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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자주의 친구들을 위하여... (은유를 다큐로)

The Song of Solomon Illustrated _ H.Den

by KEN

풍자 잡지 ⟪The Wittenburg Door⟫(비텐베르크의 문)은 1996년 11-12월호에 일러스트 한편을 공개한다. 이 삽화는 구약성서(아가서 4:1-7; 7:2-5)의 내용을 텍스트가 지칭하는 그대로 그린 것이다.


스크린샷 2025-10-21 오후 5.14.49.png “The Song of Solomon Illustrated (for our literalist friends)” _ Hart Den


그림의 기초가 되는 원 소스, 아가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아가서 4:1-7, 11, 우리말성경]
솔로몬: 내 사랑 그대여,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너무나 아름다워요. 베일 너머 당신의 눈은 비둘기 같군요. 당신의 머리칼은 길르앗 산에서 내려오는 염소 떼와 같네요. 당신의 이는 목욕하고 나와 방금 털을 깎은 암양 떼와 같습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짝을 이루어 그 가운데 홀로된 것이 없네요. 그대의 입술은 새빨간 매듭 같고 그대의 입은 사랑스럽습니다. 베일 너머 그대의 뺨은 쪼개 놓은 석류 한쪽 같아요. 당신의 목은 무기를 두려고 세운 다윗의 탑과 같으니 거기에는 1,000개의 방패들, 전사들의 방패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대의 두 젖가슴은 백합화 사이에서 풀을 뜯는 두 마리 쌍둥이 노루 같아요.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몰약의 산을, 유향의 언덕을 오르겠습니다. 내 사랑이여,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없습니다. (중략) 내 신부여, 그대의 입술에서는 꿀송이가 흘러나오고 그대의 혀 밑에 맺혀 있는 젖과 꿀이 느껴집니다. 당신 옷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네요.
[아가서 7:2-5, 우리말성경]
당신의 배꼽은 혼합 포도주를 가득 부은 둥근 잔 같고 그대의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습니다. 그대의 젖가슴은 암사슴의 쌍둥이 새끼 같고 그대의 목은 상아탑 같습니다. 그대의 눈은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헤스본 연못 같고 그대의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탑 같습니다. 그대의 머리는 갈멜 산처럼 그대에게 왕관이 되고 그대의 머리칼은 붉은 융단 같습니다. 왕이 그 머리칼에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성서의 시어를 '문자적'으로만 '직역'해 조합할 경우

• 눈 = 비둘기 — 눈을 비둘기 형상으로 표현. (아 4:1)
• 머리칼 = 염소 떼 — 머리 위에 염소 무리가 매달려 떨어지는 모습. (아 4:1; 6:5)
• 이빨 = 갓 깎은 암양 떼 — 치열을 양 떼로 묘사. (아 4:2)
• 입술 = 붉은 실, 관자놀이 = 석류 조각 — 입술은 가는 선, 관자놀이엔 석류 단면이 붙음. (아 4:3)
• 목 = 다윗의 망대 — 몸통이 원형 석축 탑으로 그려지고, 방패 천 개가 걸려 있음. 사다리와 인부까지 그려 '걸려 있음'을 강조. (아 4:4)
• 유방 = 사슴 새끼 두 마리 — 가슴 부위에 새끼 사슴 두 마리가 백합 사이에 있는 모습. (아 4:5)
• 입·혀 = 꿀과 젖 —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고, 혀 밑에 젖과 꿀”(아 4:11)을 시각화(꿀단지/방울).
• 옷의 향기 = 레바논의 향기 — 목걸이·장식 주위에 향낭·향기가 퍼지는 암시. (아 4:11)
• 배꼽 = 둥근 술잔, 배 = 밀 무더기 — 허리 아래에 잔 모양과 밀 이삭·더미가 묘사. (아 7:2)
• 목(다른 시구) = 상아 탑, 눈 = 헤스본의 못 — 상아빛 탑의 질감, 눈은 연못처럼 큼직한 타원으로 처리. (아 7:4 상반)
• 코 = 레바논 망대(다마스쿠스를 향함) — 코 자체가 또 하나의 망대로 길게 돌출되어 “다마스커스를 향함”이라는 방향성 표지까지 붙어 있음. (아 7:4 하반)
• 주변 식생/소품 — 백합, 밀 이삭, 향낭, 방패, 사슴 등은 위 비유들을 배경으로 보강하는 소도구들.


Hart Den의 1978년 작품 〈The Song of Solomon Illustrated for Our Literalist Friends〉(솔로몬의 노래: 우리의 문자주의 친구들을 위하여)는 구약성서의 아가서를 문자적으로만 극단적으로 해석해 시각화한 풍자작품이다.


