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이 시대의 사랑> 첫 꼭지
오랜 경험칙의 그림자인가.
또다시 절망이 움트는 만월의 계절 때문인가.
어스름한 새벽녘,
비몽사몽 속에서 가슴을 짓누르는 흉통의 정체를 붙잡으려
애써 정신을 추슬렀다.
어제 밤, 읽다 지쳐 던져둔 시집을 다시 집어 든다.
1980년대, 기약 없던 저항의 시절.
그때의 혐오와 부정, 거부와 두려움이
아직 다 마르지 못한 반지하방의 눅눅한 공기처럼 스며든다.
10월의 새벽, 이슬 머금은 공기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오래된 외로움이 내 안에서 곰팡내로 번져오는 탓일까.
그 순간, 최승자가 결연한 얼굴로
불쑥 내 앞에 다가왔다.
K, 혹시 들어본 적 있어?
1980년대 한국 시단에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이 나왔을 때의 이야기.
그건 단순히 한 시인의 데뷔가 아니었단 이야기 말이야.
그저 감상적인 싯적 노래가 아닌 그러니까,
오랫동안 ‘여성적 감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려진 전통을 단숨에 무너뜨린,
정말 격렬한 사건이었다는구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전해진 그이의 시집 속에서, 내가 강렬히 붙잡혔던 건,
『일찌기 나는』 이 시야.
『일찌기 나는』
_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며칠 전 처음으로 이 시를 읽는데,
마치 숨 막히는 방 안의 창문이 갑자기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훅 밀려드는 것 같았어.
시인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지.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 한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일찌기’라는 말, 단순히 과거를 말하는 게 아닌듯해.
이 시대가 이름을 붙여주기도 전, 가족의 품에 안기기도 전,
이미 일찌기 비존재였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절망의 언어지.
그런데, 이상도 하다. 그 부정 속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거야.
마치 모든 걸 부셔버린 자리에서만이 새로운 '나'를 세울 수 있다는 듯한 그 역동이 말이야.
그리고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지난 내 기억들이 겹쳐졌어.
고향떠나, 타지의 고단했던 달동네에서의 자취방.
누구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그 이름 없는 시간들,
눅눅한 공기 속에서 홀로 견뎌내던 외로움의 1980년대가 말이야.
그러다 문득 깨달아졌지.
시는 단지 저 이만의 고백이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가 지나온 깊은 어둠과도 맞닿아 있다는 걸.
그렇기에 시를 읽는 동안, K, 너를 떠올렸어.
절망을 노래하면서도 그 속에서 다시 살아낼 힘을 끌어올리려는 몸부림,
그것은 시인의 언어이자 동시에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내일의 약속 같았지.
아무리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리라는 믿음,
그리고 끝내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생의 힘 말이야.
K, 오늘 내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어.
『일찌기 나는』이라는 시가 가장 강렬한 충격을 주는 순간은, 시인이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미지들에서 비롯돼. 그것들은 하나같이 ‘아브젝트’, 곧 시대가 혐오하고 배제해온 것들이지.
생각해 봐.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덮인 천 년 전의 시체.”
이 이미지들은 생명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무너뜨려 버려.
그로테스크해서 차마 눈길조차 오래 두기 힘든 장면들이지.
그런데 시인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그 가장 낮고 혐오스러운 자리에 스스로를 놓아 버려.
그건 단순한 자기연민일까? 아니야. 오히려 나는 여기서 시인의 주체적 분노를 봐.
외모 콤플렉스나 가난 같은 부조리한 조건에 짓눌려 온 존재가, 더 이상 숨지 않고 스스로 가장 밑바닥을 끌어안는 순간 말이야.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는” 그 낮은 자리조차 오히려 당당히 선언해버림으로써,
세상이 강요하는 구차한 생존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지.
K, 내가 이 대목에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이거야.
스스로를 쓰레기로 낮추는 그 과격한 부정이야말로, 사실은 위선적인 세상을 향한 가장 날카로운 저항이라는 것.
존재 자체를 하찮다 치부해버리는 그 말 속에는, 세상의 위선을 향한 지독한 혐오와 저주가 숨어 있다는 것.
그러니 그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주체적이고도 강렬한 저항의 방식인 거지.
그러니까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자꾸 네 얼굴이 떠올라.
우리가 함께 견뎌낸 고통의 시간들, 그럼에도 다시 살아내려 애썼던 힘의 순간들이 겹쳐 오지.
혐오와 절망 속에서도, 우리에게 저항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주었던 그때랑 동시에 말이야.
K, 이 구절을 다시 봐봐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어때,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아?
시인은 누군가와의 관계 맺음 자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어.
‘안다’는 건 결국 상대를 규정하는 일이잖아. 그런데 그 규정이란 게, 사실은 종종 폭력이 되기도 하지.
그래서 시인은 그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아예 단절을 선택해버린 거야.
나는 이 대목에서 느꼈어. 관계가 언제나 따뜻한 선물만은 아니구나, 때로는 무겁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기도 하는구나 하고.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이건 그리움의 호명이라기보다, 차갑게 적어 내려간 목록 같지 않아?
행복, 사랑… 보통은 가장 아름다운 말들인데, 최승자 그이에게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
오히려 ‘더 짙은 환멸과 부정의 현실’을 불러오는, 부패한 기호에 불과한 듯해.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냉소적으로 불러내며, 이 세계의 가치들을 또 한 번 철저히 무너뜨려 버려.
시어를 붙여 쓰는 방식에서도 기존의 인식과 질서에 대한 강한 저항이 느껴지지.
그리고 결국, 이 부정의 여정은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응축되는 듯해.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K, 이 얼마나 강렬한 말인가.
‘루머’란 확정된 진실이 아니잖아. 불안정하고, 비공식적이며,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소문일 뿐이지.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불안정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시대와 사회가 강요하는 확정된 진실과 질서에 묶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거야.
언어의 경계 바깥, 그 틈새에 머물겠다는 이 선택.
그녀는 가장 섬세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세상을 전복하고 있는 거지.
자기 파괴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도, 오히려 그 자리에서 독보적인 주체성을 세워 올리고 있다는 것.
K, 이것이 바로 최승자식 시 쓰기의 독특함 아니겠니?
한국 여성 시가 흔히 덧씌워졌던 ‘여린 감수성’을 벗고,
남성 중심의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며 새 역사를 써 내려간 시작점, 바로 그것!
철저한 니힐리즘과 죽음 충동을 창조적 에너지로, 곧 변증법적으로 전환시킨 최승자 시 세계의 원형이라는,
바로 그것!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문학과지성사,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