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십일조 논쟁 살펴보기
개인적 신앙은 각각의 색깔을 입는다.
노란색이 파란색에게 틀렸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파랑 또한 노랑에게 틀렸다 할 수 없다.
노랑은 노랑이어서 귀하고, 파랑은 파랑이어서 소중하다.
그 모든 것이 색깔의 정수이고,
그 모든걸 품는 것이 신앙이다.
생각보다, 신앙의 스펙트럼은 넓다.
인위적으로 좁히려든다면,
그 시도가 이상한 것이겠다.
모든 신학적 쟁점은
쟁점 그대로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난 후에,
자신의 색에 맞는 의견을 정립하면 될 뿐.
한국 개신교의 십일조, 축복인가 족쇄인가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에서 십일조는 다양한 해석과 실천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한국 개신교에 있어서는 신앙의 핵심적 의무이자 교회의 재정적 기반으로 정착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기독교인의 5% 미만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반면, 한국 목회자의 95% 이상이 이를 열성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독특한 현상은 한국교회의 성장 동력이었던 십일조 제도가 신학적, 역사적,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배경을 형성한다.
본 리뷰는 단순한 찬반 논리를 넘어, 십일조를 둘러싼 신학적 기초와 역사적 변질 과정, 그리고 이로 인해 파생된 현대 한국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이 제도가 한국교회에 미친 복합적인 영향을 조명하고자 한다.
십일조의 신학적, 성경적 기초와 현대적 해석의 충돌
(1) 십일조 옹호론의 신학적 근거
십일조 옹호론은 그 기원을 구약성경의 여러 규정에서 찾는다. 이들은 십일조가 모세 율법이 제정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한 보편적인 신앙 원리라고 주장하며, 그 시원을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사건(창세기 14:17-20)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이러한 자발적인 행위는 율법과 무관한 '영원한 도덕법'의 성격을 지닌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모세 율법에 명시된 십일조는 더욱 구체적인 의무 규정으로 제시된다.
레위기(27:30-34), 민수기(18:21-32), 신명기(14:22-29) 등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이를 바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율법 시대의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공동체의 빈민(고아, 과부)을 구제하는 중요한 재정적 목적을 가졌다. 이처럼 십일조는 단순히 재물 봉헌을 넘어, 공동체 유지와 약자 보호라는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신약 시대에 들어서도 옹호론자들은 십일조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의와 인과 신)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느니라"고 말씀하신 마태복음(23:23)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십일조 자체의 유효성을 인정하셨으며, 다만 그 외형적 행위보다 그 정신적 의미(정의, 사랑)를 강조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구약의 말라기(3:10)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구절은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고 물질적·영적 축복을 약속받는 근거로 널리 인용된다.
(2) 십일조 폐지론의 신학적 근거
십일조 폐지론은 구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신학적 관점에 기반한다. 이 관점에서 십일조는 구약 율법의 한 조항이므로, 율법이 폐해질 때 함께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른 율법 조항들과 달리 십일조만을 예외적으로 신약시대에 존속시킬 근거는 없다고 본다.
폐지론자들은 신약성경이 율법적 의무로서의 십일조 대신 '자발적인 헌금(연보)'의 정신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9:7)의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는 말씀이 그 핵심 근거이다. 이 원칙은 강제성이 배제되며, 헌금의 액수도 정해져 있지 않고, 개인의 형편에 따라 '있는 대로' 또는 '힘대로'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는 십일조가 '소득의 10분의 1'을 구분하여 드리는 것과 달리,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중 일부를 하나님 나라와 약한 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또한 폐지론은 십일조 제정의 원래 목적이 소멸되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본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 레위인(제사장)의 생계와 돌 성전 유지를 위해 제정된 제도였는데, 로마군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AD 70년) 이후 성전과 제사장의 역할이 사라지면서 그 목적이 상실되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가 구약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한다.
한국 개신교에서의 십일조: 정착과 변질의 역사적 고찰
(1) 네비우스 정책과 자급자족 원칙
십일조는 19세기말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될 당시, 교회의 재정적 자립을 위한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외국 선교부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고 유지하는 '자급자족의 원칙'(네비우스 정책)이 강조되면서, 십일조는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교역자의 생계를 책임지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교회의 성장을 이끌어낸 긍정적인 역할이었다.
참고) 네비우스 정책(Nevius Mission Plan)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1829–1893)가 제창한 자립적 토착교회 형성 방안으로, 19세기 후반 한국 개신교 선교의 근간이 된 선교 방법론이다.
네비우스는 1854년부터 약 40년간 중국 산둥 지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서구 자금에 의존하며 성장하지 못하는 현지 중국 교회의 한계를 경험한다. 이에 따라 1885년, 그는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 방안』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현지인이 스스로 전도하고 운영하는 토착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선교 원리를 제시한다.
