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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의로운 국가』 미국 억류 사태에 즈음하여...

『Empire and Righteous Nation』 _ 2017 강연

by KEN

도입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나)

2025년 9월 4일,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현장에 대규모 연방 이민단속이 진행되어 한국인 근로자 약 317명을 포함한 475명이 체포되었다. 일부 한국인들은 B-1(출장) 비자 또는 ESTA(전자여행허가) 등 정식 단기 비자로 입국했으나, 미국 측은 “체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활동”이라 판단해 단속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국 정부 및 LG 등의 협의로 8일 만에 대부분이 석방돼, LG가 마련한 대한항공 전세기를 통해 2025년 9월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귀환한다. 전세기에는 한국인 316명(남성 306, 여성 10명), 중국·일본·인도네시아 노동자 14명 등 총 330명이 탑승했고, 영주권자인 1명은 제외되어 현지에서 법적 소송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억류된 LG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2023년까지 동일한 현장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했던 후배들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17년부터 2023년 말까지 근무했던 직장이며, 주요 생산장비의 공급을 총괄하고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LG생산기술원은 연구원과 기획팀장으로 재직했던, 특별한 애정이 담긴 연구소이다. 또한 시스템 통합(SI)을 총괄하며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던 중 억류된 LG CNS는 입사시험에 합격했던 회사일뿐만 아니라 이후 LG전자와 LG에너지솔루션 재직 시 수많은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했던 기업으로, 억류된 이들은 실질적인 동료이자 후배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억류 소식이 전해진 뒤 이어진 일주일은 분노와 안타까움이 교차하며 밤잠을 이루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이어진 귀환 소식은 안도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미국의 무도하고 반문명적이며 퇴행적인 처사에 대한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현실은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생존을 위한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시점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이 글을 긴급히 정리하게 되었다.


자주와 자존을 지닌 대한민국과 국민, 그리고 우리 자유 시민들이 전 세계에서 차별받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겪지 않는 존중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에 그치지 않고 산업계와 정부가 함께하는 총체적 대응 전략이 마련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주요 교역 상대국인 EU와 인도를 비롯해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들과의 전략적 관계 형성 역시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이번에 드러난 미국의 무도하고 무례한 행위는 그들이 결코 문명국이라 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진정한 우방으로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신뢰를 스스로 저버린 그들과의 관계 또한 지혜롭고 냉철하게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제국과 의로운 국가 – 600년간의 중국-한국 관계 (강연 요약)


이 강연 시리즈는 2017년 하버드대학교 페어뱅크 중국연구센터가 주최하고, 아시아센터, 한국학연구소, 라이샤워 일본연구소가 후원하여 열렸다. 1985년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이 강연은 동아시아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심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이번 주제인 중국-한국 600년 관계는 시의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마이클 소니(Michael Szonyi) 페어뱅크 센터 소장은 강조했다.


주 발표자는 하버드대학교 S.T. 리 미-아시아 관계학 교수이자 런던정치경제대학(LSE) 국제사 교수로 재직했던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ad)였다. 그는 『The Global Cold War』로 밴크로프트 상을, 『Restless Empire: China and the World Since 1750』으로 아시아 소사이어티 도서상을 수상한 저명한 학자다. 각 강연의 토론자로는 커크 라슨(Kirk Larsen), 에즈라 보겔(Ezra Vogel), 이성윤(Sung-Yoon Lee) 교수가 참여했다.

(이 강연은 그의 저서 『Empire and Righteous Nation』 600 Years of China-Korea Relations이 출간되기 4년 전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1. 강연의 세 가지 핵심 개념 (제국, 국가, 의로움)

베스타 교수는 강연 제목인 「제국과 의로운 국가」에 담긴 세 가지 개념을 탐구하면서, 이 제목이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풍자적으로(tongue-in-cheek) 들릴 수 있다고 언급했다.


제국(Empire)

주로 중국을 가리키며, 다양한 형태의 제국적 양상을 포괄한다.

