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
주체적 해석, 그 중요함에 대하여…
문맹은 의존하는 것이다. 읽고 쓰기를 배우고자 용기를 냄으로써 한나는 의존하는 삶에서 독립하는 삶으로 나아갔으며, 해방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Illiteracy is dependence. By finding the courage to learn to read and write, Hanna had advanced from dependence to independence, a step towards liberation.
비판적 역사 읽기를 강조하는 어느 서적('거꾸로 읽는 교회사')을 읽던 중에 발견된 인용문입니다.
원문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The Reader>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시공사’에서 번역 출간되었었죠.
이 문장 때문이었을까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읽고 봐왔던 관련 책과 영화, 음악 등등이 연계적으로 작동되었습니다.
그 생각의 단편을 옮겨봤습니다. 잘 정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우리는 역사의 가장 어두운 장을 마주할 때, 과연 무엇을 '읽고' '해석'해야 할까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와 이를 각색한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영화 <아이히만 쇼>, 그리고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각기 다른 형식과 관점을 통해 대규모 잔학 행위와 그 여파에 대한 심오한 사회학적 통찰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들은 개인적 및 집단적 책임, 악의 본질(특히 "악의 평범성"), 비문해성이 도덕적 맹목으로 이어지는 과정, 세대 간의 갈등, 잔학 행위의 정상화, 그리고 방관자 효과와 같은 핵심 개념들을 자극하며, 인류가 역사적 죄악에 어떻게 대처하거나 회피하는지에 대한 복잡한 메커니즘을 조명하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의 심장부에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한다고 하겠습니다. 내용을 알아가 볼까요?
개인이 타인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발생하는 도덕적 파국과, 주체적인 '읽기'와 '해석'을 통해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 사이의 준엄한 대립이 그것입니다.
오늘의 이 정리는 <책 읽어주는 남자>와 이와 연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및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의 주인공 ‘한나 슈미츠’와는 다른 결을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결국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비판적 수용의 위험과 주체적 해석의 필연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시도는 그렇다는 겁니다…^^;;;
관점은 ⟨개인의 "사유의 부재"와 체계적인 “관료적 구조”가 어떻게 악을 "평범하게" 만들고 "정상화"하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개인적 및 집단적 죄책감의 복잡한 양상을 형성하고 후속 세대가 역사적 공모와 지속적인 도덕적 질문에 대처하도록 도전하는 과정⟩을 탐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시죠.
(남주) 마이클의 유산된 죄책감과 해석의 부담
마이클은 전후 세대의 대표자로서, 전쟁 당시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유산된 죄책감(혹은 전이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전직 SS 경비원이었던 한나와의 개인적 얽힘은 이 죄책감을 극도로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으로 만들며, 이는 부모 세대와 직접 대면할 수 있었던 또래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마이클은 한나의 범죄를 알게 된 이후에도 그녀에 대한 지속적인 연민을 버리지 못했고, 이는 도덕적 딜레마와 영구적인 부담으로 이어집니다. 그 결과 “한나의 죄책감을 지적하는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했다”는 문구가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그의 내적 갈등은 스스로를 향한 비난으로 전환됩니다. 소설과 영화는 마이클이 한나를 돕거나 개입하기 위해 ‘충분히’ 행동했는지를 둘러싼 씨름을 탐구하며, 동시에 전후 세대가 수치심 때문에 행동 불능 상태에 빠졌던 사회적 맥락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집단적 죄책감이 개인화되는 사회적‧심리적 기제입니다. 추상적인 집단적·역사적 죄책감은 개인적 관계와 특정한 도덕적 실패를 통해 구체화되고 내면화됩니다. 특히 마이클의 독특한 상황, 즉 그의 죄책감이 “매우 개인적인 비밀”과 얽혀 있다는 점은, 또래들의 ‘공격적인 대결’ 방식과 달리 그에게 깊은 고립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는 집단적 죄책감의 부담이 획일적인 사회적 반응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종종 고립적인 개인의 심리적·사회적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경험은 공모나 유산된 죄책감이 사적으로 해소되지 못할 경우, 집단적 과거 청산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개인의 죄책감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집단(사회나 국가)의 과거 청산 역시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는 용서의 관점에서도 동일한 결론에 이릅니다. 예컨대 일본 정부와 위안부 피해자들의 관계, 제주 4·3 사건, 5·18 피해자와 정부 간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도덕적 과거 청산의 모호성과 용서의 한계입니다. 영화는 일부 비평가들의 주장처럼 “죽음의 수용소 경비원을 동정하도록 요구하며 공포를 아름답게 포장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 스스로 자신의 행위의 야만성을 변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도덕적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의 공간”을 탐구합니다. 