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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 형성 이론의 역사적 변천과 주요 학설 정리

by KEN

오경 형성 이론의 역사적 변천과 주요 학설 요약정리

요약
오경(토라)은 단일 저자의 일관된 저작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복합적 문헌의 집성체이다. 그 형성 과정은 이스라엘이 겪은 주요 역사적 격변기(북왕국의 멸망, 바벨론 유배, 그리고 페르시아 시대의 귀환)에 대한 신학적·사회적 응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경의 핵심 주제는 ‘은혜와 율법’이라는 두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선택, 약속, 출애굽)를 다루는 서사(이야기)가,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율법(규례와 윤리)의 근거와 맥락을 제공한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맞물린 변증법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전통적인 모세 단일 저작설과 달리, 현대의 역사비평적 연구는 오경이 최소 네 개의 주요 전승층 즉, 야훼계(J), 엘로힘계(E), 신명기계(D), 제사계(P)와 여러 구전 전승 단편들이 복수의 편집 단계를 거쳐 통합된 결과물임을 밝혀냈다. 이른바 문서설은 이후 많은 비판과 수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경 내부의 신학적 다양성과 문체, 서사적 불일치를 설명하는 유용한 분석 틀을 제공한다.

오경이 오늘날과 같은 다섯 권(창세기–신명기)의 형태로 정착된 시점은 페르시아 제국 통치기, 곧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주전 5–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귀환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종교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삶을 규율할 통합된 율법서를 필요로 했다. 그 결과, 페르시아의 행정적 승인 아래 기존 전승들을 선택·배제하지 않고 통합하는 방식으로 현재의 오경이 완성되었다.

결국 오경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모세의 죽음으로 끝나는 미완의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이 열린 결말은 단지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약속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유배 이후 공동체의 실존적 현실을 반영한다. 곧 땅을 소유하지 못했으나 약속을 신뢰하며 나그네로 살아가는 믿음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임을 증언한다.

따라서 오경의 다채로움과 내적 긴장은 오류나 불일치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재구성해 온 신앙의 여정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이 다양성과 긴장 자체가 오경의 핵심 메시지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율법의 책’이 아니라 ‘신앙의 이야기’로서의 토라가 생명력을 얻는다.



오경 연구의 시작 – 모세 저작설과 비평의 태동


오경(Pentateuch)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앙과 신학의 주춧돌인 동시에, 그 기원과 형성을 둘러싼 200여 년에 걸친 학문적 논쟁의 중심 무대였다. 전통적으로 오경은 ‘모세의 율법’ 혹은 ‘모세의 책’으로 불리며, 모세 단독 저작설은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의 신적 권위와 교리적 정당성을 지탱해 온 핵심 전제였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의 근대 학문 정신은 성서를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두지 않고, 역사적‧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전환시켰다. 이 변화는 곧 오경의 복합적 형성 과정을 밝히려는 역사비평적 연구의 태동을 촉발시켰다.


이번 정리는 18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경 형성론의 전개 과정을 추적하고, 그 속에서 등장한 주요 학문적 이론들의 논거와 한계를 분석 정리한다. 초기 비평의 단초로부터 고전적 문서설(JEDP)의 성립과 그 이후의 비판, 그리고 현대의 후문서설과 편집비평적 접근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 이를 통해 오경이 단일 저자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시대와 공동체의 신학적 성찰이 축적된 복합적 산물임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통시적 고찰은 오경 본문에 내재된 다양성과 긴장,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신학적 대화와 해석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지적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가설들이 등장하기 이전 즉, 비평적 성서학이 막 싹트던 시기의 전통적 모세 저작설에 대한 최초의 문제 제기와 그 지성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비평의 여명: 고전적 문서설 이전의 연구 (고대 ~ 18세기 초)


본격적인 문서 가설이 등장하기 이전, 오경의 모세 저작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교부 시대에서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을 거치며 성경 본문을 바라보는 관점은 고정된 교리적 텍스트에서 역사적·문학적 텍스트로 점차 이동했다. 이러한 지적 흐름 속에서 제기된 부분적인 문제의식과 관찰들은 비록 완결된 이론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후대 역사비평이 뿌리내릴 수 있는 학문적 토양을 마련했다.


고대와 중세의 비판적 단초


교부 시대에도 모세 저작설에 도전하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으나, 교회는 주로 우의적 해석과 호교론적 논증을 통해 본문의 난점을 신학적으로 방어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 대한 언어적·문학적 비평은 중세 유대 주석가들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12세기 스페인의 랍비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는 본문 속 특정 구절들에 주목하여 모세 저작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 창세기 12:6 —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그때에”라는 표현은 저자가 이미 가나안 사람이 그곳에 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곧 모세 시대 이후의 관점이다.