베스타 교수는 제국을 중앙 권위와 중심-주변 관계를 체계적으로 규제하려는 중심부의 사고방식이라는 두 가지 핵심 요소를 통해 정의했다.

모든 제국이 반드시 식민지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한국 내 중국인의 정착은 매우 드물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시아 제국의 행동 양식은 진(秦)과 한(漢) 제국에서 형성되었고, 이는 이후 모든 제국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제국의 전성기”에는 크기와 자원이 곧 힘으로 인식되었다.

중국 제국의 특징으로는 동아시아 내 문화적 중심성, 내외적 위계질서, 관료제적 통치의 강조를 들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조공 체제(Tribute System)는 실제보다 서구 학계, 특히 하버드에서 더 체계적으로 이해된 측면이 있다. 실제로는 중국 외교의 여러 수단 중 하나로, 조공·무역·용어 규범 등이 결합된 틀에 불과했다.

명(明)과 청(淸) 제국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전통적 권위와 지식에 기반한 지배에 의존했다.

토론자의 논평

커크 라슨(Kirk Larsen) 교수는 중국을 제국으로 보지 않으려는 서구적 시각과, 중국 내부의 예외주의(exceptionalism) 논리를 모두 비판했다.

그는 한(漢)과 청(淸) 제국이야말로 제국의 전형적 사례라며, 특히 청 제국은 불평등 조약, 치외법권, 포함 외교(gunboat diplomacy) 등 고도 제국주의(high imperialism)의 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한 실천자였다고 평가했다.


국가(Nation)

주로 한국, 특히 20세기 이전의 한국을 가리킨다.

한국 민족은 최소 3천 년 이상 이어져 온 문화적·언어적 일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대 한국어 역시 고대 한국어에서 기원한다.

베스타 교수는 앤서니 스미스(Anthony Smith)의 정의 ― “역사적 영토, 공통된 신화와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 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은 19세기 유럽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국가’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커크 라슨(Kirk Larsen) 교수 역시 이에 동의하며, 조선은 명확한 영토 경계, 합리적 관료제, 인구 조사, 성씨 제도, 한글 발전 등 국가의 주요 특징들을 광범위하게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의로움(Righteousness, 義 – Yi 또는 Ui)

주로 한국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는 한국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국내외 문제에 대해 의로운 접근을 추구하는 태도가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인의 핵심적 관심사였음을 보여준다.

충성심, 원칙에 대한 충실, 도덕적 적합성과 같은 개념은 송나라 이후 중국에서 발전하여 신유교(Neo-Confucianism)의 핵심 교리가 되었으며, 한국 사회에서 특히 강하게 수용되었다.

의로움은 때때로 정당성(rectitude)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의로움이 주로 도덕적·윤리적 자질을 의미한다면, 정당성은 정해진 형식이나 절차에 부합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실천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었다. 예컨대 1580년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Righteous Army),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 그리고 20세기말 남한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슬로건과 실천적 이상으로 기능했다.


2. 심층 역사: 14세기 후반 ~ 19세기 중반 (제1강)


명과 조선의 출현

14세기 후반, 명 제국(1360년대)과 조선 왕조(1390년대)라는 두 새로운 국가가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명 제국은 중국 전통의 부흥과 주변 국가 및 지역과의 관계 규제에 중점을 두었으며, 필요할 경우 강력한 무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반면 조선은 명보다 훨씬 더 방대한 규모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로, 신유교 이념에 기반한 사회 재편을 목표로 했다. 이는 한국 사회를 신유교 원칙에 따라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로, 엘리트가 주도하는 권위주의적·위계적 체제였지만 대다수 백성의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참여 위에서 운영되었다. 조화, 위계질서, 가족, 자기 수양, 학문, 의로움이 강조되었다.

조선은 매우 이념 중심적인 국가로서, 독단적 성격과 사회 규율을 강하게 요구하는 특징을 지녔다.

그럼에도 조선은 장기적인 생존력과 높은 국가 역량을 보여주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친 동아시아 대전쟁(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극복했다. 이 시기에 명이 결국 붕괴한 것과 달리, 조선은 존속하며 내부 결속력을 입증했다.