1890년 언더우드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네비우스는 자신의 선교 이론을 조선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에게 강연했고, 그 내용은 곧 1893년 ‘한국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의 공식 선교정책으로 채택되었다.
네비우스 정책은 흔히 ’자전, 자립, 지치의 3자(自) 원칙’으로 요약된다.
경제적 자립, 신앙적 자율, 전도적 주체성을 통해 외국 선교사의 종속 구조를 벗어나 독립된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2) 기복신앙과 샤머니즘의 영향
그러나 한국전쟁과 교단 분열 사건 이후, 십일조는 신앙적 의미를 잃고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십일조가 '축복과 저주의 틀' 위에서 강화되면서, 십일조를 많이 내면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가 성공한다는 믿음이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기복신앙)과 결합하여 공고해졌다. 이러한 변질은 십일조를 '영적 사기'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십일조를 통해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거짓말이며, 교인들로 하여금 돈을 벌기 위해 예수를 믿는 '어린 신앙'에 머물게 한다는 지적이다.
십일조를 둘러싼 현대 한국교회의 주요 논란
(1) 십일조의 의무화와 교인 권리 제한 논란
한국 개신교 내부의 십일조 논란은 단순히 신학적 주장을 넘어, 교단 헌법 제정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 교단은 '6개월 이상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교인 권리를 자동 중지한다'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여 큰 비난을 받았다. 이 개정안은 교인 자격을 십일조라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척도'로 판단하려 한다는 비판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재정 확보를 넘어, 교회의 정치적 역학 관계와 통제 구조를 강화하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다. 개정안 옹호 측은 교회 분쟁 시 '허위 교인'을 만들어지지 세력을 늘리는 폐단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십일조가 교인의 자격을 통제하고 교회 내 권력 투쟁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동시에 이 개정안은 목회자 비위에 대한 자격 정지 조항은 삭제하면서 교인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는 비판을 받으며, 교회의 주된 문제가 목회자의 타락에서 비롯됨에도 그 책임과 통제의 칼날을 교인들에게만 겨누는 모순적 행태를 드러냈다. 이는 '자발적 십일조'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적 압력과 제도적 제재를 통해 십일조를 강요하는 한국교회의 위선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2) 재정 불투명성과 횡령 문제
십일조가 거액의 재정으로 집결되면서 재정 관리의 투명성 부재로 인한 문제들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한 교회에서는 재정 집사가 6년간 30억 원을 횡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믿고 맡기면 알아서 잘할 것'이라는 한국교회 전반의 맹목적인 신뢰와 재정 관리 체계의 부실함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이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한 명에게 재정 관리를 맡기는 관행적 문제가 시스템 부재로 이어져 발생하는 구조적 병폐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재정 불투명성은 대형 교회 목회자의 고액 사례비 및 불투명한 활동비 지출 논란과도 연결된다. 풍족한 재정을 바탕으로 목회자가 '최고 경영자'의 위치에 오르고 교회가 사유화되는 병폐가 발생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일부 개혁적 교회에서는 목회자 사례비를 모든 직급에 동일하게 지급하고 재정 집행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
(3) 거대 건축과 헌금 강요
십일조 논란의 가장 가시적인 문제점 중 하나는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 건축이다. 교회 건축을 위한 기명(記名) 헌금은 교인들 간의 경쟁을 유발하고 '사람을 의식하며' 헌금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이다.
이러한 물질주의는 십일조의 본래 목적을 완전히 상실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십일조와 각종 헌금의 강조는 풍족한 교회 재정을 낳고, 이는 다시 거대한 예배당 건축과 목회자 귀족화로 이어진다. 거대해진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더 많은 헌금이 필요해지고, 이로 인해 십일조 강요는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은 교회를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종교'로 전락시키고, 결국 공동체 내의 가난한 교인들에게까지 은행 대출을 받아 건축 헌금을 하게 만드는 비극을 낳는다. 십일조의 본래 목적이었던 약자 구제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십일조 논란의 대안과 한국교회의 미래
(1) 신약적 헌금 모델로의 회귀
십일조 강요를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으로, 신약성경에 제시된 '연보(捐補)' 모델로의 회귀가 제안된다.