- 신명기 1:1 — “요단 저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에게 말하였더라.”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은 요단강을 건너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의 시점에서 쓰인 것이다. 모세는 요단을 건너지 못했으므로, 이 구절은 그의 저작이 될 수 없다.


이븐 에즈라의 통찰은 본문 내에 존재하는 시대착오적 서술을 체계적으로 식별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된다. 그는 텍스트가 서술하는 세계와 최종 저자의 세계 사이에 시간적 간극이 존재함을 드러냈다. 이는 후대 역사비평의 논리적 전제가 되는 결정적 발견이었다.


인문주의와 근대 주석의 시작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는 성서 해석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원전으로 돌아가라(Ad Fontes)”는 인문주의의 표어는 성서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본문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와 역사적 맥락에 주목하면서, 중세의 교의학적 해석을 넘어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읽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러한 흐름은 본문 그 자체를 텍스트로 분석하고, 그 내적 구조와 편집 흔적을 탐구하는 근대적 비평의 서막을 열었다.


비평적 연구의 선구자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모세 저작설을 명시적으로 부정한 선구자들이 등장했다.


- 바룩 스피노자(1632–1677)

→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그는 이븐 에즈라의 통찰을 발전시켜, 오경이 모세가 아닌 후대의 인물, 아마도 에스라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을 신학이 아닌 이성의 빛으로 읽어야 할 문헌으로 간주하며, 텍스트의 인간적 기원을 강조했다.


- 리샤르 시몽(1638–1712)

→ 프랑스 오라토리오회 소속 신학자로, 오경 내의 문체 차이, 서사 중복, 내적 모순을 근거로 단일 저자설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모세가 선행 전승을 수집해 정리했으며, 그의 사후 서기관들의 편집과 확장을 거쳐 에스라 시대에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연구는 단순한 관찰을 넘어, 오경이 오랜 전승과 편집 과정을 거쳐 형성된 복합 문헌이라는 인식을 명확히 정립했다. 이러한 초기 연구들은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보다 체계적인 문서 가설(JEDP)의 탄생을 가능케 한 지성사적 교량이 되었다.


요컨대, 고대의 우의적 전통과 중세 유대 주석, 그리고 근대 인문주의의 합류는 “모세 저작설의 균열에서 역사비평의 싹이 트는 과정”이었다. 그 싹은 18세기 계몽주의의 토양에서 비로소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2. 고전적 가설의 수립: 문서설, 단편설, 보충설의 대두 (18세기 ~ 19세기 초)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학문적 분위기를 조성하며, 오경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로 이어졌다. 여기에 19세기의 낭만주의와 역사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고조가 더해지면서, 오경 연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특히 낭만주의가 강조한 “타락 이전의 순수한 기원”에 대한 탐구는 학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종교의 원초적 단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나아가게 했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이전 세대의 단편적 문제 제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본문 전체의 문학적 구조와 서사적 불일치를 분석함으로써 오경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려 했다. 그 결과 등장한 문서설, 단편설, 보충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경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 문서설 (Documentary Hypothesis)의 초기 형태


오경, 특히 창세기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두 가지 이름 즉, ‘야훼(YHWH)’와 ‘엘로힘(Elohim)’의 차이는 초기 비평가들에게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 헤닝 비터(1711)와 장 아스트릭(1753) 은 이 신명(神名)의 차이에 주목했다.

특히 아스트릭은 모세 저작설을 변호하려는 입장에서, 모세가 창세기를 집필할 때 두 개의 독립된 자료(문서 A: 엘로힘 문서, 문서 B: 야훼 문서)를 비롯해 여러 단편 자료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구는 오경이 하나의 저자가 아닌, 복수의 출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문서설’의 효시로 평가된다.


- 이후 요한 아이히혼은 아스트릭의 가설을 창세기뿐 아니라 오경 전체로 확장시켜 적용하면서, 문서설의 기본 구조를 정립했다.


2) 단편설 (Fragmentary Hypothesis)


문서설이 비교적 긴 연속적 자료들을 상정한 것과 달리, 단편설은 오경의 기원을 더 짧고 파편적인 이야기 단위들에서 찾았다.


