책이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처음으로 읽고 놀랄 수 있는 수많은 사실들과 통찰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동기는 학술적 객관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힐렐 할킨(Hillel Halkin) 문학 비평가는 산드의 주장을 "진실의 정반대"라고 부르며, "오래 전부터 믿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백성(am yisra'el)에 속한다는 것을 한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강한 유대인 정체성을 가진 비종교적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반박했다.
할킨은 또한 "유대인의 민족성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시온주의는 그것의 오랜 기존 존재에 기반한 현대적 재개념화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을 "지적으로 너무 조잡해서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자존심 있는 어떤 역사학 교수라도 학부 논문으로 낙제시켰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맥스 헤이스팅스(Max Hastings) 역사학자는 보다 균형잡힌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이 책이 "최소한 이스라엘이 명시적이고 배타적으로 유대인 사회로 자신을 정의할 도덕적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논쟁"을 나타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산드는 도발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에서 유대인 곤경에 대한 동정심의 부족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헤이스팅스는 "세계의 유대인들 사이에 또는 이스라엘의 고대 부족들과의 공통된 유전적 연결이 없다는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단순히 종교로만 설명될 수 없는 놀라운 공통 유대인 특성들, 실제로 유대인 천재성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산드는 유대인이 무엇이 아닐 수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강력한 논증을 제시하지만, 그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학술적 평가와 한계
산드의 저서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 그 방법론적 한계와 정치적 편향성으로 인해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그의 문제 제기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토니 저드(Tony Judt, 역사학자)는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슐로모 산드는 놀라운 책을 썼다. 냉정하고 학술적인 문체로 그는 아주 간단히 유대인 역사를 정상화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책의 역사적 관점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보았으며, "예를 들어 초기 시대의 유대인들을 특징짓는 개종과 민족적 혼합을 강조하는 산드의 주장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언급했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역사학자)는 산드의 책을 2009년 "올해의 책" 중 하나로 선정하며, "슐로모 산드의 『만들어진 유대인』은 민족주의적 역사 신화를 해체하는 환영받고, 이스라엘의 경우 꼭 필요한 작업이자 모든 거주민에게 동등하게 속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호소"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산드의 접근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다니엘 라자레(Daniel Lazare, 작가)는 『만들어진 유대인』을 "어수선한 논쟁적 혼란, 편향적이고 무지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산드가 "고대 과거와 현대 정치의 관련성을 정당하게 주장하지만, 그의 왜곡들은 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곤경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장애가 된다"고 지적했다.
스티븐 와이츠만(Steven Weitzman)은 산드의 의도적 '발명' 아이디어를 비판하면서도, 산드의 방법이 주류 학계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와이츠만에게 있어서 산드는 단순히 하나의 기원 이론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을 뿐이며, 유대인 기원의 문제는 어느 정도 불확정적이라고 보았다.
이반 골드스타인(Evan R. Goldstein)은 이 책을 부분적으로 아서 쾨슬러의 『13번째 부족』의 재활용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13번째 부족'은 비평가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받았으며, 산드의 중심 논제 재포장도 크게 나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또한 산드만큼 대담한 주장을 신뢰할 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13세기 동유럽 유대인 인구통계학에 대해 충분히 알려진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 이스라엘 연구 및 중동 정치학에 미친 영향
산드의 저서는 비록 학술적으로는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지만, 현대 이스라엘 연구와 중동 정치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포스트 시온주의 담론과 이스라엘 내 정체성 논쟁에 새로운 차원을 제공했다.
첫째, 산드의 책은 이스라엘 내에서 민족주의 서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촉진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오랫동안 당연시되어 온 "2천 년 유랑 후 고향 땅으로의 귀환"이라는 서사가 공개적으로 의문시되었다. 비록 이것이 학술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둘째,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산드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이라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영토 분쟁에서 동일한 조상을 둔 사람들 사이의 종교적, 문화적 갈등으로 성격을 바꾸는 것이다.