마이클이 한나에게 보이는 복잡한 태도―과거의 열정적인 관계, 이후의 지속적인 비난, 그리고 테이프를 보내는 자비로운 행위―는 이러한 모호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화는 단순한 도덕적 확실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는 대규모 잔학 행위에 대한 역사적 과거 청산이 이분법적 도덕 판단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완전히 끝내거나 모두 용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피해자마다 감정이 다르고, 사회가 요구하는 공식적 태도나 분위기도 있으며, 무엇보다 가해자가 아주 평범한 이웃처럼 보일 때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하고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적 상황까지 포함하여 과거 청산을 탐구해야 한다는 점이 영화가 던지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주) 한나의 책임: 비문해성, 무비판적 수용, 그리고 뒤늦은 주체적 해석
한나의 죄책감은 법적 차원(인류에 대한 범죄로 인한 유죄 판결)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차원에서도 존재합니다. 비록 도덕적 차원에 대한 그녀의 이해는 뒤늦게 발전하지만 말입니다. 그녀의 초기 변명인 “나는 그저 내 일을 했을 뿐이다”는 아이히만의 “명령은 명령이다”라는 변명과 직접적으로 유사하게 보입니다.
작품에서 한나의 비문해성은 “살인보다 더 수치스러운” 비밀로 제시됩니다. 그녀는 이 사실을 끝내 고백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실제 범죄 책임보다 더 큰 법적 처벌을 감수하게 됩니다. 따라서 비문해성은 작품에서 강력한 은유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는 마이클이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게 된 이유이자, 그녀가 서류에 서명하거나 복잡한 역할을 맡는 대신 SS 경비원 직책을 떠맡게 된 배경을 설명합니다.
영화는 한나를 “평범하고 별다른 특징 없는 심리”를 가진 보통의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관객은 그녀의 행위를 넘어서 “정확히 무엇을 비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는 나치 가해자들을 단순히 악마적 괴물로 그려내는 도식을 거부하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궁극적인 자살은 죄책감과 절망에 압도된 결과이거나, 혹은 책임을 지는 유일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나의 행보는 아이히만과는 다른 결을 보입니다.
결국 한나의 비문해성은 단순히 개인적 결핍이 아니라, 사유의 부재와 그로 인한 체계적 공모의 사회학적 대리인으로 작동합니다. 그것은 야만성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으나,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회적 변수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 결함(비문해성)이 어떻게 개인을 전체주의 시스템 안에서 특정 사회적 역할(SS 경비원)로 강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광범위한 도덕적 함의에 대한 비판적 참여와 이해 능력이 제한된 개인은 관료적 순응에 취약해집니다. 결국 체계적 악은 개인의 취약점을 악용하여, 개인적 수치심을 공모의 경로로 만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 맹목”은 개인의 인지적 한계와 구조적 압력 모두의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평범한 악”의 역설과 도덕적 범주화에 대한 도전이 나타납니다. 영화가 한나를 “별다른 특징 없는 심리”를 가진 평범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회가 대규모 잔학 행위의 가해자를 어떻게 범주화해야 하는지 재평가를 요구합니다. 만약 한나가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라면, 악이 언제나 “이질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편안한 사회적 서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학적 역설은 끔찍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소수의 “도덕적 괴물”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개인들 속에도 잠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는 비난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며, 초점을 본질적인 타락에서 그러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상황적 요인(“도덕적 운” 등)으로 이동시킵니다. 동시에 그것은 공모를 조장하는 조건에 대한 더 깊은 사회적 자기 성찰을 강요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히만의 "사유의 부재"와 관료적 공모(共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잘 알려져 있듯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그녀의 논란 많은 관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괴물이라기보다는 광대”처럼 보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여기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녀의 주장은 끔찍한 행위가 언제나 본질적으로 악마적인 개인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의 도덕적 함의를 의심하지 않은 채 효율적으로 의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저질러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이히만의 동기는 “평범한” 것이었지 “급진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렌트의 사고의 핵심은 “사유의 부재”였습니다. 그녀는 이를 “생각의 부재”라고 표현하며, “무모한 무모함, 절망적인 혼란, 사소하고 공허해진 ‘진리’의 만족스러운 반복”으로 설명했습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진단입니다.
