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란 사소 습격—기억과 선전, 역사의 왜곡에 대한 짧은 리뷰
영국 헐(Hull) 대학교의 레스터 L. 그래비(Lester L. Grabbe) 교수가 2025년 10월 14일(화)에 화상으로 강연을 진행하였다.
강연의 주요 내용은 별도의 기회에 정리하기로 하고, 이번 글에서는 그가 강연 초반에 언급한 흥미로운 예시,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독일군이 무솔리니를 이탈리아에서 구출한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기억되고, 또한 특정한 의도를 지닌 세력에 의해 어떻게 선전의 도구로 재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실제 사건과 선전된 이미지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소비되는 과정은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권력과 기억이 교차하는 담론의 장임을 잘 드러낸다.
결국 이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역사를 읽는 일은 곧 해석의 행위이며, 각 개인이 시대와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주체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역량이라는 점이다.
‘떡갈나무 작전(Unternehmen Eiche)’의 기억(memory), 선전(propaganda), 역사(history)
사건의 배경 (1943년 7–9월)
(1) 지정학적 위기: 이탈리아의 변심과 히틀러의 분노
1943년 7월 25일 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로마가 폭격을 받자,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했으며,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새 총리로 임명했다. 이 사건은 ‘7월 25일’로 불리며,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종말의 상징적 전환점으로 기억된다.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는 분노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정권 교체를 추축국(Axis powers) 동맹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 히틀러는 즉각 이탈리아 침공, 왕실 납치, 교황 감금 등 극단적인 대응책을 검토했으나, 곧 방향을 바꿔 무솔리니 구출에 집중하기로 했다. 새 정부가 무솔리니를 재판에 회부하거나 처형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전략적이었다.
이탈리아가 9월 8일 연합군과 카시빌레 휴전 협정을 발표하자, 히틀러는 이탈리아 점령 작전(“Unternehmen Achse”, 추축 작전)을 즉시 실행에 옮겼다. 동시에 무솔리니 구출 작전(“Unternehmen Eiche”, 떡갈나무 작전)을 정치적·군사적 필수 과제로 간주했다. 무솔리니를 구출해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우는 것은 독일의 주둔 명분을 확보하고 남부 전선의 붕괴를 막으며, 잔존한 파시스트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전략적 포석이었다. 따라서 이 작전은 단순한 동맹국 지도자의 구출이 아니라, 전세를 되돌리려는 나치 정권의 마지막 정치적 도박이었다.
(2) 지휘권 분할: 슈투덴트, 모르스, 스코르체니의 이중 임무
히틀러는 무솔리니 구출 작전의 총책임을 루프트바페(Luftwaffe, 나치 독일 국방군 소속의 공군) 소속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Kurt Student) 상급대장에게 맡겼다. 슈투덴트는 작전의 전체 기획과 실행 승인을 담당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동시에 SS 소속의 야심 찬 장교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 소령을 소환해 작전에 투입했다.
스코르체니는 처음에는 무솔리니의 행방을 추적하고 위치를 확인하는 정보 수집 임무를 맡았다. 체포 이후 무솔리니는 여러 차례 비밀리에 이송되었지만, 독일 정보기관은 도청된 이탈리아군 무선 통신을 통해 그의 최종 위치를 확인했다. 그것은 아브루초 산맥의 그란 사소(Gran Sasso) 고지대, 해발 약 2,100미터에 위치한 외딴 고급 리조트 ‘캄포 임페라토레 호텔(Campo Imperatore Hotel)’이었다. 이곳은 오직 케이블카로만 접근할 수 있었으며, 주변은 이탈리아군에 의해 철저히 경비되고 있었다.
히틀러가 정규군 소속의 슈투덴트 장군에게 작전 지휘권을 부여하면서도 SS 요원을 함께 투입한 결정은, 나치 체제 내부의 권력 구조와 정치적 긴장을 드러낸다. 슈투덴트는 군사적 전문성과 효율성을 상징했지만, 스코르체니는 히틀러와 하인리히 힘러에게 직접 보고하는 정치적 충성파였다. 이로써 작전 지휘 체계는 군과 SS 간의 이중 명령 구조를 형성했다.
