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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우리의 신앙관이 아니잖아 친구.

스스로 읽기와 독자적 해석, 질문하는 신앙을 위한 권유

by KEN

사랑하는 친구에게,


요즘 교회를 바라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어. 특히 최근 어느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내 마음속에 오래 품어왔던 질문들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어. 그래서 너에게도 이 이야기를 꼭 나누고 싶었어. 우리 둘 다 교회와 신앙을 오래 함께해 온 친구니까 말이지.


그 교수는 지금 한국 교회 안에 번져가고 있는 ‘극우 개신교’ 현상을 ‘기독교 파시즘’이라는 말로 진단했어. 이건 단순히 정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신앙의 길을 걷게 된다는 아주 본질적인 문제라는 거야.


렌즈를 점검할 때가 왔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영혼 구원과 전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제에 집중했었지. 그땐 교회가 너무 비사회적이었기에 오히려 '광장'과 '정의'라는 메시지가 꼭 필요했어.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어. 많은 교회들이 너무 정치적인 방향으로, 그것도 극우적인 방식으로 치닫고 있거든.


놀랍게도 과거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상징하던 성경구절들—예를 들면 "정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라(아모스 5:24)"—이 이제는 광화문 집회 같은 곳에서 극우적 구호로 사용되고 있어. 대통령의 내란적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뜻'이라 포장되기도 하지. 결국, 성서 자체가 아니라 그 성서를 읽는 ‘렌즈’가 문제라는 게 진단의 핵심이야.


세 가지 성서 해석 렌즈


그래서 그이는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세 가지 해석의 렌즈를 제시했어. 이 렌즈들을 통해 성서를 읽을 때만이, 기독교 파시즘이라는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거지.


첫 번째 렌즈: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기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손으로 기록된 책이야. 인간의 언어와 문화, 상황 안에서 쓰였고, 그렇기에 그 안엔 한계와 오류도 담겨 있다는 거지.


기독교 파시즘은 단일한 진리만을 절대화하면서 의심 없는 순종과 맹신을 요구해. 이건 파시즘이 자라기에 정말 좋은 토양이야.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잖아.


피터 앤스라는 신학자는 성서를 ‘성육신적인 책’이라고 표현했던 거 너도 기억하지? 그 왜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이라는 책, 우리 함께 읽었었잖아.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듯, 성서도 그렇게 두 본성이 함께 있는 책이라는 거 말이야. 그렇듯 성서 안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 이야기, 두 개의 홍수 이야기 그리고 서로 다른 관점의 역사서와 예언서, 네 개의 다른 관점으로 예수님을 기록한 복음서들이 함께 존재하는 거 우리 알고 있잖아. 이건 곧 성서가 처음부터 하나의 획일적인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그대로 담고 있는 책이라는 뜻이기도 해.


성서는 질문을 없애는 책이 아니라, 질문을 품고 살아가게 하는 책이라는 말이 참 와닿았어. 그래서 그 교수는 성서를 "정답지"가 아니라 오히려 "오답 노트"에 가깝다고 하더라. 실수와 갈등, 모순과 실패 속에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말이야.


두 번째 렌즈: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성서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시간적 진리가 아니야. 그것도 철저히 어떤 시대,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쓰인 기록이란 말이지. 너랑 많이 얘기 나눴듯이 당연히 기록하던 특정 시대의 문화와 역사적 정황 속에서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파시즘적 해석은 이 맥락을 무시하고 구절 하나를 뚝 떼어내서 지금 우리 사회에 자기들 입맛대로 적용하지. 성서를 정치 선전용 도구로 쓰는 거야.


어떤 신학대 교수는 12.3 내란 사태 때, 윤석열 당시 대통령을 ‘빛의 나라로 이끄는 구원자’로까지 부르며, 민주주의 유린마저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했어. 심지어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을 '진멸 대상'이라 하는 말을 우린 유튜브를 통해 모두 봤잖아, 그건 정말 충격이었지.


또 미국(2021년)과 브라질(2023년)의 의회 폭동 사건에서도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그들의 폭력 행동과 연결시키기도 했어.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로마 제국과 결탁한 성전 권력 구조에 대한 비폭력적이고 상징적인 저항이었다는 거 너도 아는 내용이잖아.


그리고 여성 문제.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여자는 온전히 순종하며 조용히 배워라. 나는 여자가 가르친다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 같은 구절을 맥락 없이 지금 그대로 적용해서 여성 리더십을 차단하는 것도 그래. 그런데 이 구절은 사실 바울이 직접 쓴 것도 아니고,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안정과 질서를 강조하게 된 후대의 텍스트라는 것이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의 견해라는 것, 너도 들었던바와 같아.


초기 교회는 오히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라는 파격적인 평등 공동체였거든. 이걸 모르면 성서가 오히려 가부장제의 도구로 왜곡돼 버리는 거지.


세 번째 렌즈: ‘약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렌즈는 바로 약자의 자리에서 성서를 읽는 것이야.


기독교 파시즘은 민족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동반해. 자기 민족과 신앙을 동일시하고, 다른 민족과 집단을 차별하거나 배척하지.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언약마저도, 자기들만의 특권으로 왜곡하게 돼.


그런데 성서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들은 강하고 우월한 존재들이 아니었어. 오히려…


- 아브라함은 75세의 고령에 고향땅 하란을 떠났을 때는 자식도 없는 타지인이었을 때(창 12:1) 여호와는 그 앞에 나타나셨고,

- 하갈과 이스마엘은 버려진 존재였을 때, 야웨가 나타나셨고(창 21:17),

- 모세는 도망자로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고 있을 때(출 3:2) 나타나셨고,

- 다윗은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작고 미미한 존재였어(삼상 16:11).


이스라엘 민족 자체도 고통받던 노예의 백성이었잖아. 하나님은 늘 약한 자, 소외된 자, 낮은 자와 함께하셨고, 예수님조차도 마구간의 짐승 밥통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셨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늘 말씀하셨어.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였잖니, 그걸 잊지 마라.” 그 기억이 바로 윤리적 실천의 근거가 돼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성서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라는 책이 아니라, 약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중심에 둔 책이라는 거야.


심지어 여호수아서의 땅 정복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강한 이스라엘이 약한 민족을 점령한 얘기가 아니라, 땅을 잃고 흩어진 작은 민족의 회고와 꿈이 담긴 본문이잖니. 그런데 이걸 식민지 점령과 폭력의 정당화 도구로 쓰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친구야,


오늘 들었던 강연에서 그 강사의 마지막 말이 오래 남는다. 이 세 가지 렌즈—인간의 한계, 역사적 맥락, 약자의 시선—을 통해 성서를 다시 읽는다면, 지금 교회 안에 깊게 스며든 파시즘의 독을 조금씩 해독할 수 있을 거라는.


그리고 이건 단지 정치색을 띤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모두 안에 은근히 자리 잡은 파시즘적 태도—비판을 싫어하고, 다름을 배척하고, 힘의 논리에 끌리는 그런 마음—그걸 먼저 들여다보는 게 신앙의 시작일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함께 되더라.


성서는 더 이상 ‘무기’가 되어선 안 돼. 분열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위한 샘물이 되어야 해.


우리 함께, 그 렌즈로 다시 읽자.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자.


늘 고맙고,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으로.


너의 친구로부터.



[참고]

- 이수연 목사: 새맘교회 담임, 한신대학교 겸임교수

-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_ 피터 엔즈, 기독교문서선교회, 2006.

-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_ 박성철, 새물결플러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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