청의 지배와 조선의 대응

17세기 초 만주족이 중국을 장악하면서, 조선 엘리트의 중국관은 크게 달라졌다. 일부는 중국에서 문명이 상실되었으며 그것을 한국이 보존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조선의 통치자들은 현실적 권력 구도를 고려해 청을 중국의 정통 통치자로 인정하고, 과거 명과 맺었던 것과 같은 조공 관계를 이어갔다.

동시에 조선은 청의 영향력이 국내에 깊숙이 스며드는 것을 엄격히 차단했다. 조공 사절단의 중국 방문은 불필요한 사상의 유입을 막기 위해 철저히 통제되었으며, 청 관리들의 조선 방문 역시 정부가 지정한 인물과의 접촉만 허용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형태의 주권(uncommon form of sovereignty)을 통해 조선은 청 제국의 종속국임을 명목상 인정함으로써 국내 권력을 공고히 하고, 동시에 주변 세력으로부터 중국 황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은 문화적·역사적·정치적 이유로 중국을 유교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했으며, “중국은 문명의 정점”이라고 묘사했다.

한편 청의 대조선 정책은 19세기 중반까지 기본적으로 “잘 돌아가는 것은 건드리지 않는다(leave well enough alone)”는 기조였다. 청은 조선 엘리트의 불만을 알고 있었지만, 존중과 안정 유지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3. 변화와 전환: 19세기 중반 ~ 20세기 후반 (제2강)


동아시아의 변화와 청의 위기

19세기 초, 동아시아는 유럽과 북미 세력의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고, 국가 간 관계 또한 재편되기 시작했다.

청 제국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전략적·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베스타 교수는 그 원인이 인구 과잉이나 자원 부족이 아니라, 불필요한 전쟁, 재정 기반의 약화, 지도력 부재, 그리고 개혁 의지의 부족과 같은 정치적 결정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같은 시기 조선은 농업 국가의 성격을 유지했지만, 강력한 이념적 기반 위에 상당한 국가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농민층의 부담은 점차 가중되었다.

일본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빠른 상업화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의 강화를 이루며,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새로운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다.


조선의 초기 대응과 이항로의 관점

동아시아 질서 변화에 직면한 조선의 초기 대응외부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아편 전쟁과 19세기 중반의 대규모 봉기를 통해 드러난 중국의 약화를 우려했지만, 이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중국에 대한 이념적·정신적 의존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유학자 이항로(李恒老)는 19세기 중반 저술에서 “중국 문명이 야만인을 만나면 그들을 문명화한다”라고 주장하며, 중국을 “우주의 중심” 으로 묘사했다. 그는 유럽인들이 중국 문명과 접촉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위대한 도(道)”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베스타 교수는 이러한 인식이 19세기 한국인의 방향 상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설명했다.


청의 적응적 제국주의와 일본의 부상

청은 제국주의적 기술을 학습하며 다른 제국주의 세력과 경쟁했다. 조선에 고문을 파견해 “이것이 제국이 운영되는 방식”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통해 처음 통상 시도를 했으나, 조선군의 공격으로 선박이 불타면서 실패했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며 무역을 강제로 개방시켰다. 일본은 이를 조선이 중국의 조공국 지위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 조약은 조선 정치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조선 국가와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주장했다. 이러한 긴장은 결국 1894~95년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는데, 베스타 교수는 이를 “300년 전 동아시아 대전쟁의 재현”이자 “외세 개입이 심했던 한국 내전”으로 규정했다.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지배가 확립되었고, 식민지 정착(settlement colonialism)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정체성을 철저히 말살하고, 일본식 정체성으로 대체하려 했다.