- 알렉산더 게데스는 오경이 원래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수많은 작은 이야기 단편들의 집합체라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 단편들은 오랜 세월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하나의 서사로 엮였다. 이러한 가설은 오경 곳곳에서 발견되는 서사적 단절과 비일관성을 설명하는 데 강점을 지녔다.


3) 보충설 (Supplementary Hypothesis)


보충설은 문서설과 단편설을 절충하려는 시도였다.


- 하인리히 에발트는 오경의 형성이 하나의 중심 문서로부터 출발했다고 보았다.

그는 가장 오래되고 중심적인 ‘엘로힘 문서’가 존재했으며, 이후 야훼 전승을 보유한 후대 편집자가 여기에 새로운 자료들을 보충하여 현재의 형태를 이루었다고 설명했다. 이 가설은 오경의 전체적 통일성과 부분적 불일치를 동시에 설명하려는 균형 잡힌 시도로 평가된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제시된 이 세 가지 가설은 오경 형성의 복합성을 이해하기 위한 초기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 문서설은 ‘출처’의 존재,

- 단편설은 ‘이야기 단위’의 중요성,

- 보충설은 ‘편집’의 역할을 각각 부각시켰다.


이러한 세 접근의 경쟁과 상호 보완은 19세기 후반 율리우스 벨하우젠에 의해 종합적 문서설로 집대성되며, 오경 연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결정적 발판이 되었다.



3. 벨하우젠의 종합과 고전 문서설(JEDP)의 완성


19세기 오경 연구는 율리우스 벨하우젠에 의해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이전 세대 학자들의 단편적 연구 성과를 하나의 정합적이고 통합적인 이론 체계로 종합하여, 이른바 고전적 4문 서설(JEDP)을 확립했다. 그의 모델은 압도적인 설득력을 지니며 20세기 중반까지 오경 연구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 모든 오경 연구는 그의 이론에 대한 지지·비판·변형 중 하나의 형태로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정적인 두 가지 통찰


벨하우젠의 이론은 그보다 앞선 두 학자의 발견에 기초한다.

이 두 통찰은 오경 각 자료의 상대적 연대와 신학적 발전 단계를 설정할 수 있는 결정적 기준점을 제공했다.


1) 데 베테(1780-1849)의 발견

데 베테는 신명기(D)의 핵심 법규인 ‘중앙 성소 규정’(신 12장)이 기원전 622년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왕하 22–23장)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음을 입증했다(1805년). 이는 오경의 한 부분을 이스라엘 역사상 구체적이고 연대가 확정 가능한 사건과 연결시킨 최초의 시도로서, 이후 다른 문서들(J, E, P)의 상대적 연대를 추정하는 연대기적 닻의 역할을 했다.


2) 그라프와 쿠에넨의 재해석

이전까지 학자들은 제사장 문서(P)를 가장 오래된 자료로 보았다.

그러나 그라프와 쿠에넨은 포로기 이전의 예언서들(예: 아모스, 호세아)에 P 문서의 복잡한 제의 규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를 근거로 그들은 P 문서가 가장 오래된 자료가 아니라, 오히려 포로기 이후에 형성된 가장 후기 문서임을 입증했다. 이 발견은 기존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혁명적 전환이었다.


JEDP의 연대 재구성


벨하우젠은 위 두 가지 통찰을 종합하여, 오경의 네 문서가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의 신학적 전통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그는 제사 문서(P)를 스스로 “Q” (liber quatuor foederum, ‘네 언약의 책’)이라 부르며, 아담·노아·아브라함·시내산의 네 계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연대 재구성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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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하우젠은 이 연대 구성을 이스라엘 종교사의 발전 단계와 일치시켰다. 즉, 신앙이 점차 제도화되고 형식화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은 변증법적 발전 도식으로 제시했다.


역사–종교적 발전 도식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신앙 (J) → 예언자적 도덕 종교 (D) → 형식화된 법률주의 종교 (P)

그는 초기의 자유롭고 생명력 있는 신앙(J)이 예언자 전통(D)을 거치며 도덕적·중앙집권적 신앙 체계로 발전하고, 마침내 제사장 중심의 율법 종교(P)로 경직되었다고 보았다. 이는 루터교 신학의 ‘율법과 복음’의 대립 구조를 역사적·비평적 틀에 적용한 것이며,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과 낭만주의적 종교관이 반영된 결과였다.