이 모델은 '마음에 정한 대로' (고후 9:7) 드리는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헌금을 핵심 원리로 한다. 이는 헌금액을 강요하거나 무리하게 드리도록 하는 대신, '후하게' 주되 결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않는 정신을 강조한다. 이 모델은 또한 헌금의 목적을 교회 건물의 축적보다는 구제와 선교 등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역에 사용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2) 재정 투명성 확보를 위한 제도적 개선 방안
십일조 논란에서 불거진 불투명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개선이 필수적이다. '믿고 맡기는' 관행을 탈피하고, 공인된 외부 기관의 회계 감사를 의무화하여 재정 관리의 전문성과 투명성을 제고하여야 한다. 또한 모든 헌금의 수입과 지출 내역을 교인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목회자 사례비 및 활동비 규정을 명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3) '가난한 교회'와 '나눔'의 패러다임 전환
궁극적으로 한국교회는 십일조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 '가난한 교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회 재정을 축적하고 거대 건물을 짓는 대신, 매년 재정을 바닥까지 털어 이웃을 구제하고 선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십일조로 인해 발생한 교권주의와 금권주의를 스스로 거세하는 일이 될 것이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십일조를 넘어서,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묻다
한국 개신교의 십일조 논란은 단순히 재정적 문제를 초월한다.
이는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논쟁, 이념적 순수성이 물질적 욕망과 권력욕에 의해 변질된 역사적·사회적 병폐가 복합적으로 얽힌 총체적인 문제의 결과이다.
십일조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한국교회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 즉 '우리는 무엇을 예배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직결된다. 돈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이 논란은 한국교회가 그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시대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Appendix.
[창세기 14:17-20]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온 뒤에, 소돔 왕이 아브람을 맞아서, 사웨 벌판 곧 왕의 벌판으로 나왔다.
18 그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20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 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레위기 27:30-34]
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에게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31 누가 그 십분의 일을 꼭 무르고자 하면, 그 무를 것의 값에다 오분의 일을 더 얹어야만 한다.
32 소 떼와 양 떼에서도, 각각 십분의 일을 나 주에게 거룩하게 바쳐야 한다.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짐승을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 것마다 바쳐야 한다.
33 나쁜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을 골라내거나 바꿔치기를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가 꼭 바꾸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것을 바꾸었다면, 처음 그 짐승과 바꾼 짐승이 둘 다 거룩하게 되어, 도저히 무를 수 없게 된다."
34 이것은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더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고 내리신 명이다.
[민수기 18:21-32]
21 "나는 레위 자손에게는 이스라엘 안에서 바치는 열의 하나를 모두 그들이 받을 유산으로 준다. 이것은 그들이 회막 일을 거드는 것에 대한 보수이다.
22 이제부터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에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다가는 그 죄값을 지고 죽을 것이다.
23 회막 일은 레위 사람들이 한다. 이것을 어긴 죄값은 레위 사람이 진다. 이것은 오고 오는 세대에 언제나 지켜야 할 율례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아무런 유산이 없다.
24 그 대신에 나는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 곧 열의 하나를 그들의 유산으로 준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아무런 유산도 없다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25 주님께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26 "레위 사람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일러라.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내가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는 열의 하나를 받을 때에, 너희는 열의 하나 받은 것에서 열째 몫을, 나 주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드려라.
27 나는 너희가 바치는 그 제물을, 너희가 타작마당에서 떼어 낸 곡식처럼, 포도 짜는 틀에서 떠낸 포도주처럼 여길 것이다.
28 이렇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떼어, 나 주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드리고, 나 주에게 드린 그 제물은 제사장 아론의 몫으로 돌려라.
29 너희는 주의 몫으로는 너희가 받는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좋고 가장 거룩한 부분을,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모두 바쳐야 한다.
30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희가 가장 좋은 부분을 들어 올려 바칠 때에, 나는 그것을 레위 사람이 타작마당이나 포도 짜는 틀에서 나온 것을 바치는 것처럼 여길 것이다.
31 그 나머지는 너희와 너희 집안사람이 어디에서나 먹어라. 그것은 너희가 회막에서 하는 일에 대한 보수이기 때문이다.
32 가장 좋은 부분을 들어 올려 바침으로써, 너희는 이 일에 죄를 짓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는 이스라엘이 바친 거룩한 제물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죽지 않는다."
[신명기 14:22-29]
22 "당신들은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23 당신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처음 난 소와 양의 새끼와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서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24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당신들이 있는 곳에서 너무 멀고, 가기가 어려워서,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당신들은 그것을 돈으로 바꿔서, 그 돈을 가지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사십시오. 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십시오.
27 그러나 성 안에서 당신들과 함께 사는 레위 사람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28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29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3: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 마태복음 23:23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는 “화 있을진저” 선언(마 23:13–36)의 한 부분이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에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1. 본문의 문맥
마태복음 23장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hypocrisy)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장이다.
이들은 율법의 세세한 규례(십일조, 정결례 등)는 철저히 지켰지만, 하나님의 뜻의 본질인 정의(δικαιοσύνη, dikaiosynē), 긍휼(ἔλεος, eleos), 믿음/신실함(πίστις, pistis)은 무시했다.