한국 민족주의의 탄생과 분단

외세의 점령과 식민지화 시도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를 낳았다. 한국 민족주의는 주로 해외 망명지에서 형성되었으며, 강력한 국가, 독자적이고 순수한 한국 문화,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현대적 조직과 기술을 갖춘 국가로서의 한국을 구상했으며, 한국 공산주의는 중국의 사례에 영향을 받아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의식을 공유했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 공산주의를 독자적인 운동으로 볼지, 아니면 중국 공산주의의 일부로 볼지를 모호하게 인식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한국인의 중국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반중(反中) 선전은 오히려 많은 한국인에게 중국을 더욱 가까운 존재로 느끼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군사 점령은 결국 두 개의 분리된 정권을 낳았다. 베스타 교수는 이 시기 이미 서로 다른 한국 민족주의 프로젝트들이 충돌하고 있었으며, 국제 냉전 구도가 굳어지기 전인 1948년 초까지 남북이 합의했다면 초강대국들도 통일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주장한다.

중국 내전에는 상당수의 한국인이 양측에서 참전했고, 북한은 중국 공산당의 후방 기지로 활용되었다. 이는 훗날 북중 관계에서 감사의 빚(debt of gratitude)으로 언급되었다.


한국 전쟁과 전후 발전

한국 전쟁은 국제전이자 동시에 한국 내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무력 통일 시도를 승인하면서 전쟁이 발발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참전은 이념적 공감대와 동아시아 혁명에 대한 책임 의식(마오쩌둥이 언급한 “어린 동생” 발언)에서 비롯되었다.

전후 북한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동시에 소련과의 관계에서도 균형을 추구했다.

남한은 박정희 정권 시기 개발 의제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발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중국-남한 관계는 덩샤오핑 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전환되었다. 덩샤오핑은 정치적 정당성보다 경제 발전을 우선시하며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재건을 추진했고, 냉전 종식 이후 1992년 남한을 공식 인정하면서 수교가 이루어졌다. 덩샤오핑 지도부는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민주화 전환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4. 현대 문제: 1990년대 초 ~ 현재 (제3강)


북한의 고난과 중국의 제한적 영향력

1990년대 초반, 두 한국의 국제적 인정, 중국의 개혁 개방, 냉전의 종식, 남한의 민주화와 경제 성장,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 교체(김일성 사망과 김정일 승계) 등 굵직한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기근은 소련 지원의 중단, 구조적 경제 침체, 그리고 정부의 미흡한 정치적 대응이 겹치며 최악의 재앙으로 번졌다. 그 결과 북한 체제는 더욱 폐쇄적이고 내향적으로 변했다.

중국 지도부는 북한 경제가 사실상 중국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음을 인식하고 중국식 개혁을 기대했지만, 김정일은 가문 지위와 민족주의 이념을 약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 개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베스타 교수는 중국이 북한에 정책을 강요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김씨 가문의 민감성을 고려한 중국의 자제 △급격한 개혁이 체제 불안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중국의 우려 △북한의 예측 불가능성(압박 시 미국으로 급격히 선회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이성윤 교수 역시 한국의 지도자들이 역사적으로 후원국의 완전한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중국이 북한에 전면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중국-남한 관계의 급속한 발전

1990년대 초 이후 중국과 남한 관계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으며, 양국 모두에게 전략적·경제적 중요성을 지닌다.

무역, 투자, 기술 이전 규모가 방대하며, 중국은 남한의 최대 교역 파트너이고 남한은 중국의 2~3위 교역국이다. 특히 남한은 대중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양국 경제는 부품과 공급망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남한의 대중 투자는 중국 내 외국인 투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5만 개가 넘는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양국은 서로의 최대 관광 파트너이기도 하다.

한류(K-Soft Power) ― K-뷰티, K-팝, 드라마 등 ― 는 중국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베스타 교수는 이러한 현상이 양국 간 문화적 접점의 힘을 보여준다고 평가하면서, 사드(THAAD) 배치에 대한 중국의 경제 보복(보이콧)은 장기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북한 핵 문제와 중국의 역할

북한의 핵무기 개발 구상은 195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북한의 핵 능력 진전은 중국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2003~2007년 진행된 6자회담에서는 북한이 핵 시설을 폐쇄하는 대신 경제 지원을 받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북한의 비핵화 의지 부족과 미국의 정책적 실수(원조 중단)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났다.