셋째, 시온주의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기반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산드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역사적 권리가 허구적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 자체에 대한 논란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은 주로 정치적, 이념적 영역에 국한되었다. 학술적으로는 산드의 주장이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 역사 연구의 주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저서는 기존 연구의 중요성을 재확인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산드의 책은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유대인 본질주의적 관점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의 급진적 주장에 대한 반발로, 많은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지지자들은 더욱 강하게 전통적 유대인 서사를 옹호하게 되었다.
또한 산드의 저서는 반유대주의적 담론에 악용될 위험성도 제기했다. 그의 주장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세력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결론 및 전망
슐로모 산드의 『만들어진 유대인』은 현대 유대인 역사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저서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이 책은 학술적 엄밀성과 방법론적 신뢰성 측면에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산드의 주장은 대부분 추측과 선택적 해석에 기반하고 있으며, 반박하는 증거들을 체계적으로 무시하거나 왜곡하고 있다.
특히 그의 방법론적 접근법은 현대 역사학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1차 사료에 대한 충분한 분석 없이, 2차 문헌의 선택적 인용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신의 정치적 의제에 맞는 해석을 우선시하고 있다. 이는 역사학자로서의 객관성과 학술적 정직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드의 저서가 제기한 몇 가지 문제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족주의 서사의 신화적 성격, 종교적 정체성과 민족적 정체성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현대 정치에서 역사적 서사의 역할 등은 계속해서 탐구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들이다.
이 책의 진정한 의의는 완성된 대안적 역사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촉진한 것에 있다. 비록 그의 구체적 주장들이 학술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유대인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함으로써 학계의 논의를 활성화시켰다.
미래의 연구는 산드의 급진적 주장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제기한 질문들을 더욱 엄밀한 학술적 방법론을 통해 재검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고고학, 유전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들을 종합적으로 활용한 학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또한 산드의 저서가 제기한 정치적 함의들에 대해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학술적 역사 연구는 현대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역사적 진실 탐구와 정치적 의제 추진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결국 『만들어진 유대인』은 성공적인 역사 연구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선언서에 가깝다. 그것의 학술적 가치는 제한적이지만, 현대 이스라엘 사회와 유대인 공동체에 던진 도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은 역사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가 현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더욱 신중하게 고려해야 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유대인 역사 연구는 산드가 제기한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되, 더욱 엄밀한 방법론과 객관적 접근을 통해 이 분야의 학술적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산드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을 넘어서, 유대인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층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작업이 될 것이다.
[참고]
하자르 가설(Khazar Theory)은 현대 유대인, 특히 동유럽계 유대인(아슈케나지 유대인) 중 상당수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직접 후손이 아니라, 8~10세기경 유대교로 집단 개종한 튀르크계 하자르인들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이 가설은 1976년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의 저서 《제13지파(The Thirteenth Tribe)》를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으며, 이후에도 여러 학자와 저술가들이 논의를 이어왔다.
하자르 왕국과 유대교 개종
- 하자르 왕국은 7~10세기경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현재의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일대에 존재했던 튀르크계 유목 국가이다.
- 8세기 후반, 하자르 왕과 귀족층이 유대교로 집단 개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하자르가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중립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 하자르 왕국은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칼리프국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며, 동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하자르 가설의 주장과 논란
- 하자르 가설은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상당수가 하자르인의 후손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 그러나 역사적·유전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대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주로 중동(고대 이스라엘) 기원을 보이며, 하자르계 혈통이 주류라는 증거는 부족하다.
- 하자르 왕국의 유대교 개종은 사실로 보이나, 개종 인구의 규모와 후손이 현대 유대인 인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논란이 많다.
하자르 가설은 논란이 많고, 현재까지는 주류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즉, 하자르 가설은 흥미로운 역사적 논점이나, 현대 유대인의 기원에 대한 주류 설명과는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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