아이히만은 수많은 세부 사항을 기억하고 암송할 수 있을 만큼 관료적 업무에 정통했지만, 정작 상식과 사려 깊은 판단력을 발휘할 능력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본질적인 도덕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치 관료 체계에서 승진하고, 그 집단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명령을 효율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완벽한 공무원’임을 증명하려는 욕구”를 좇았습니다. 이는 곧 관료적 공모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따라서 아렌트의 분석은 관료적 시스템이 도덕적 이탈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드러냅니다. 아이히만의 “평범한 동기”와 “완벽한 공무원”이 되고자 했던 열망은, 관료적 구조가 어떻게 도덕적 이탈을 체계적으로 조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업무를 세분화하고, 효율성을 강조하며, 순응을 보상하는 방식으로 개인은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의 궁극적 결과와 단절된 채 “기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조직이 개인의 도덕적 마찰을 줄여, “사유의 부재” 상태에 있는 개인이 스스로를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인식하지 않으면서도 잔학 행위에 쉽게 참여하도록 만드는 인과 관계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잔학 행위의 정상화”는 단순한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체계적 설계에 따른 사회학적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비판적 판단보다 복종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위험이 존재합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사유의 부재”와 “비판적이지 않은 규칙 준수”를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취약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특히 정부나 대규모 조직 내에서 개인이 윤리적 고려와 개인적 판단보다 규칙과 명령 준수를 우선시할 때, 이는 곧 집단적 도덕적 맹목을 초래합니다.
결국, 비판적 사고와 도덕적 성찰보다 의심 없는 복종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는 ‘평범한 악’의 확산에 본질적으로 취약합니다. 개인은 끔찍한 결과에 기여하면서도, 자신의 순응 속에서 “유혹적으로 안전한” 상태에 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여러 집단 속에서도 크고 작은 잘못에 무심히 동참해 버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직장의 위계 속에서 근무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경험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죠… --;;;)
아렌트 통찰의 논란과 지속적인 관련성
아렌트의 보고서는 “대중, 유대인 공동체, 학계, 심지어 그녀의 친한 친구들까지도 충격에 빠뜨리고, 분노하게 했으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영화에서도 주변 인물들이 분노하는 장면이 잘 묘사됩니다. 아렌트 자신도 “진실을 말하는 것은 위험한 사업”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의 가장 널리 읽힌 저작으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악을 피하기 위한 “인류와 사회를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해 여전히 읽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용어만큼은 알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녀의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영화가 아우슈비츠 인근 가해자들의 일상생활과 악의 정상화(일상화)를 묘사하는 방식
영화는 아우슈비츠 사령관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이 "수용소 바로 옆집에서 평범한 삶을 사는"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의 정원은 수용소와 벽을 공유하고 있죠. 이 영화에 대한 많은 사회학적 논평은 "전체 민족의 절멸이 회스 가족에게는 일상적인 일상이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부인)헤드비히는 정원을 가꾸고, 훔친 모피 코트를 입어보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루돌프는 관료적인 대량 학살 명령을 처리합니다. 영화가 장면적인 폭력을 보여주지 않고 대신 소리, 연기, 그림자를 통해 암시함으로써 공포감을 증폭시키고 가족의 정상화를 강조하는 장치를 사용합니다. (참고로 저는 이 영화 감상을 마치고, 상영관을 나서면서 구토증세와 한동안 두통에 시달렸더랬습니다.)
이 영화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영화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회스 가족의 일상적인 잔학 행위 속에서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악이 어떻게 평범해지는지에 대한 내장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영화의 독특한 영화적 선택 즉 암시된 폭력, 사운드 스케이프, 관음증적 카메라 워크는 관객에게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관객이 그것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이는 관객이 "보이지 않는 공포"와 그들 자신의 무관심의 가능성에 직면하게 만들며, 영화를 관객의 "관심 영역"과 정상화된 악에 직면했을 때의 도덕적 충돌을 일으키는 강력한 사회학적 실험으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저와 함께 이 영화를 감상했던 와이프는, 시작 후 3분도 되지 않아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을까” 얘기했었습니다. 그만큼 정상인의 관점(즉 관심 영역)으로는 보기조차 힘들 만큼 충돌이 강렬한 영화였다는 것입니다.)