2009년 이후 미국의 대북 제재 강화와 북한의 핵 프로그램 재개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2010년에는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 같은 북한의 도발에 중국이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남한 내 대중 인식 변화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일본보다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지도부는 북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 “어떤 변화도 더 나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안정 유지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북한의 개혁을 통한 점진적 통합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반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한의 통제 불능 붕괴, 난민 발생, 그리고 핵무기 통제 상실이다.

일부 젊은 중국인과 학자들 사이에서는 북한을 “잠재적 적대국”으로, 남한을 “친구”로 인식하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동시에 북한은 중국을 향해 “대국 행세”, “파국적 결과”와 같은 강경한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

베스타 교수는 미국과 중국 간의 추가적 협력만이 북한 핵·미사일 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하며, 비핵화된 북한을 목표로 한 국제 사찰과 단계적 군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또한 남한이 중국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중국이 인식하고, 미래의 통일 한국에 대비하는 것이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5. 토론 및 질의응답을 통한 심화 통찰


한국의 끈기(Stubbornness)와 의로움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김정환 교수의 발언을 인용해, 한국은 2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속에서 존재하기 위해 “매우 끈질겨야 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끈기는 신유교, 공산주의, 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의 지속성 속에 드러나며, 사회적 존경을 획득하고 혼란의 시기에 공동체적 응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중국-북한 관계의 역설

이성윤 교수는 역사적 사례 ― 김일성의 한글 전용 정책, 1956년 중소 지도부의 김일성 비판과 마오쩌둥의 사과, 김정일의 랑군 폭탄 테러 이후 중국의 전투기 지원 ― 를 제시하며, 북한이 도발을 일으킬수록 중국이 오히려 북한을 더 지원하는 역설적 상황이 반복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이는 중국이 개인적 감정보다 국가 이익을 앞세우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중국의 대북 정책 전환점

이성윤 교수는 북한 내부의 총격전, 대규모 지진, 방사능 낙진, 혹은 미군의 중국 국경 진입과 같은 수준의 불안정이 발생할 경우, 중국이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고 북한을 포기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 다만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군사적 "그림자놀이"와 한반도 통일

서니 교수는 사드(THAAD) 배치, 미군의 압록강 진출 가능성 등을 둘러싼 중국-남한-미국 간 군사적 논쟁을 “그림자놀이(shadowplay)”에 비유했다. 베스타 교수는 최근 북한 정세 ― 김정은의 형 암살, 미사일 실험 목적 등 ― 와 관련해 베이징 정책 입안자들이 실제로 큰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하며, 북한의 존재가 더욱 위험해지는 임계점에 도달하면 중국이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통일 한국과 중국-일본 관계

이성윤 교수는 통일 한국이 친미적이고 민주적 성격을 지니더라도 필연적으로 친중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는 지난 150년 동안 중국이 한반도에 행사했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 중 가장 큰 것이 될 것이며, 일본에게는 “악몽”이지만 중국에게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이익이라고 분석했다.


남한 사회의 대중국 정서

이성윤 교수는 2010년 이후 남한 사회의 대중국 정서가 경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깊은 “친중 감정(Sino-philia)”이 잔존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균형자 외교(equidistance)” 발언 등 정책적 표현에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베스타 교수는 중국이 북한의 위협적 정권을 계속 지원한다면 이러한 친중 감정은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역사의 역할

베스타 교수는 한반도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역사적 맥락이 매우 중요하지만, 역사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특히 현재와 같은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는 역사만으로 미래를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역사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혜롭고 영특하게 우리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지속적 번영과 발전을 축원한다.



[참고] 강연자료 공유 (유튜브)

Part 1: Empire and Righteous Nation: 600 Years of China-Korea Relations

Part 2: Empire and Righteous Nation: 600 Years of China-Korea Relations

Part 3: Empire and Righteous Nation: 600 Years of China-Korea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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