따라서 예수의 비판은 “율법을 무시했다”가 아니라, “율법의 우선순위를 잘못 잡았다”는 데 있다.
2.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의 의미
박하, 회향, 근채: 작은 향신료나 채소류로, 일상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작은 것들까지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면서 “율법을 완벽히 지킨다”는 외적 경건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 준수의 형식적 과잉이었을 뿐, 본질적 가치를 놓치고 있었다.
3. “더 중한 바”의 의미
예수께서 강조하신 정의·긍휼·믿음은 구약 율법의 근본정신을 요약한 표현이다.
- 정의(justice):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공동체 내 공정과 올바른 관계(암 5:24 참조).
- 긍휼(mercy):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반영하는 태도(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 믿음(faith/faithfulness):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관계와 언약적 충실성.
즉, 율법의 본질은 단순히 “규례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이다.
4.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의 의미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를 무가치하게 보신 것이 아니다.
“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정의·긍휼·믿음)도 버리지 말라” 하심으로, 율법의 작은 규례 준수도 무시하지 말되, 더 중요한 본질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즉, 작은 규례를 철저히 지키면서도 동시에 큰 가치를 실천하는 통전적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5. 신학적·현대적 함의
신앙의 외적 행위(예배, 십일조, 봉사 등)가 본질(사랑, 정의, 자비)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다.
성경적 율법 이해는 단순한 규범 준수보다 하나님의 마음(공의와 자비)을 반영해야 한다.
교회와 성도 역시 외적 신앙 행위에 집착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 정의로운 질서,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말 3:10]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고후 9: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히 7:4] 멜기세덱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족장인 아브라함까지도 가장 좋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 히브리서 7:4의 의미 해석
히 7:4 말씀은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멜기세덱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중요한 본문이다.
“이 사람(멜기세덱)이 얼마나 위대한가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가장 좋은 것으로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느니라.” (개역개정)
1. 본문의 문맥
히브리서 7장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함을 논증하는 부분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창세기 14장(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사건)을 근거로 삼는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자, 레위 지파의 조상이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조차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이것은 곧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아브라함(그리고 그 후손 레위인들)의 제사장직보다 상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2. “얼마나 위대한가”의 의미
‘위대함’(megas): 단순히 권위가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특별한 권위를 지녔음을 가리킨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자,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창 14:18)으로 불린다. 따라서 본문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레위 제사장직을 능가하는 독특한 지위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3. 십일조 사건의 신학적 의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사실은 단순한 예우가 아니라 종속 관계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고대 근동에서 십일조는 승리한 전쟁의 전리품을 신적 권위를 가진 자에게 바치는 예식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멜기세덱을 자신의 영적 상위자로 인정한 행위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직, 시 110:4)이 레위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4. 그리스도론적 함의
히브리서 7:4는 단순히 멜기세덱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설명하기 위한 논증의 일부이다.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멜기세덱 즉, 그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영원하고 더 탁월한 제사장직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레위 제사장처럼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고, 단번에 온전한 제사를 드려 구원의 완전성을 이루셨다는 신학적 결론으로 이어진다(히 7:27–28).
[창 14:18]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시 110:4] 주님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그 뜻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히 7:27-28]
27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치셔서 단 한 번에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28 사람들에게 약점이 있어도 율법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지만, 율법이 생긴 이후에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네비우스 정책 (자급자족의 원칙)
한국교회의 네비우스 정책은 19세기말부터 적용된 중요한 선교 원리로,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자립(自立, self-support)’, ‘자치(自治, self-governing)’의 세 가지 원칙을 중심으로 합니다.
네비우스 정책의 핵심 원리
- 자전: 현지인(토착인)이 직접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는 원칙입니다.
- 자립: 교회 운영과 목회자의 생활비 등 재정 문제를 교회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독려합니다.
- 자치: 교회 운영 및 문제들을 외부 선교사보다는 교회 교인들이 자율적으로 처리하도록 강조합니다.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정책의 도입
- 1890년, 선교사 네비우스(John L. Nevius)가 한국을 방문해 자신의 선교정책을 소개하였고,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하였습니다.
- 장로교뿐 아니라 여러 교단에서도 널리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영향과 평가
- 평신도를 강조하여 교회 내 평신도의 역할 확대와 자발적 전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교회 재정의 자립성 강조,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 확산, 조직적인 성경 공부와 교회 사경회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 한편, 교회 중심적 운영이 사회 참여나 복지 등에 소극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네비우스 정책은 이처럼 한국 교회가 자립적이고 토착화된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교 전략입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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