결국 이러한 구조는 작전 성공 시 SS가 국방군의 공로를 가로채고, 선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실제로 작전이 성공한 뒤, 스코르체니는 독일 언론과 선전 영화에서 ‘히틀러의 특공 영웅’으로 미화되었고, 이는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작전의 현실 – 모르스 소령과 공수부대
(1) 불가능한 계획: 하랄트 모르스 소령의 전술 청사진
그란 사소 습격 작전의 실질적인 기획과 실행은 (슈투덴트 상급대장의 명을 받은) 루프트바페 제2공수사단 소속 하랄트 모르스(Harald Mors) 소령에게 맡겨졌다. 그는 고지대의 험준한 지형과 제한된 접근로라는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하면서도 정교한 공수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캄포 임페라토레 호텔은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외딴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오직 케이블카로만 접근할 수 있는 사실상의 ‘난공불락 요새’였다. 모르스의 계획은 극도의 정밀성과 동시성을 요구했다. 주력 부대는 DFS-230 글라이더를 이용해 호텔 인근의 좁은 고산 초원에 착륙하고, 동시에 모르스가 직접 지휘하는 지상 부대는 산기슭의 케이블카 하부역을 신속히 점령하여 이탈리아군의 지원이나 후퇴를 차단하는 방식이었다.
이 작전은 고도의 기술과 경험이 필요한 특수 작전으로, 그 성공은 SS의 개인적 무용담이 아니라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숙련된 전술 능력 덕분이었다. 작전의 완벽한 수행은 슈투덴트 장군이 이끄는 제XI 항공군단의 체계적 지원과 모르스의 탁월한 현장 지휘력의 결과였으며, 이는 훗날 나치 선전이 만들어낸 신화적 영웅 서사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2) 작전 실행과 스코르체니의 등장
1943년 9월 12일, 그란 사소 작전이 실행에 옮겨졌다. 독일 공수부대원들은 DFS-230 글라이더를 이용해 캄포 임페라토레 호텔 인근의 고원지대에 강하했다. 작전의 주력은 루프트바페 공수부대가 담당했으며, 여기에 오토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SS 제502저격대대 일부가 합류했다.
스코르체니는 세 번째 글라이더에 탑승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호텔 인근에 가장 먼저 착륙한 인물 중 하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연합군과 휴전 협정을 발표한 직후였기에, 약 200명의 이탈리아 수비대는 거의 저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항복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군 2명 사망, 독일군 10명 부상이라는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저항이 극히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코르체니는 이 상황을 정치적 기회로 바꾸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방으로 돌입하며 “두체, 총통께서 충성의 증표로 저를 보내셨습니다!”라고 외쳤다. 이 장면은 현장에서 촬영되어 곧바로 독일 선전 매체를 통해 퍼졌고, 스코르체니는 단숨에 ‘히틀러의 특공 영웅’으로 떠올랐다.
실제 작전의 성공은 하랄트 모르스의 치밀한 전술 기획과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숙련된 실행 덕분이었지만, 스코르체니는 이 우발적 순간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SS가 전체 작전의 공적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떡갈나무 작전”은 군사적 성과를 넘어, 나치 선전이 만들어낸 신화의 무대로 변모했다.
위험한 탈출 – SS의 이미지 연출
무솔리니의 탈출은 작전 전체에서 가장 위험한 단계였다. 사용된 항공기는 단거리 이착륙(STOL) 기능을 갖춘 경정찰기 피젤러 Fi 156 슈토르히였으며, 조종은 슈투덴트 장군의 전속 조종사 하인리히 게를라흐 대위가 맡았다.
문제는 이 항공기가 조종사와 승객 단 두 명만 탑승할 수 있을 정도로 중량 여유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스코르체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도 함께 탑승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훗날 “모든 책임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상징 효과를 노린 행동이었다.
게를라흐 대위는 초원의 끝자락에 있는 약 300미터 길이의 급경사면을 이용해 간신히 이륙에 성공했다. 무솔리니와 스코르체니는 로마 인근의 프라티카 디 마레 공항으로 이동한 뒤, 하인켈 He 111 폭격기로 갈아타고 빈과 뮌헨을 거쳐 9월 14일 히틀러의 동프로이센 본부에 도착했다.