그림은 시적 비유를 그대로 형상화함으로써, 성서의 시적 언어를 ‘문자 그대로’ 이해할 때 발생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드러낸 것이다. 다윗의 망대 같은 목, 염소 떼 같은 머리카락, 레바논의 탑 같은 코 등, 본래 은유로 쓰인 표현들이 모두 실제 이미지로 조합되어 하나의 괴이한 인물이 탄생했다. 이는 곧 성서를 문학적·상징적 언어로 읽어야 함을 일깨우는 시각적 풍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웃지 못할 상황”이 2025년 현재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일부 근본주의 신앙인들은 여전히 ‘문자적 해석’의 틀에 갇혀 있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성서 전체가 아닌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나 교리적 이익에 부합하는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문자적인 적용을 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 풍자 삽화가 조롱한 대상은, 단지 20세기 미국의 일부 신앙인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막론한 해석의 게으름과 자기확증적 독서 태도라 할 것이다.



'솔로몬의 노래': 문자주의자 친구들을 위한 풍자적 고찰



I. '문자 그대로'라는 우상


Hart Den의 〈솔로몬의 노래〉 삽화는 단순한 희화나 조롱을 넘어, 성경 해석학의 특정 방법론, 즉 시적 장르에 대한 엄격한 문자주의 적용이 지닌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정교한 시각적 논평이다. 이 작품은 성경 해석의 한계와 경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귀류법적 시도로, 문자주의가 얼마나 비합리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입증한다.


특히 이 삽화는 〈아가서〉 4장과 7장에 등장하는 열정적 사랑의 은유들을 그 문학적 맥락이나 시적 상징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표면적 단어의 의미만을 따라 재현한다. 그 결과는 의도적으로 기괴하고 파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며, 문자적 독해가 본래의 미적·신학적 의미를 얼마나 쉽게 왜곡하고 파괴하는지를 강렬하게 폭로한다.


즉, Den의 풍자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해체하는 해석학적 우화라 할 수 있다.


(1) 시각적 비평


Hart Den의 삽화가 겨냥하는 것은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시적 장르에 부적절하게 적용된 성경 문자주의의 한계이다. 아가서는 본질적으로 교리를 전달하는 교리문이 아니라, 비유적 언어와 시적 이미지를 통해 진리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서구 복음주의 전통은 이러한 시적 감수성보다는, 성서의 ‘무오류성’을 과학적‧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태도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영감의 시학적 관점’이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하고 역설적인 본성에 대한 미묘한 해석’보다는, 텍스트를 논리 명제와 과학적 공식으로 환원하려는 욕망이 우세하다.


Den의 만평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예리하게 풍자를 가한다. 그의 그림은 과학적 논리와 체계적 신학이 시적 언어에 강제로 적용될 때 어떤 미적·해석학적 빈곤이 발생하는지를 시각적으로 고발한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이 삽화는, 그들의 방법론이 어떤 괴이하고 불모의 결과물을 낳는지를 거울처럼 비춰준다. 동시에 텍스트가 본래 의도했던 미적 감흥과 상징적 깊이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2) 그로테스크의 수사학적 힘


Hart Den의 삽화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단순한 희화가 아니라, 해석학적 충격 요법으로 기능한다.

〈아가서〉 속 연인은 본래 이상화된 사랑의 상징으로 의도되었다. 그러나 문자주의적 독해는 이 이상화를 파괴한다. 추상적 속성(예: 고결함, 아름다움, 영성)이 구체적 사물(예: 망대, 양 떼, 염소 떼)로 치환되면서, 시적 상징은 갑작스레 물리적 괴물로 전락한다. Den은 바로 이 파괴의 과정을 끝까지 밀어붙여, 연인의 형상을 기괴하고 괴물적인 존재로 시각화함으로써 문자주의가 낳는 결과를 극대화한다.


이러한 심미적 불쾌와 당혹, 즉 그로테스크의 충격은 독자에게 단순한 웃음을 넘어선 지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시각적 예언처럼 기능하여,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이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14)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결국 Den의 기괴함의 표현(그로테스크)은 신학적 진리를 왜곡했다기보다, 오히려 문자주의가 텍스트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폭로하는 미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즉, 혐오와 웃음, 불쾌와 통찰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독자는 비로소 ‘해석의 오류’를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II. 해석적 오류: 장르, 맥락, 그리고 텍스트의 영성


Hart Den의 풍자는 성경 해석시에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흔히 반복되는 오류 즉, 장르 인식의 실패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아가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유대교와 기독교 해석 전통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논의되어 온 신학적 쟁점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아가서의 진정한 문학적 맥락


아가서는 본질적으로 ‘고대 근동의 연애시’의 전통에 속한다. 비록 성경 내에서는 잠언이나 전도서 등 지혜 문학으로 (편의상) 분류되지만, 그 내용은 여타의 성경 문헌과 달리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관능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언어로 가득하다.


일부 학자들은 아가서가 고대 연애시의 시적 감성과 지혜 문학의 도덕적 통찰을 결합한 독특한 형태로, 독자에게 연인들의 관계를 통해 ‘현명한 사랑’, 즉 성숙하고 질서 있는 사랑을 배우도록 의도되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가서가 논리적 명제나 교훈적 진술이 아니라 비유와 상징을 통해 진리를 암시하는 시적 예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 속에서 아가서는 시대와 전통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 알레고리(풍유)적 해석:

가장 오래된 전통으로, 아가서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혹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상징하는 노래로 본다.