평가와 한계


벨하우젠의 모델은 오경 연구에 체계적 분석틀을 제공했고, 성서비평을 문헌학·신학·역사학의 교차점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업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종교의 ‘발전’ 혹은 ‘퇴화’ 도식은 포로기 이후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19세기 유럽의 개신교 중심적·서구 합리주의적 전제가 강하게 투영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하우젠의 종합은 오경 연구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그의 이론은 이후 모든 학문적 논의의 출발점이자 반박의 기준점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경 형성론의 해석학적 좌표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4. 고전 문서설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모델의 모색 (20세기 후반 ~ 현재)


20세기 후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기존 학문 체계와 절대적 권위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성서를 더 이상 단일한 ‘저자’의 산물이 아닌, 공동체의 신앙 전승이 집약된 문학적 정경으로 읽으려는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다. 그 결과, 벨하우젠의 고전 문서설은 근본적인 재검토의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J와 E 문서의 실체와 연대에 대한 비판은 문서설의 토대를 심각하게 흔들었다. 이는 곧 오경의 형성을 새롭게 설명하려는 다양한 대안 모델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문서설에 대한 주요 비판 논점


1) J와 E 문서에 대한 비판


고전 문서설의 가장 오래된 두 축인 J 문서와 E 문서는 20세기 후반 들어 가장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 E 문서의 실체에 대한 회의론

다수의 학자들은 E 문서로 분류된 본문들이 실제로는 J나 P에 속하지 않는 잔여 자료들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즉, E는 독립적인 신학적 기획이나 일관된 서사 구조를 가진 문서가 아니라, 분류의 편의상 가설적으로 설정된 범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J 문서의 존재와 연대에 대한 비판

독일의 구약학자 롤프 렌토르프는 J 문서의 통일성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오경의 주요 서사 구조를 분석하면서, 족장 이야기(약속의 신학)와 출애굽–광야 이야기(해방의 신학) 사이에 명확한 주제적 단절이 존재함을 지적했다. 따라서 이 두 서사 블록을 하나의 저자(J)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경은 처음부터 ‘긴 연속 문서’가 아닌, 독립적인 전승 단위들의 집합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기원 역사’, ‘조상 이야기’, ‘출애굽 전승’ 등 더 큰 전승 단위들이 오랜 세월 독자적으로 발전하다가 후대에 편집된 결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고전 문서설 이전의 단편설에 가까운 방향으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2) 방법론적 비판


문서설은 오경을 마치 근대적 의미의 “저자 문학”, 즉 처음부터 완결된 구조를 구상한 개인 저자의 작품처럼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오경은 수 세기에 걸친 구전과 기록, 편집, 보충의 반복적 축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전승 문학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에서 학자들은, 오경 연구의 초점을 개별 저자를 추적하는 데 두기보다는, 전승이 형성되고 결합되는 역사적 과정 자체를 탐구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즉, 오경은 한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신앙이 축적된 “이야기의 역사적 네트워크”라는 인식이 확립되었다.


대안적 모델의 등장


이러한 비판들을 수용하며, 20세기 후반 이후 오경의 형성을 새롭게 설명하려는 여러 대안적 접근이 제시되었다.


1) 전승사적 접근 (이야기 고리 모델)


롤프 렌토르프와 에르하르트 블룸에 의해 발전된 이 모델은 분석의 출발점을 문서가 아닌 ‘이야기 고리’로 설정한다.

- 아브라함 이야기, 야곱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 등은 각각 독립적인 전승 단위로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했다.

- 이러한 이야기 고리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두 가지 상이한 편집 작업 즉, 신명기계 편집(KD, Komposition-D)과 제사계 편집(KP, Komposition-P)을 통해 통합되었다.

- 최종 오경은 평신도적 신명기 전통과 제사장적 전통이 타협과 융합을 이루며 형성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접근은 오경을 단일한 ‘문서의 병합’으로 보는 대신, 오랜 시간에 걸친 전승의 융합과 신학적 협상 과정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2) 뮌스터 오경 모델


페터 바이마르와 에리히 쳉어가 주도한 이 모델은 단편설과 보충설의 요소를 결합한 종합적 접근을 제시했다.

- 초기에는 독립적인 이야기 단위들(단편설적 요소)이 존재했다.

- 이들이 기원전 7세기경, ‘예루살렘 역사서(JG)’와 ‘신명기’라는 두 개의 기초 자료로 1차 집대성되었다.

- 이후 바벨론 포로기와 귀환기를 거치며, 신명기계(D)와 제사계(P) 편집자들이 여러 단계의 보충을 수행하여 현재의 오경이 완성되었다.


이 모델은 오경의 형성을 “누적적”이고 “다층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며, 단일 저자 중심의 전통적 문서설을 대체했다.