스코르체니의 무리한 동승은 군사적 판단이라기보다 철저한 이미지 정치의 산물이었다. 그는 “구출된 무솔리니와 함께 귀환한 유일한 장교”로서 작전의 상징적 주인공이 되었다. 그 결과,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전술적 성공은 SS의 영웅 서사로 탈바꿈했고, 이후 독일 선전 영화와 보도 사진은 스코르체니를 유일한 ‘무솔리니의 해방자’로 신격화했다.
작전 참가자별 역할 및 선전 공로 비교
쿠르트 슈투덴트 (공군 / 상급대장): 전체 작전 총괄, 글라이더 침투 계획 승인 → 공로 최소화, SS 중심의 홍보로 가려짐
하랄트 모르스 (공군 / 소령, 공수부대): 작전 기획 및 현장 지휘, 케이블카 기지 장악 → 대중들에게 거의 노출(언급)되지 않음
오토 스코르체니 (무장 SS / 소령): 정보 추적, 일부 돌격 참여, VIP 동행 탈출 → ‘작전 총지휘자’, ‘최초 돌입자’로 과장·신화화됨
하인리히 게를라흐 (공군 / 대위, 슈투덴트의 전속 조종사): Fi 156 슈토르히로 위험한 고지 이륙 및 탈출 성공 → 선전 서사에서 완전히 배제됨
이 비교에서 드러나듯, 그란 사소 작전의 실제 공로는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전술적 숙련도와 하랄트 모르스의 탁월한 현장 지휘에 있었다. 그러나 나치 선전은 이 성과를 SS의 업적으로 왜곡하여, 오토 스코르체니를 ‘히틀러의 전설적 특공대장’으로 영웅화했다.
그 결과, 이 신화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대중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었으며,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연출 사이의 간극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남게 되었다.
영웅담의 조작 – 선전(propaganda)과 역사적 비평
(1) SS 선전 기구와 즉각적인 신화 창조
작전이 성공하자마자 하인리히 힘러의 SS와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는 즉각 움직였다. 두 조직은 이 사건을 정치적 선전의 핵심 소재로 전환하며, 모든 공로를 SS와 오토 스코르체니에게 집중시켰다. 이는 단순한 군사 홍보가 아니라, 국방군(정규군)의 위상을 약화시키고 SS의 전투력과 충성심을 부각함으로써 내부 결속과 외부 공포를 동시에 조성하려는 정치적 의도였다.
히틀러 역시 이 서사를 적극적으로 강화했다. 구출 작전 다음 날인 9월 13일, 그는 스코르체니에게 직접 축하 전화를 걸고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했으며, 동시에 SS 소령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이후 독일 언론은 스코르체니의 칼자국이 난 얼굴과 결단력 있는 자세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그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로 포장했다. 그는 곧 ‘히틀러의 특공 영웅’이자 나치 광신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이 선전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체제 유지의 정치적 장치였다. 1943년은 추축국이 전선 전반에서 패퇴하던 시기로, SS의 ‘대담한 승리’를 부각시키는 것은 정권의 생명력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괴벨스와 힘러는 이 사건을 통해 “독일의 진정한 군사 엘리트는 국방군이 아니라 SS”임을 각인시키려 했다.
(2) 국방군과 SS의 권력 투쟁
‘떡갈나무 작전’은 나치 독일 내부에서 정규군(국방군)과 당군(SS) 간의 권력 경쟁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국방군 장교들은 SS를 군사적 전문성이 부족한 정치적 조직으로 평가절하했지만, SS는 히틀러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점차 정규군의 권한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스코르체니는 과감한 행동으로 히틀러의 주목을 받았으나, 정규 장교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는 SS 내부에서도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 즉흥적 장교”로 평가되었다. 그의 성공은 군사적 역량의 결과라기보다 정권의 정치적 후원과 선전 기획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한편, 작전의 실제 기획자 하랄트 모르스 소령과 총괄 지휘자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은 전후의 증언과 회고록에서 스코르체니 신화를 강하게 반박했다. 그들은 스코르체니가 “보조 인물에 불과했다”고 지적하며, SS가 공로를 가로챈 사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러한 증언은 단순한 명예 회복을 넘어, 나치 체제 내부에서 SS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방식을 폭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오늘날 역사학이 이 사건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핵심적인 근거가 되었다.