- 자연적 해석:

본문을 결혼의 기쁨과 인간 사랑의 축복을 노래하는 시로 이해한다.

- 유형론적 해석:

마르틴 루터는 과도한 풍유 해석을 거부하면서도, 단순히 문자적 사랑 노래로 읽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솔로몬 치하의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찬미하는 노래로 해석했고, 근대 이후 학자들은 나아가 솔로몬과 이방 신부의 결합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예표하는 상징으로 읽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적 전통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인식에 도달한다.

즉, 아가서는 시적 비유와 상징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는 문학적 텍스트이며, 단순하고 비문맥적인 문자적 독해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2) 시에 대한 문자주의의 결함


문자주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저자가 비유나 은유를 명시적으로 의도하지 않는 한, 구절은 역사적 사실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_김동명의 시는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러나 시적 언어에서 비유와 은유는 단순한 수사적 장식이 아니라, 의미 전달의 본질적 방식이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그 백성 간의 상호적 사랑을 시적 이미지와 비교를 통해 드러내는 텍스트”로서, 단순히 사실적 묘사가 아닌 상징적·영적 소통의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문자주의는 이러한 언어의 본질을 무시하고, 시적 비유를 ‘사실의 진술’로 오독함으로써 심각한 해석상의 왜곡을 초래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자는 저자와 원독자의 의도를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현대적 문화 인식을 텍스트에 투사하게 된다.

Den의 삽화는 이 과정을 시각적으로 풍자한다. 그는 ‘염소 떼’, ‘밀 더미’와 같은 비유적 요소를 실제 사물로 변환시켜, 비유의 형상만 남고 그 의미는 사라지는 문자주의의 폐단을 드러낸다.


아가서의 온전한 해석은 단순히 어학적 분석이 아니라, 본문이 지닌 ‘성화된 애정의 상태’를 영적으로 분별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문자주의는 이러한 영적 분별의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텍스트의 ‘아르케(골수, 핵심, 의도)’ 즉 내면의 생명력을 놓치게 만든다.


(3) 문자주의가 유도한 신성모독에의 역설


역사적으로 알레고리적 해석은 아가서의 관능적 언어를 신적 사랑의 상징으로 전환함으로써, 이 책이 정경에 포함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러나 Den이 보여준 것처럼, 이 언어를 문자 그대로 형상화하면 결과는 미학적으로 혐오스럽고 신학적으로 불경스러운 이미지가 된다.


이는 문자주의적 접근이 단순히 본문을 오해하는 수준을 넘어, 성스러운 사랑의 미학적 경험을 파괴하고 텍스트를 신성모독적 영역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문자주의자는 자신이 텍스트의 역사적 실재성을 옹호한다고 믿지만, Den의 풍자는 역설적으로 그 결과가 본문의 영적 깊이와 미적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점을 폭로한다.


결국 Den의 삽화는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해석의 본질적 질문 “텍스트는 어떻게 성스러움을 말하는가?”에 대한 시각적 논증이다. 그의 그림은 문자주의가 텍스트의 표면을 붙잡는 순간, 그 속에 담긴 영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신학적 진리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글자를 넘어, 노래(시)의 정신으로


Hart Den의 〈솔로몬의 노래〉 삽화는 단순한 풍자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만화의 형식을 빌려 성경 해석의 심층적 오류를 해부한 비평적 학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Den은 그로테스크의 전통을 통해, 시적이고 성스러운 텍스트에 부적절한 해석학적 모델 즉, 엄격한 문자주의를 적용하는 미학적·신학적 실패를 신랄하게 폭로한다.


아가서는 본래 남녀 간의 사랑의 아름다움과 열정을 노래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연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찬가이다. 이 노래는 단순한 낭만의 서정시가 아니라, 신적 사랑에의 참여와 감응의 기쁨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쓰였다.


이러한 시적 은유에 대해 Den의 풍자가 던지는 물음은 오늘날의 신앙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어떻게 성경의 영감받은 복합성과 상징성을 온전히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문자 그대로’ 읽는 오류, 그리하여 본래의 깊이와 생명력을 훼손하는 태도를 피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은유의 물리적 형태가 아니라, 은유가 지시하는 진리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Hart Den의 그림은 우리에게 한 가지 묵직한 경고를 남긴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글자의 종’이 아니라 ‘영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글자를 넘어 노래(시)의 정신, 곧 성경이 본래 의도한 생명의 울림과 신적 리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Fin.



참고자료

1. talivisualmidrash.org.il, The Song of Solomon Illustrated (for our literalist friends)

2. Karl Möller(2013), The Song of Solomon illustrated (for our literalist friends)

3. wittenburgdoor.com

4. 의약뉴스, '내 마음은 호수, 그대 배 저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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