종합 평가


이처럼 20세기 후반 이후의 연구는 오경 연구를 ‘JEDP’라는 단일 해답 모형에서 벗어나, 다층적 전승과 편집의 복합 과정을 탐구하는 다원적 연구로 전환시켰다.


이는 오경을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 아닌, 수 세기에 걸친 신앙의 해석사로 이해하게 만든 결정적 전환이었다.


결국 고전 문서설에 대한 비판은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오경의 복합성과 신학적 깊이를 더 정교하게 드러낸 “해석학적 확장”이었다. 오늘날 오경 연구는 더 이상 ‘누가 썼는가’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전승되고, 편집되고, 신학적으로 형성되었는가’를 묻는 단계로 진입했다.



5. 현대 오경 연구의 동향: 수렴과 발산


고전 문서설이 해체된 이후, 현대 오경 연구는 단일한 지배 패러다임 없이 다양한 이론들이 공존하고 경쟁하는 다원적 국면을 맞이했다. 특정 문서의 존재 여부, 연대, 범위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나, 지난 수십 년간의 축적된 연구를 통해 학자들 사이에 부분적이지만 의미 있는 합의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현대 오경 연구의 주요 흐름을 정리하고, 학문적 논의가 수렴하는 지점과 발산하는 쟁점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현대 오경 연구의 두 가지 주요 흐름


현대의 오경 연구는 분석의 출발점과 방법론적 초점을 기준으로 크게 두 가지 접근으로 나눌 수 있다.


1) 전달사적 접근


이 접근은 오경의 형성을 ‘성장’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가장 작은 문학 단위(에피소드나 시구)에서 출발하여, 시간이 지나며 다른 전승들이 결합·편집·확장되어 더 큰 이야기 고리를 형성하고, 마침내 오경 전체로 통합되는 전승의 역사를 추적한다.

즉, 본문의 최종 형태 이전에 존재했던 오랜 전승과 편집의 과정을 복원하는 것이 핵심 목표이다.


2) 신문서설 접근


이 접근은 고전 문서설의 기본 틀(J, E, D, P)을 유지하되, 자료 분석을 더욱 정교화하고 제한함으로써 그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이다. 이들은 오경이 실제 존재했던 네 개의 독립적 문서—J, E, D, P—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문서들이 후대 편집자(redactor)에 의해 하나의 통합된 작품으로 결합되었다고 본다.

본문 속의 모순, 중복, 서사적 단절은 이들이 상정하는 독립 문서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간주된다.


현대 오경 연구의 수렴점과 발산점


비록 접근법과 출발점은 다르지만, 현대 연구자들 사이에는 일정한 합의(수렴점)가 형성되었으며,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논쟁(발산점)도 여전히 존재한다.


수렴점 (합의)

1) 복합적 저작성 – 오경은 단일 저자의 작품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여러 저자와 편집의 결과물이라는 점에 폭넓은 합의가 형성되었다.

2) 정치·신학적 알레고리 – 오경의 서사(예: 족장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저자(편집자)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현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라는 점이 인정된다.

3) 법전 간의 문학적 관계 – 십계명(출 20; 신 5), 언약법전(출 21–23), 신명기 법전(신 12–26) 간에는 단순한 유사성을 넘어 직접적인 문학적 재사용과 의식적 개정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공감대를 얻고 있다.

4) 후대의 지속적 편집 – 오경의 기본 골격(JEDP 등)이 형성된 이후에도, 소규모 보충과 재편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발산점 (논쟁)

1) 분석의 출발점 – 신문서설은 정경 본문 내의 모순에서 출발해 독립 문서들을 재구성하는 반면, 전달사적 접근은 작은 문학 단위에서 출발해 본문의 성장사를 추적한다.

2) 구전 전승의 역할 – 신문서설은 각 문서가 공통된 구전 전승을 공유한 결과로 유사성이 생겼다고 보는 반면, 전달사적 접근은 후대 편집자들의 의식적 재사용과 개정을 강조한다.

3) 편집의 성격 – 신문서설은 편집을 단순한 ‘결합 행위’로 보지만, 전달사적 접근은 편집 자체를 창의적 신학 활동으로 간주한다.

4) 오경의 범위 – 최종 편집 이전에 ‘육경’(여호수아 포함) 혹은 ‘구경’(열왕기까지 포함)과 같은 더 큰 문학 단위가 존재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스크린샷 2025-09-29 오후 12.05.27.png 오경 편집 과정에 대한 가설적 도식


통합적 평가


이처럼 현대 오경 연구는 다양한 경로로 전개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의 중요한 공통 인식이 자리한다.