‘인지 부조화’와 ‘방관자 효과’에 대한 영화 표현의 선택(사운드스케이프, 암시된 폭력)
회스 가족은 "자신들의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시하고 정상화"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인) 헤드비히가 유대인 가정에서 약탈한 물건들을 자랑하고, 그녀의 어머니가 유대인 상사가 옆집에서 죽을 가능성을 축하하는 등, 그들의 명백한 악과 근본적인 인지 부조화를 드러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루돌프가 아이들과 함께 인근 호수에서 수영하다가 뼈와 재에 뒤덮여 자신이 소각된 유대인들의 유해 속에서 수영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처럼, 악은 때때로 그들의 정상화된 삶에 침입하곤 합니다. 이는 그들의 인지 부조화에 대한 강렬하지만 일시적인 균열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비명, 총성,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의 "위협적인 사운드스케이프"는 끊임없는 "배경 소음"으로 작용하며, 그들의 깊은 무관심과 잔학 행위가 그들의 일상적인 "분위기" 속으로 정상화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차갑게 느껴지는 방식, 황량하고 멀리 떨어져 관찰하는 방식"의 영화 촬영 기법은 삼각대나 벽에 고정된 카메라로 “관음적 시점”을 만들어내며, 등장인물들의 무관심을 반영하고, 관객을 방관자 역할로 몰아넣습니다. 이러한 초연한(?) 시점은 개인이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지만 개입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방관자 효과를 강조한다고 할 것입니다. 회스 가족이 잔학 행위를 "관심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개념은 그들의 인지 부조화와 적극적인 이탈을 (작품이)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이죠.
영화는 회스 가족이 잔학 행위를 "관심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사회가 악의 평범성을 '또 다른 평범성'으로 만들어, 진정으로 그 경각심을 인식하지 않고 지적으로 논하고 철학화하는" 메타적 논평을 제공한다고 할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면요) “악이 너무 자주 반복되면 사람들이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고, 그런 악을 경고하거나 싸우기보다는 지식인들이 이론화·철학화 하며 거리 두기만 한다는 비판인 것입니다.) 이는 더 넓은 사회학적 비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현대 사회는 역사적 잔학 행위를 처리하거나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공포를 길들이거나 추상화할 위험이 있으며, 이로 인해 악의 진정으로 불안한 함의가 편리하게 무시되거나 지적으로 처리되는 자신들만의 "관심 영역"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악을 연구하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담론에서 악의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순환적인 위험을 암시한다고 할 것입니다. (사변적이고 형해화해 버릴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한다면, 더 복잡해져 버릴까요? 암튼…)
<책 읽어주는 남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홀로코스트와 그 여파에 대한 다면적인 사회학적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들은 "악의 평범성"이 만연한 힘으로 작용하며, "사유의 부재"와 “도덕적 맹목”이 비판적인 역할을 하고, “정상화 과정”이 은밀하게 진행되며, 세대 간에 걸쳐 개인적 및 집단적 책임에 대한 심오한 도전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들은 악에 대한 단순한 묘사를 넘어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더 깊은 사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리뷰를 시작한 동기가, 사유의 부재 즉 “생각 없음” 혹은 “스스로 해석하지 않음”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던 것이었는데…. 여기에 추가적으로 더 사유하라 한다면, 이게 가능한 것인지…. 솔직히 이 글을 써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
악은 항상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을 경시하는 시스템 내에서 작동하는 평범한 개인들의 산물일 수 있다는 얘기일 겁니다. 죄책감은 다면적이며, 개인의 책임, 유산된 부담, 그리고 집단적 사회적 공모를 포함한다는 것이겠죠.
역사적 기억은 정적인 저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관점과 계시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받는 능동적이고 종종 고통스러운 과거 청산 및 재평가 과정인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고 역설한 어느 역사학자의 말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겠죠)
이 작품들은 체계적 압력에 직면했을 때 도덕적 판단의 취약성과 현대적 맥락에서 잔학 행위가 정상화될 수 있는 용이성을 강조하는 지속적인 경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대 사회가 자신들의 "관심 영역", 비판적이지 않은 복종의 위험, 그리고 불의에 직면했을 때 능동적인 사고와 도덕적 용기의 지속적인 필요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강조하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시급함을 상기시킵니다.
남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넘어 스스로 읽어내고, 스스로 이해하고, 스스로 해석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뿐만 아니라 그 행동에 따르는 책임까지를 감당하는 적극적인 민주 시민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웅변으로 들립니다. 이들 작가, 연출가, 기록자들의 목놓아 외치는 주장이 말입니다.
책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저, 시공사, 2013
영화 <더 리더>, 스티븐 달드리 감독, 2008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한길사, 2006
영화 <아이히만 쇼>, 폴 앤드류 윌리엄스 감독, 2017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래이저 감독,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