(3) 신화의 해체
영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디킨 경은 그란 사소 작전을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일부 참여자들의 사적 허영심으로 인해 역사적 투명성을 잃은 사건”으로 평가했다. 그의 평가는 작전 직후부터 사실이 개인적 명예욕과 정치적 조작에 의해 체계적으로 왜곡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오토 스코르체니에게 집중된 과도한 공로를 재조정하고, 실제로 작전을 설계하고 지휘한 하랄트 모르스 소령에게 정당한 평가를 돌리려 하고 있다. 특히 무솔리니 구출 직후 촬영된 사진 속에서, 밝은 군복과 어두운 모자를 쓴 인물이 모르스임이 확인되면서 시각 자료를 통한 역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스코르체니는 전후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신화적 코만도’ 이미지를 재생산했다. 이로 인해 그의 이야기는 영화, 전쟁 소설, 다큐멘터리, 군사 재현 그룹 등 대중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서사는 여전히 SS를 ‘정예 부대’로 묘사하는 왜곡된 인식을 강화시켰다.
결국 ‘떡갈나무 작전’은 단순한 구출 작전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구성되고 조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이 사건은 “영웅의 탄생”이 결코 객관적 사실의 산물이 아니라, 권력과 선전이 결합해 만들어낸 역사적 연출물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결론 및 역사적 평가
‘떡갈나무 작전’, 즉 무솔리니 구출 작전은 1943년 나치 독일이 거둔 가장 극적인 성공 중 하나로 평가되지만, 그 역사적 서술은 본질적인 이중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이 작전은 하랄트 모르스 소령이 이끄는 공수부대와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의 공군 특수작전 부대가 정밀한 계획과 탁월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완수한 군사적 승리였다. 철저한 정보 수집, 정확한 공수 침투, 그리고 신속한 현장 지휘—이 세 요소가 정규군의 전문성을 대표하며, 작전 성공의 핵심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작전의 정치적 주도권은 오토 스코르체니 SS 소령과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 기구가 장악했다. 스코르체니는 작전의 실질적 공로를 차지하기보다는, 무솔리니 곁에서 사진에 함께 등장함으로써 모든 영예를 SS로 집중시켰다. 그는 군사적 능력보다는 정치적 직감과 선전 감각을 발휘하여, 이 작전을 나치 말기 SS의 정치적 우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변모시켰다.
따라서 ‘떡갈나무 작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오토 스코르체니 개인의 영웅담이 아니라, 하랄트 모르스 소령이 지휘한 공수부대의 탁월한 전술 능력에 기초한 냉철한 분석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이 사건은 성공적인 군사 작전이 정치적 선전의 서사로 변질될 때, 역사적 기억이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나아가 그것은 역사 서술이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권력과 기억이 충돌하는 투쟁의 장임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교훈으로 남는다.
그란 사소의 사례는, 권력이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통제하는가를 보여주는 분명한 교훈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리한 자에 의해 기록되지만,
그 기록을 비판적으로 읽고 숨은 진실을 복원하는 일은 후대의 해석자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따라서 기록된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그 이면의 의도와 맥락을 식별하는 능력은 단순한 지적 역량을 넘어 시대를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 통찰력이다.
권력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서사 속에서 살게 된다.
해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역사와 진실을 스스로 세우는 일인 것이다.
참고자료
1. THE COLLECTOR: How the Nazis Rescued Benito Mussolini: The Gran Sasso Raid, Published: Jan 1, 2025written by Maria-Anita Ronchini, MA History & Jewish Studies, BA History
2. 위키피디아 - Gran Sasso raid
3. Warfare History Network - Operation Eiche: Benito Mussolini & The Gran Sasso Raid
4. blog.nationalmuseum.ch - the-rescue-of-benito-mussolini-the-real-story-and-its-swiss-connection
5. 사진) World War II Database 등
6. 표지이미지) THE COLLECTOR: How the Nazis Rescued Benito Mussolini: The Gran Sasso Raid. 기사 내용 중에서 이미지 추출 및 적용