즉, 오경의 최종 형성은 바벨론 유배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귀환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재정립해 가는 과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오경은 단순히 고대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역사적 위기 속에서 ‘정체성을 재구성한 신앙 공동체의 신학적 응답’으로 읽혀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오경을 ‘저작의 역사’에서 ‘전승과 해석의 역사’로 재위치 시키며, 현대 오경 연구가 단일한 해답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 다층적 전승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6. 역사비평 연구의 신학적 의미와 오경의 메시지


오경의 형성사를 추적해 온 지난 200여 년의 역사비평 연구는 단순히 고대 문헌의 기원을 밝히는 고고학적 탐사를 넘어선다. 이 치열한 지적 여정은 오경의 복합적 구조와 내적 다양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속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를 더욱 깊고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오경이 단일한 저자의 산물이 아닌, 서로 다른 시대와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 층층이 쌓인 다층적 텍스트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신학적으로 깊은 함의를 지닌다.


역사적 위기에 대한 신학적 응답


역사비평은 오경의 형성과 편집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 속의 위기, 즉 북왕국의 멸망, 바벨론 유배, 페르시아 치하의 귀환에 대한 신앙적 대응의 산물임을 밝혀냈다. 각 시대의 공동체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과거의 전승을 새롭게 읽고 재구성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해석했다.


즉, 오경은 단순히 과거 사건의 연대기적 기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체적 역사에 대한 신학적·신앙적 응답의 결과물”이다.


그 안에는 절망 속에서 미래를 모색하려는 공동체의 신학적 상상력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해석의 노력이 녹아 있다.


다양성과 통일성의 신학


오경의 최종 편집자들은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과 상충하는 율법들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단순히 통합하거나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차이와 긴장을 의식적으로 보존하는 편집 전략을 선택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절충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왕정 없이 살아가야 했던 귀환 공동체의 현실적 요구에 대한 실천적 응답이었다.


- 하나님 표상의 다양성:

창세기의 ‘가족 수호신’과 같은 인격적 하나님, 출애굽기의 ‘전투적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시대의 신학을 반영하지만, 오경 안에서는 이러한 상반된 표상들이 긴장 속의 조화로 공존한다.


- 상충하는 율법의 병존:

종에 관한 세 가지 법전(언약법전, 신명기법전, 성결법전)은 서로 다른 시대와 신학적 관점을 반영하며, 동일한 주제에 대해 상이한 규정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자는 이를 조정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러한 불균형과 모순의 보존은 곧 오경이 정치적·종교적 타협의 결과이자 위대한 종합의 시도임을 보여준다.

최종 편집은 다양한 전승과 분파가 공동체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중재의 과정이었다.

그 결과, 오경은 단일한 정답을 제시하는 교리서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공존하며 대화하는 ‘신앙의 장’이 되었고, 후대의 독자와 공동체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토론하고 성찰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재구성하도록 초대하는 열린 책이 되었다.


형성사가 곧 메시지다


성서학자 장 루이 스카가 통찰했듯,

“오경의 역사는 죽음과 부활의 역사이며, 유배 이후 되살아난 이스라엘의 첫 증언이다.”


즉, 오경의 복잡한 형성 과정 자체가 곧 그 메시지이다.

그것은 정태적인 법전이나 신화가 아니라, 국가의 붕괴와 공동체의 해체라는 절망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며 정체성을 재구성한 신앙의 기록이다.


오경의 각 층위는 마치 신앙의 지질학적 단면과 같아서, 재앙적 현실 속에서도 과거의 약속을 새롭게 읽어내고, 그 약속 속에서 미래의 소망을 다시 세워간 공동체의 영적 여정을 증언한다.


결어


역사비평 연구는 오경을 더 이상 박제된 고대 문헌으로 읽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의 고뇌가 살아 있는, ‘성장하는 텍스트’로 이해된다.

따라서 오경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가 위기의 시대 속에서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묻도록 이끄는 현재적 말씀으로 다가온다.


결국 역사비평은 신앙을 해체하는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형성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지속적 자기 계시와 인간의 응답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신학적 통찰의 통로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경을 통해, ‘말씀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의 해석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인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참고자료

1. ⟪오경의 형성과 그 의미⟫ 김근주, 2024. 5월 강의 자료

2.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 피터 엔즈, CLC

3.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김근주, 성서유니온

4. ⟪성서의 형성⟫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 존 바턴, 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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